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건축·세계와 연결’ 솔올미술관, 출발은 화려했지만···

이영경 기자 2024. 2. 2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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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에 문을 연 솔올미술관 전경. ‘백색 건축’의 대가로 불리는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철학을 계승한 마이어 파트너스가 건축했다. 솔올미술관 제공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 새로 문을 연 솔올미술관이 여러모로 화제다. ‘백색 건축’으로 유명한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철학을 승계한 마이어 파트너스가 설계를 맡은 미술관이자,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이탈리아 현대 미술의 거장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화려한 출발’이었지만 지난 19일 개관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김석모 솔올미술관장이 강릉시를 향한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출함으로써 ‘미술관의 앞날’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솔올미술관에서 내려다보이는 강릉시내. 솔올미술관 제공
#백색건축

마이어 특유의 백색 건축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솔올미술관은 백색 노출 콘크리트와 알루미늄 패널, 투명유리창을 이용해 단순하면서도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는 세련된 멋이 느껴지는 건축물이다. 강릉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해발고도 62m의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아 건물 곳곳에서 통유리창을 통해 강릉 시내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리처드 마이어는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자연의 빛을 활용한 흰색 건축물로 유명하다. 마이어는 로스앤젤레스 게티 센터, 프랑크푸르트 응용미술관 등 미술관을 설계하기도 했다. ‘현대 건축의 거장’으로 불렸지만 2018년 ‘미투 운동’ 당시 같이 일했던 여성 9명이 그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현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마이어 파트너스가 설립돼 그의 건축 철학을 이었다. 솔올미술관은 마이어 파트너스가 처음 건축한 미술관이다. 강릉엔 마이어가 직접 설계한 건축물이 있다. 2016년 경포대에 문을 연 씨마크호텔은 마이어가 은퇴 전 설계를 맡았으며 탁 트인 동해 바다를 배경으로 자리잡은 순백색 건물이다.

지난 19일 찾은 솔올미술관은 주변의 아파트 공사와 공원 조성이 마무리되지 않아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백색 건축’의 매력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연덕호 마이어 파트너스 대표는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이 방해받지 않도록 고요하면서도 완벽한 조연이 되도록 미술관을 설계했다.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동시에 예술작품과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빛의 각도, 시간에 따라 다른 색감과 다른 느낌을 주는 ‘백색 건축’의 특징을 솔올미술관도 보여준다. 시원한 통유리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는 자연광과 내부 조명이 조화를 이뤄 부드러운 느낌을 줬다. 연 대표는 “노출 콘크리트는 먼 풍경에서 건물을 바라볼 때 조경에 삽입된 묵직한 풍경처럼 보이도록 했다. 미술관 내부에서는 주변 경관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미술관 규모는 아담한 편으로, 총 3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 환경 작품 ‘검은 빛의 공간 환경’. 솔올미술관 제공
루치오 폰타나의 ‘네온이 있는 공간 환경’. 솔올미술관 제공
#세계미술과 한국미술의 ‘연결 고리’

솔올미술관의 첫 전시는 이탈리아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는 루치오 폰타나(1899-1968)의 전시다. 1947년 ‘제1차 공간주의 선언’ 이후 선보인 작품들로 폰타나가 전통 회화의 평면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캔버스에 구멍을 뚫거나 칼로 벤 ‘행위’를 남긴 작품들이다.

“예술은 행위(gesture)로서 영원하지만 물질적으로는 수명을 다할 것이다.…수행된 하나의 행위가 한 순간에 불과하든 천년동안 생명을 이어가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행위가 수행됐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원하다는 것을 확신한다.”(제1차 공간주의선언문)

1층에선 공간주의를 대표하는 회화 21점을 볼 수 있다. 캔버스를 뚫거나 칼로 벤 자국을 내고, 금속을 긁거나 베어 만든 ‘베기’ ‘뚫기’ 연작들이다.

2층 전시장과 로비엔 그동안 잘 소개되지 않았던 공간환경 연작 6점을 볼 수 있다. 공간과 네온, 조명 등 빛을 이용한 작품으로 1940~60년대 당시 설치됐던 작품을 그대로 복원했다. 빛과 공간에 대한 탐구로 확장된 공간환경 작품 속에서 관객들은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하게된다. 형광색으로 빛나는 조각이 천장에서 빛나는 깜깜한 방, 붉은빛과 분홍빛, 하얀빛으로 빛나는 복잡한 구조의 공간 등으로 만들어진 공간환경 작품 속으로 관객들이 직접 걸어들어가 공간을 ‘체험’할 수 있다.

공간환경 작품은 백색 건물과 빛으로 공간미를 창출해 낸 솔올미술관 건물과 잘 어우러진다. 2층까지 트인 미술관 로비 천장에 설치된 백색 네온 조명인 ‘제9회 밀라노 트리엔날레를 위한 네온 구조’는 마치 미술관의 일부인 것 같다. 아쉽지만 공간환경 작품들은 전시가 끝나면 철거된다.

솔올미술관 로비 천장에 설치된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환경 작품 ‘제9회 밀라노 트리엔날레를 위한 네온 구조’. 솔올미술관 제공

병행 전시되는 ‘in Dialog: 곽인식’도 흥미롭다. 솔올미술관은 “세계의 미술과 한국미술을 연결”하기 위해 폰타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작업한 곽인식(1919-1988)의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화면에 바늘로 무수한 구멍을 내거나 철 구슬로 유리판을 깨뜨리고 동판을 찢고 다시 봉합한 작품들이 폰타나의 ‘베기’ ‘뚫기’ 연작과 연결된다. 폰타나가 공간과 빛, 경험 자체로 작품을 확장시켰다면, 곽인식은 사물의 물성을 깊이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김석모 관장은 “한국미술이 세계미술사적 맥락 속에서 읽혀져야 한다는 사명으로 세계적 대가의 전시를 소개함과 동시에 한국의 현대미술가 곽인식의 작품을 함께 선보였다”며 “솔올미술관이 관광명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진짜 미술을 만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솔올미술관은 두 번째 전시로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아그네스 마틴의 전시를 선보인다. 테이트모던 미술관장을 지낸 프란시스 모리스가 직접 큐레이팅을 맡아 기대를 모은다. 솔올미술관은 마틴의 전시와 더불어 한국 작가 정상화의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루치오 폰타나 ‘공간 개념, 기다림’(1959), 캔버스에 아닐린, 베기, 100 x 100 cm. 루치오 폰타나 재단·솔올미술관 제공
곽인식 ‘작품 65-5-’(1965), 동판, 동철사, 100 x 107 cm. 솔올미술관 제공
#불확실한 미래

솔올미술관은 강릉시 7공원구역 안에 아파트단지를 개발하면서 시행사 교동파크홀딩스가 건립한 미술관이다. 현재는 한국근현대미술연구재단이 위탁운영하고 있으며 공원 정비사업이 완료되는 올해 하반기에는 소유권이 강릉시로 넘어가게 된다. 강릉시는 이후 강릉시립미술관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김 관장은 “세계미술과 한국미술을 연결하는 미술관” “소장품 없는 21세기형 미술관”을 표방했지만 강릉시로 소유·운영권이 넘어간 뒤엔 다른 기조로 운영될 공산이 크다. 오는 8월 임기가 종료되는 김 관장이 강릉시와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며 이례적으로 강한 불만을 표한 것도 이때문이다. 김 관장은 “대한민국 미술계가 솔올미술관 때문에 들썩이는데, 들썩이지 않는 곳이 단 하나, 강릉시청”이라고 말했다.

솔올미술관 운영을 맡게 되는 강릉아트센터 관계자는 “강릉아트센터장이 관장을 맡아 시립미술관으로 운영할 계획이며, 공립미술관이라면 당연히 소장품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4월14일까지. 1만원

강릉 |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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