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팔도 ‘뇌섹남’ 성지였던 이곳…“한 바퀴 돌면 과거급제, 단 하루 만에 마쳐야”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2. 2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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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길 걸으며 조선 600년 역사를 느끼다
성북지구 성곽길 복원직후 모습(1978년 3월 31일 촬영). 성곽에 붙어있는 학교는 보성고(현 서울과학고)다. 서울도성은 2000년대 이후 복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서울 요새화 계획’의 일환으로 1975년부터 1980년까지 많은 부분 보수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성의 주위 40리(16㎞)를 하루 동안에 두루 돌아다니고 성 내외의 꽃과 버들을 다 본 사람을 제일로 친다. 그리하여 꼭두새벽에 오르기 시작하여 해질 무렵에 다 마친다. 그러나 산길이 험하여 포기하고 돌아오는 자도 있다.”

북학파 학자 유득공(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誌)> 중 ‘유상(游賞·노닐며 구경하다)’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유득공이 살던 시대의 서울 사람들은 노닐며 구경하는 것 중 도성걷기를 최고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 유본예(1777~1842)가 1830년 펴낸 서울의 인문지리서 <한경지략(漢京識略)>도 “봄과 여름철에는 성안 사람들이 짝을 지어 성 둘레를 따라서 한 바퀴 돌면서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 한 바퀴 돌자면 하루 해가 걸린다. 이것을 순성놀이라 한다”고 했다.

순성(巡城)은 “성을 따라 돌며 구경한다”는 뜻이다. 도성을 돌며 사계절의 경치를 즐기는 일은 오늘날도 그렇지만 조선시대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이자 일상이었다.

한양도성은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낙타산) 등 서울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됐다. 사산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굽이굽이 뻗어있는 성곽과 조화될 때 더욱 빼어난 경관을 연출한다. 무엇보다 성곽 곳곳에 서울 도심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조망지역이 산재해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인왕·북악산 빼어난 자연환경과 어울어진 성곽길, 시인묵객들 찬사
삼청지구 성곽 복원공사 모습(1976년 2월 20일 촬영). [서울역사박물관]
삼청지구 성곽복원 공사현장에서 성돌을 운반하는 삭도(1976년 2월 29일 촬영). 경사가 급한 삼청지구에는 12개 삭도 타워를 설치해 성돌을 옮겼다. [서울역사박물관]
유득공은 1770년 음력 3월, 한양에서 봄 소풍을 하고 느낀 감흥을 적은 ‘춘성유기(春城遊記)’를 남겼다. 그는 남산에 올라 도성의 광경을 내려다보며 “성안의 집들은(城中之屋), 새로 갈아서 짙푸른 빛 띠는 밭처럼 맑고 깨끗하네(如靑黎之田新畊而粼粼). 큰 길은 긴 냇물이 들판을 가르고 여러 굽이를 만든 듯 하니(大道如長川之劈野而露其數曲), 사람과 말은 그 냇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작은 새우들(人與馬其川中之魚鰕也)”라고 묘사했다.

조선후기 학자 윤기(1741~1826)는 <무명자집>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구불구불 성가퀴 따라가며(逶迤隨睥睨), 산하를 한눈에 조망하노라(眺望領山河). 바위에 걸터앉은 사람 셋이되(坐石人三影), 숲속에 깃드는 새들 많도다(投林鳥衆柯). 기암괴석 때때로 호랑이 모양(怪巖時象虎), 놀이하는 북소리 이따금씩 둥둥(遊鼓或鳴鼉) … 돌아갈 생각에 아쉬움 남으니(欲歸還有惜), 경치 이야기만 끝없이 할 밖에(談景定無他)”

정조때 삼정승을 지낸 번암 채제공(1720~1799)도 순성을 했다. 그는 <번암집>에서 “사람들은 옛 성곽을 따라 가물가물 넘어가고(人隨古堞蒼茫度), 시내는 고운 봉우리 담아 굽이굽이 흘러가네(川控姸岑委曲過). 쫓겨난 객이 하늘 끝 아스라이 바라보매(遷客天涯徒極目), 푸른 구름 아득히 도성을 가리는구나(碧雲迢遞限京華)”라고 했다.

외국인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1415~1479)은 ‘등부루(登樓賦)’에서 “북악산은 드높아 궁전이 더욱 찬란하고 남산 봉우리는 앞에 치솟아 성곽이 사방으로 둘려져 있네. 높은 암벽은 꿈틀꿈틀 서쪽을 가로막고 겹겹 산봉은 빙 둘러 동쪽으로 달린다”고 감탄했다. 영국의 탐험가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 Landor·1865~1924)는 “도읍을 감싸고 도는 성벽은 마치 커다란 뱀처럼 높은 절벽 위 아래로 펼쳐져 있다”고 했고,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외교관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1855~1916)도 “서울의 성벽은 매우 당당하고도 인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성안에서 보건, 성 밖에서 보건 성벽은 서울의 가장 독보적인 볼거리 중 하나”라고 했다.

조선말 “과거급제한다”는 미신적 요소 가미되며 순성 선풍적 인기
조선후기 이후 미신적 요소까지 가미되면서 순성은 선풍적으로 유행한다. 1916년 5월 14일자 매일신보는 “오늘은 순성하세”라는 제목의 자사 주최 순례안내 기사에서 순성시 유의사항, 준비물, 일정과 함께 그 유래를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신문은 순성이 과거급제를 위한 신앙으로 행해졌다고 소개한다. “순성은 옛날에도 풍성히 행했던 바이라. 더구나 옛날에 과거를 행하였을 때에는 고등문관 후보자(급제자)가 성히 순유를 행하였더라. 순로(巡路)는 서대문이나 또는 동대문을 시초로 삼아 성벽을 한번 돌아가지고 다시 서대문으로부터 동대문, 동대문으로부터 서대문까지 돌았는데, 이것은 동그란데에 가운데를 뚫어 꽂은 모양같이 되어 中자를 놓고 과거(科擧)의 점(占)이 되면 매우 길하다고 기꺼워(기뻐)하였던 것이라.”
한양도성 순성단 홍보 광고(매일신보 5월 14일자). 고대하시던 ‘순성장거’가 14일 오전 7시30분 남대문소학교에서 모였다가 8시 남대문에서 출발하며 회비도 없고 점심만 준비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봄, 가을이면 각급 기관단체의 한양도성 순성행사가 쇄도했다.
도성을 한 바퀴 돌면 원(圓)모양이 되고 다시 도성의 지름을 통과하면 ‘가운데 중(中)’자가 완성된다. 中은 “명중하다, 맞히다”는 뜻도 있어 순성을 하게 되면 시험을 잘 맞힐 수 있다고 사람들이 믿었던 것이다.

신문은 “지금의 백작 이완용 씨, 자작 박제순 씨, 자작 임설준 씨 등도 청년시대에는 매우 많이 놀러 다녔던 모양이라”고 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신문은 “그러나 순성은 비가 오던지 바람이 불던지 꼭 하루에 마치지 않으면 효험이 없는 것인 즉 그것이 또한 재미있는 규정이라 생각하노라. 그중에는 종로의 상인들도 자기 상점의 운수를 축수하노라고 남몰래 가만히 성벽을 한번 도는 등 옛날에는 순성을 일종의 신앙으로 여겼던 모양이라”라고 했다.

이완용 등 친일파도 성곽길 자주 찾아···신문엔 순성대 모집 기사·광고 쇄도
신문에는 각급 기관, 단체의 순성참가 홍보 기사나 광고가 경쟁적으로 게재됐다. 동아일보 1930년 10월 31일자는 백두산이학회(白頭山理學會)라는 잡지사의 “순성대 모집” 기사를 싣고있다. 주최측은 “11월 2일 단풍 쌓인 서울의 성을 한바퀴 돌기로 되어 있어 남녀노소 불문하고 참가하기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또 주최측은 참석을 독려하기 위해 “순성대에 시조시인·사학자 노산 이은상(1903~1982) 외 여러 사람이 참관해 전설 등을 자세히 들을 수 있다”는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성북지구 성곽 복원전 모습(1976년 12월 1일 촬영). 성북지구는 숙정문에서 혜화문 사이의 구간. 사진에서는 성곽이 유실되어 일부만 남아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성북지구 성곽공사 장면(1976년 11월 15일 촬영). [서울역사박물관]
성북지구 성곽공사 장면(1976년 12월 1일 촬영). [서울역사박물관]
총길이 18.627㎞의 한양도성은 전 세계에서 최장기간인 514년간 도성역할을 했다. 한양천도 2년 뒤인 1396년(태조 5) 1월 축성공사가 시작돼 50일만에 끝났다. 경상·전라·강원도와 서북면의 안주 이남과 동북면의 함주 이남의 장정 11만 8070여 명이 징발됐다. 하지만 토성이 많아 허물어지기 일쑤였다. 따라서 1422년(세종 4) 음력 1월부터 2월까지 성곽은 다시 지어졌다. 이번에는 경기, 충청, 강원, 강원, 황해, 전라, 경상, 평안, 함길 등 총 32만2400명이 동원됐다. <세종실록> 1422년(세종 4) 2월 23일 기사에 의하면, 공사 중 죽은 사람이 무려 872명이나 됐다. 2월 26일 세종이 죽은 이유를 묻자 공사책임자인 공조참판 이천은 “30여만 명 중에서 500~600명 죽은 것이 무엇이 괴이합니까”고 되물었다. 이들은 주로 성돌을 채석하고 옮기는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전기 채석지는 남산과 낙산 일대였다.

숙종대에도 대대적 보수를 실시한다. 공사는 1704년(숙종 30) 착수해 1712년(숙종 38)에야 마무리됐다. 지방민 대신 도성수비군인 오군영에서 작업을 맡았다. 성돌은 정릉 주변 채석장에서 조달했다. 북한산성(1711)과 북한산성·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1718)도 함께 축성해 수도외곽 방어시설을 확충했다. 한양도성은 영조, 정조, 순조, 고종 연간에도 고쳐졌다.

성벽 밖을 바라보는 두 남자(대한제국).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왕조 전반을 걸쳐 정비·보수돼온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 식민정책에 의해, 또 1945년 해방 후에는 도시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를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1970년대까지 전체 18.6㎞ 중 6.7㎞, 도성의 36%가 사라졌다.

2000년 이후 역사적 관점의 복원 논의가 이뤄지고 2012년부터 한양도성도감이 설립돼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보존 계획이 수립돼 보존 작업이 진행됐다. 그러나 사실, 성곽의 외형은 1970년대에 상당 부분 보수됐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가 창의문 안쪽까지 잠입한 이른바 김신조 사건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박정희 정권은 서울시 요새화 계획의 일환으로 ‘서울성곽 및 성문 복원공사 계획’을 세웠다. 이어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삼청, 성북, 삼선, 동숭, 광희, 장충, 남산, 청운지구 등 8개 구역으로 나눠 대대적인 수리를 했다.

1970년대 대대적 보수이후 복원 지속 진행, 서울의 상징서 세계인 명소로···
서울이 글로벌 도시로 발돋움하면서 서울의 상징인 한양도성도 세계적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서울시는 한해 한양도성을 찾은 사람이 1023만3939명인 것으로 분석한다.

한양도성은 성문과 성곽의 원형이 보존돼 있고 수축의 기록이 성벽에 잘 남아있다. 또한 성곽 주변으로 문화재와 역사적 명소도 산재해 있다. 무엇보다 인왕산, 북악산 등 자연환경과 어우진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인왕산 정상, 백악구간, 남산 잠두봉은 조망명소로 인기다. 조선시대에는 도성길 최고의 명소는 뜻밖에도 낙산 일원이었다. 북서남은 지대가 높은데 반해 동쪽은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았고 물이 흘러가는 수구(水口)가 있었다. 유본예의 <한경지략>은 “동쪽의 허함을 막기위해 조산(造山·인공산)을 만들고 버들을 많이 심었다. 이것이 식목소(植木所)라 일러 봄이 되면 풍치가 볼만해서 성안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었다”고 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역사가 흐르는 성곽 길을 돌며 봄의 정취를 즐겨 보시길.

한양도성 백악마루 구간. [배한철 기자]
한양도성 백악마루 구간. [배한철 기자]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배한철 기자]
한양도성 성북구간. [배한철 기자]
한양도성 삼청구간. [배한철 기자]
# 도시는 멈춘 듯이 보여도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현대의 모습 속에 켜켜이 쌓인 역사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지리지’에서는 매력적인 도시, 서울의 모든 과거를 땅속의 유물을 건져내듯 들춰봅니다.

<참고문헌>

1. 경도잡지(京都雜誌). 유득공(1748∼1807)

2. 한경지략(漢京識略). 유본예(1777~1842)

3. 영재집-춘성유기(유득공). 무명자집(윤기). 번암집(채제공). 조선왕조실록

4. 서울한양도성. 서울역사박물관. 2015

5. 도성일관. 한양도성박물관. 2015

6. 서울 도성을 품다. 서울역사박물관. 2012

7. 도성과 마을. 한양도성박물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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