여가부 폐지, 대통령의 ‘김칫국’

장수경 기자 2024. 2. 2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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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시민 단체 연대체인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와 성평등 정책 강화를 위한 범시민사회 전국행동’(전국행동)이 지난 23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여성가족부 정상화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였다. 전국행동 제공

[젠더 프리즘] 장수경│젠더팀장

“왜 여자들은 남자들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해요?”

얼마 전 가족 식사 자리에서 중학교 2학년인 남자 조카가 내게 물었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은 어떤지 물은 데에 대한 답이었다. 조카는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아 익명으로 둔다)에서 봤다고 했다. 친구들도 보는 채널이라고 덧붙였다. 조카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머리가 울렸다. 여성혐오자가 운영하는 채널이었다.

흔들리는 목소리를 다잡고, 조카에게 살인·성범죄 등 강력범죄 가해자의 80% 이상이 남성이기에 그런 주장도 나온다고 답했다. 조카의 반응은 어땠을까.

“유튜브에서 그 통계가 틀렸다고 하던데요?”

지난해 있었던 넥슨의 여성혐오 사태, 쇼트커트(숏컷) 여성 폭행 사건, 신림동 공원 여성 살해 사건 등이 머릿속에서 필름처럼 지나갔다. 통계의 어떤 부분이 잘못됐냐고 물으니 조카는 근거를 대진 못했다. 나는 얼마간의 설명을 더 한 뒤, 조카에게 “유튜브에는 가짜 뉴스가 많으니 차라리 텔레비전을 보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에 여성폭력이나 성차별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윤 대통령은 지난 20일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며, 후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성폭력·성차별 정책 주무부처 장관 자리는 공석이 됐다.

수장을 잃은 여가부는 당분간 신영숙 차관 대행 체제로 운영된다. 신 차관은 인사혁신처 출신 조직개편 전문가로, 여가부가 주무로 맡는 여성·가족·청소년 정책 중 그의 전공 분야는 없다. 여가부 장관을 공석으로 두는 배경에 대해 대통령실은 지난 22일 연합뉴스에 “법 개정 이전이라도 공약 이행에 대한 행정부 차원의 확고한 의지 표명이 필요하다는 게 윤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밝혔다.

예견된 일이었다. 윤 대통령은 잼버리 파행으로 지난해 9월 사의를 밝힌 김 전 장관 후임에 김행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을 지명했으나, 김 후보자가 주식파킹·배임·줄행랑 등으로 낙마하자 별다른 언급 없이 김 전 장관 체제를 유지했다. 후임 장관을 구하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윤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의를 밝힌 김 전 장관과 여가부의 ‘불편한 동거’는 5개월이나 방치됐다.

그리고 4·10 총선을 약 50일 남겨둔 지난 20일, 윤 대통령은 김 전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며 여가부 폐지 이슈에 다시 불을 붙였다. 20대 대통령 선거 두달 전 ‘여성가족부 폐지’ 단 일곱 글자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을 때처럼 말이다. 국회와 국민의 반대로 여가부 폐지안이 제외된 정부조직 개편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다.

정부·여당은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다수당이 되면 여가부 폐지를 밀어붙인다는 계획이다. 이미 총선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엿보인다. 대통령실은 “다음 국회에서 정부조직법을 고쳐 여가부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김가로 여가부 대변인도 조직개편을 미리 준비 중이며, 현재 공석인 실·국장 인사에 대해 다른 부처 담당자를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현재 청소년가족정책실장과 정책기획관·여성정책국장은 공석이다.

현 정권은 여가부의 목적을 저출생으로 좁히고 있지만 여가부의 존재 이유는 뚜렷하다. 정부조직법은 ‘여성정책의 기획·종합, 여성의 권익 증진 등 지위 향상, 청소년 및 가족에 관한 사무’를 여가부의 역할로 정한다. 입버릇처럼 법치를 외치는 대통령이, 법이 바뀌기도 전에 법 규정을 사문화하는 취지의 조직개편을 하라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2021년 발생한 흉악범죄 사건 중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은 87.6%다. 한국의 유리천장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29개국 중 11년째 꼴찌다.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올해 주제는 ‘포용을 고취하라’다. 포용 대신 배척을 택한 이 정부에서 조카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 아득하다.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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