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가 고밀 개발의 면죄부일까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한겨레 2024. 2. 2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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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계획(안) 조감도. 녹지가 초고층 고밀 개발을 정당화하는가. 서울시 보도자료

배정한│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기후 변화와 환경 위기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겉으로만 녹색과 친환경을 앞세우는 그린워싱 정책과 마케팅이 많아지고 있다. ‘그린워싱’은 실제로는 친환경과 무관하거나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면서도 환경을 위하는 척하는 행위를 뜻한다. 녹색 거짓말이나 위장환경주의로 번역하기도 한다. 거짓말, 증거 불충분, 애매모호한 주장, 관련성 없는 주장, 상충 효과 감추기, 부적절한 인증 등 다양한 양태의 그린워싱이 시민과 소비자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2023년 8월 그린피스 서울사무소는 국내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인스타그램의 1년간 게시물을 분석해 ‘그린워싱 실태 시민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시민 497명이 참여해 조사한 이 보고서를 보면, 가장 많은 그린워싱 유형은 ‘자연 이미지 남용’이다(51.8%). 예를 들어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에스유브이(SUV) 차량을 울창한 숲속에 세워둔 광고처럼, 제품의 실제 성능과 무관하게 친환경 이미지를 씌우는 경우다. 두 번째는 ‘책임 전가’형인데(39.8%),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노력을 구체적으로 하기보다는 플로깅(조깅을 하며 쓰레기를 줍는 활동) 같은 참여형 이벤트를 통해 시민과 소비자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다음은 ‘녹색 혁신 과장’으로(18.3%), 정보와 근거를 공개하지 않고 친환경 개발이나 저탄소 기술 혁신을 과장 강조하는 그린워싱 유형이다.

생태, 에코, 친환경을 내세운 건설 사업과 지자체의 도시 개발 프로젝트에도 그린워싱이 개입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산을 통째로 깎아내고 만든 초고층 아파트 단지의 설계 개념으로 ‘생태공원 그 이상’ 같은 표현이 쓰인다. 친환경으로 포장된 개발 사업에 도시계획, 건축, 조경 전문가들이 녹색 면죄부를 발행하곤 한다. 던지고 보는 식의 친환경 공약이 선거철만 되면 기승을 부린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의 ‘공원 같은 나라 정원 같은 도시’라는 비전도, 전국 여러 지자체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정원도시’ 열풍도 무늬만 친환경인 건 아닌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지하, 지상, 공중의 그린, 그린, 그린.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계획(안) 투시도. 서울시 보도자료

지난 2월5일 서울시가 발표한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계획(안)’의 보도자료 헤드라인은 놀랍게도 “사업 부지 100% 녹지 확보한 친환경 수직 도시”다. 부지 전체가 녹지란 뜻일까. 그렇다면 수직 도시는 무엇인가. 이 계획은 2013년 자금 부족과 국제금융위기로 엎어진 용산 정비창 일대 개발 사업을 11년 만에 되살린 것이다. 지구 중앙의 국제업무존 용적률을 1700%까지 허용하고 100층 안팍의 랜드마크 타워를 세우는 등 초고밀 복합개발이 사업의 핵심이다. 서울시는 뉴욕 역사상 최대 부동산 개발지인 “허드슨 야드의 4.4배 규모인 49.5만㎡ 부지에 세계 최대의 수직 도시”가 탄생한다고 밝히면서 “허드슨 야드의 ‘베슬’ 같은 상징 조형물을 설치해 명소화”할 것임을 강조한다. “사업 안전성을 위해” 공공 기관(코레일과 SH공사)이 투자해 기반 시설을 조성한 뒤 민간 사업자에게 부지를 매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2030년 초에 입주가 시작된다.

서울시의 표현 그대로 “고밀 개발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향하는 역대급 부동산 개발 사업인데, 보도자료의 상당 부분은 녹지 확보 방안에 관한 내용이다. “사업 부지 면적 100% 수준의 녹지를 확보”하기 위해 부지 20%를 공원과 녹지에 할애한다. 건물 공개공지의 개방 녹지가 30%고, 나머지 50%는 테라스와 옥상, 벽면 녹화다. 왜 수직 도시의 녹지를 100%로 맞춰야 하나. 부지 전체와 똑같은 면적의 공원과 녹지로 개발 사업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일까. 공중 녹지의 이름은 ‘그린스퀘어’다. 순환형 녹지는 ‘그린커브’, 선형 녹지는 ‘그린코리더’다. 보도자료의 예시 조감도들은 초록 일색이다. 지상의 드넓은 공원, 건물 옥상과 보행교 위의 입체 녹지, 배경은 푸른 하늘과 맑은 한강. ‘자연 이미지 남용’형과 ‘녹색 혁신 과장’형을 섞은 그린워싱이라는 의구심이 든다.

허드슨 야드는 뉴욕의 새 랜드마크인가, 글로벌 부동산 기업의 왕국인가. 위키미디어 코먼스

허드슨 야드 프로젝트를 무작정 모델로 삼을 일이 아니다. 버려진 철도차량기지를 복합개발한 허드슨 야드는 뉴욕의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명소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글로벌 부동산 기업의 왕국”(더 뉴요커)이자 “0.1% 부유층의 놀이터”(뉴욕타임스)라는 식의 비판도 적지 않다.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이 탄소 중립과 균형 발전에 역행한다는 반론을 피하려고 녹색 면죄부를 발행하기보다는, “14.6만명 고용, 32.6조원 생산 유발”이라는 기대 효과의 구체적 근거를 공론장에 올리고 토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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