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팔도 ‘뇌섹남’ 성지였던 이곳…“한 바퀴 돌면 과거급제, 단 하루 만에 마쳐야” [서울지리지]
북학파 학자 유득공(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誌)> 중 ‘유상(游賞·노닐며 구경하다)’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유득공이 살던 시대의 서울 사람들은 노닐며 구경하는 것 중 도성걷기를 최고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 유본예(1777~1842)가 1830년 펴낸 서울의 인문지리서 <한경지략(漢京識略)>도 “봄과 여름철에는 성안 사람들이 짝을 지어 성 둘레를 따라서 한 바퀴 돌면서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 한 바퀴 돌자면 하루 해가 걸린다. 이것을 순성놀이라 한다”고 했다.
순성(巡城)은 “성을 따라 돌며 구경한다”는 뜻이다. 도성을 돌며 사계절의 경치를 즐기는 일은 오늘날도 그렇지만 조선시대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이자 일상이었다.
한양도성은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낙타산) 등 서울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됐다. 사산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굽이굽이 뻗어있는 성곽과 조화될 때 더욱 빼어난 경관을 연출한다. 무엇보다 성곽 곳곳에 서울 도심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조망지역이 산재해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후기 학자 윤기(1741~1826)는 <무명자집>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구불구불 성가퀴 따라가며(逶迤隨睥睨), 산하를 한눈에 조망하노라(眺望領山河). 바위에 걸터앉은 사람 셋이되(坐石人三影), 숲속에 깃드는 새들 많도다(投林鳥衆柯). 기암괴석 때때로 호랑이 모양(怪巖時象虎), 놀이하는 북소리 이따금씩 둥둥(遊鼓或鳴鼉) … 돌아갈 생각에 아쉬움 남으니(欲歸還有惜), 경치 이야기만 끝없이 할 밖에(談景定無他)”
정조때 삼정승을 지낸 번암 채제공(1720~1799)도 순성을 했다. 그는 <번암집>에서 “사람들은 옛 성곽을 따라 가물가물 넘어가고(人隨古堞蒼茫度), 시내는 고운 봉우리 담아 굽이굽이 흘러가네(川控姸岑委曲過). 쫓겨난 객이 하늘 끝 아스라이 바라보매(遷客天涯徒極目), 푸른 구름 아득히 도성을 가리는구나(碧雲迢遞限京華)”라고 했다.
외국인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1415~1479)은 ‘등부루(登樓賦)’에서 “북악산은 드높아 궁전이 더욱 찬란하고 남산 봉우리는 앞에 치솟아 성곽이 사방으로 둘려져 있네. 높은 암벽은 꿈틀꿈틀 서쪽을 가로막고 겹겹 산봉은 빙 둘러 동쪽으로 달린다”고 감탄했다. 영국의 탐험가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 Landor·1865~1924)는 “도읍을 감싸고 도는 성벽은 마치 커다란 뱀처럼 높은 절벽 위 아래로 펼쳐져 있다”고 했고,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외교관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1855~1916)도 “서울의 성벽은 매우 당당하고도 인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성안에서 보건, 성 밖에서 보건 성벽은 서울의 가장 독보적인 볼거리 중 하나”라고 했다.
신문은 “지금의 백작 이완용 씨, 자작 박제순 씨, 자작 임설준 씨 등도 청년시대에는 매우 많이 놀러 다녔던 모양이라”고 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신문은 “그러나 순성은 비가 오던지 바람이 불던지 꼭 하루에 마치지 않으면 효험이 없는 것인 즉 그것이 또한 재미있는 규정이라 생각하노라. 그중에는 종로의 상인들도 자기 상점의 운수를 축수하노라고 남몰래 가만히 성벽을 한번 도는 등 옛날에는 순성을 일종의 신앙으로 여겼던 모양이라”라고 했다.
숙종대에도 대대적 보수를 실시한다. 공사는 1704년(숙종 30) 착수해 1712년(숙종 38)에야 마무리됐다. 지방민 대신 도성수비군인 오군영에서 작업을 맡았다. 성돌은 정릉 주변 채석장에서 조달했다. 북한산성(1711)과 북한산성·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1718)도 함께 축성해 수도외곽 방어시설을 확충했다. 한양도성은 영조, 정조, 순조, 고종 연간에도 고쳐졌다.
2000년 이후 역사적 관점의 복원 논의가 이뤄지고 2012년부터 한양도성도감이 설립돼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보존 계획이 수립돼 보존 작업이 진행됐다. 그러나 사실, 성곽의 외형은 1970년대에 상당 부분 보수됐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가 창의문 안쪽까지 잠입한 이른바 김신조 사건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박정희 정권은 서울시 요새화 계획의 일환으로 ‘서울성곽 및 성문 복원공사 계획’을 세웠다. 이어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삼청, 성북, 삼선, 동숭, 광희, 장충, 남산, 청운지구 등 8개 구역으로 나눠 대대적인 수리를 했다.
한양도성은 성문과 성곽의 원형이 보존돼 있고 수축의 기록이 성벽에 잘 남아있다. 또한 성곽 주변으로 문화재와 역사적 명소도 산재해 있다. 무엇보다 인왕산, 북악산 등 자연환경과 어우진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인왕산 정상, 백악구간, 남산 잠두봉은 조망명소로 인기다. 조선시대에는 도성길 최고의 명소는 뜻밖에도 낙산 일원이었다. 북서남은 지대가 높은데 반해 동쪽은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았고 물이 흘러가는 수구(水口)가 있었다. 유본예의 <한경지략>은 “동쪽의 허함을 막기위해 조산(造山·인공산)을 만들고 버들을 많이 심었다. 이것이 식목소(植木所)라 일러 봄이 되면 풍치가 볼만해서 성안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었다”고 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역사가 흐르는 성곽 길을 돌며 봄의 정취를 즐겨 보시길.
<참고문헌>
1. 경도잡지(京都雜誌). 유득공(1748∼1807)
2. 한경지략(漢京識略). 유본예(1777~1842)
3. 영재집-춘성유기(유득공). 무명자집(윤기). 번암집(채제공). 조선왕조실록
4. 서울한양도성. 서울역사박물관. 2015
5. 도성일관. 한양도성박물관. 2015
6. 서울 도성을 품다. 서울역사박물관. 2012
7. 도성과 마을. 한양도성박물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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