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오래된 연립주택처럼 [1인칭 책읽기]

이민우 기자 입력 2024. 2. 25.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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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랩장의 1인칭 책읽기
정우영의 「순한 먼지들의 책방」
시간이 지나고 숙성되는 것들
오래된 집 같은 속울음과 위로
30년을 넘게 한자리를 지킨 연립주택은 시집 「순한 먼지들의 책방」을 닮았다.

여자친구와 함께 살기 위해 서울의 한 연립주택 단지로 이사를 했다. 1987년 준공했다는 이곳은 시간이 멈춰있다. 주택 단지를 지키는 경비실과 3층을 넘지 않는 낮은 건물들. 편의점이나 대기업 마켓 대신 금고를 열고 계산해주는 작은 슈퍼마켓이 있다. 15개동의 건물에 338세대가 모여 산다는 이곳은 서울에서 한발짝 떨어져 나와 시간을 비껴간 것 같았다.

이곳에는 유난히 노인들과 초등학교를 아직 가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많았다. 봄이 돼 날씨가 풀리자 노인들은 밖에 나와 빛을 쐬고 있었다. 높은 건물들이 주변에 없어 단지에는 언제나 볕이 깊게 들었다. 빛의 온기가 좋아 나도 종종 햇살을 받기 위해 앉아 있곤 했다. 책을 읽기 참 좋은 공간이었다.

정우영 시인의 시집 「순한 먼지들의 책방」을 읽었다. 「활에 기대다」 이후 6년 만에 펴낸 다섯번째 시집이다. 1960년에 태어난 정우영 시인의 시집을 보면서 이 시집이 내가 이사 온 연립주택 단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 시집에는 정우영 시인의 유년 시절 하굣길의 기억이, 자전거 여행의 추억이, 그리고 어머니와 후배 시인들의 기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수십년의 시간을 지켜온 이 연립주택 단지의 빛처럼 시인의 시는 차분히 주변을 더듬어 나간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구로구 고척동의 한 아파트에 살았다. 그 아파트는 모든 차를 지하에 주차하게 만들어 지상을 공원으로 만든 곳이었다. 차들의 흔적은 지워졌지만 그곳을 사람이 채우진 못했다.

특히 놀이터는 버려진 유적지 같아서 이따금 찾아오는 고양이를 제외하면 조용했다. 노인과 아이들은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아침 일찍 버스나 차를 타고 어디론가 나갔고 모두들 밤늦게야 돌아왔기에 사람의 흔적은 빠르게 사라졌다. 아는 이도 없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살림을 합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살림을 덜어내는 일이기도 했다. 안 읽는 책, 안 쓰는 도구, 헌 옷을 정리했다. 이 연립주택 단지의 분리수거장은 주택 단지의 출입구 쪽에 있었다.

어느 날은 여자친구가 분리수거장에 열대어들이 담긴 어항이 나와 있다고 이야기했다. 구피였다. 3~4㎝ 붉은 꼬리를 가진 열대어. 어항 옆으로는 열대어를 키울 수 있는 장비들이 종이 쇼핑백에 잘 담겨 있었다. 그 쇼핑백에는 작은 편지도 한 통 쓰여 있었다. 자신의 몸이 안 좋아져 더이상 기를 수 없으니 누군가 대신 길러주었으면 좋겠다는 한 노인의 편지였다.

누군가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구피를 데려간 사람이 없다면 가져와서 기르기로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됐다. 다시 나간 분리수거장에서 벌써 누군가 열대어와 장비를 챙겨 갔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마지막 애정이었을 그 작은 열대어들은 무사히 다음 터전을 찾았다.

나는 열대어를 누군가 데려간 것에 안도했다. 이 연립주택 단지에서 누군가는 삶의 아픈 시간을 지나고 또 누군가는 새시작을 준비할 거다. 작은 열대어를 챙긴 누군가의 마음이 닿은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 나는 이러한 풍경에서 정우영 시인의 시집을 떠올린다.

정우영 시인의 시 '하굣길'에선 정우영 시인의 유년시절 죽은 막둥이를 등에 매고 가던 용기 아버지를 만난 일화가 나온다. 용기 아버지가 매고 있던 것이 막둥이인 줄 몰랐던 정우영 시인은 용기 아버지에게 밝게 인사를 한다. 정우영 시인은 나이를 먹고 나서야 그날을 떠올리며 용기 아버지의 마음을 되돌아본다. 정우영 시인은 자신이 용기 아버지의 나이가 돼서야 그 황망한 날의 속울음이 차올랐다고 이야기한다.

[사진 = 창비 제공]

정우영 시인의 시집은 바로 이러한 속울음이다. 시간이 지나고 숙성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 30년을 넘게 한자리를 지킨 연립주택처럼 수많은 죽음이 그의 시집에 있지만 그것은 부정적이거나 공포스러운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담담히 준비가 되는 것. 시인은 시종일관 한껏 성숙해진 목소리로 후배를, 동료를, 부모님을, 그리고 지구를 담담하게 위로한다. 그것은 마치 쇠약해지는 시기를 준비하기 위해 자신이 아끼던 열대어를 주택 입구에 남긴 노인과도 같고 그것을 챙겨간 빌라의 주민과도 같다.

햅쌀보다 맛나고 다디단 햇살밥을 지어놨다며 볕 먹으러 오라는 시인의 온정은 이제 시인이 누군가를 온전히 따뜻이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됐음을 뜻하기도 한다. 「순한 먼지들의 책방」은 봄 햇살과 같은 시집이다. 그리고 조금은 오래된 연립주택 단지의 사람들을 닮은 시집이다. 봄볕처럼 따뜻해지고 싶은 이들에게 온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나에겐 잠시 기대고 낮잠을 자고 싶은 볕이었다.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lmw@thescoop.co.kr

Lab. 뉴스페이퍼 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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