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베트남으로 간 까닭은? [최준영의 경제 바로읽기]
(시사저널=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2018년 관세 부과로 시작된 미·중 무역분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첨단제조업 공급망으로 확대됐는데, 그 핵심에는 반도체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의 급속한 제조업 고도화를 저지하고 기술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분리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라는 표현대로 광범위한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한국-일본-대만으로 이어지는 동맹국 중심의 국제협력체제가 아직 중국에 우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분쟁의 핵심은 반도체
2015년을 전후해 중국은 본격적인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바라보는 반도체 산업은 일본이 미국을 이기고, 미국이 일본을 응징하고, 한국이 모두를 밀어내는 정글의 역사였으며, 중국의 차례가 오고 있다는 약간은 운명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중국은 반도체 산업에 대해 확고한 국가의 의지, 첨단기술 도입, 산업을 이끌어갈 인재 확보가 핵심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장기적인 손실을 감내할 수 있는 의지와 체력의 확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중국의 특성을 고려하면 반도체 산업 역시 이차전지와 마찬가지로 중국이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은 달랐다. 중국은 미국의 기술적 제재가 본격화하면서 과거 태양광과 이차전지에서 사용했던 방식으로는 기술적 발전을 달성할 수 없었다. 선진국과 비슷한 기술적 출발점에서 시작했던 태양광·이차전지와 달리 반도체 산업은 기존의 선두기업들이 끊임없이 기술적 발전을 도모하면서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있으며, 조급한 정책 결정으로 인한 무분별한 프로젝트 남발로 인해 노하우와 인력의 축적이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 중국은 최첨단 반도체를 위한 기술적 도전을 계속함과 동시에 물량적으로는 훨씬 다수를 점하고 있는 구형 반도체에 대한 투자를 늘려가면서 시장점유율을 확대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한국과 대만 양국의 반도체 산업이 첨단공정에 집중돼 있는 틈새를 공략하면서 자국의 반도체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미국은 중국을 대신해 저렴한 인건비에 기반한 새로운 반도체 산업의 파트너가 필요해졌다. 지정학적인 고려를 통해 그 대상은 베트남으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베트남이 차지하는 비중은 4% 수준으로 규모 면으로만 보면 태국(2%), 말레이시아(3%)보다 큰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하지만 국제적 흐름의 변화에 따라 베트남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2023년 베트남을 찾은 바이든 대통령은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수준으로 격상시켰는데 핵심은 반도체였다. 우선 양국은 탄력적인 반도체 공급망 지원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의 CHIPs법에 따라 조성된 기금을 활용해 베트남의 반도체 관련 역량을 지원하기로 했으며, 이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포괄적 이니셔티브에도 합의했다. 관련 분야 협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양국은 DELTA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도 합의했다. 전자부품 제조 분야의 인재 양성, 정책 조율 등에 초점을 맞춰 베트남의 역량 강화를 지원하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미국이 생각하는 베트남의 반도체 공급망 역할은 테스트-패키징인 것으로 보인다. 설계는 미국에서, 제조는 한국과 대만에서, 그리고 테스트와 패키징 등 후공정은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에서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미국의 구상인 것이다. 패키징과 테스트는 반도체 산업에서 후공정으로 불리는 분야지만 최근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에 집중된 공급망을 분리하는 데 베트남이 반도체 그리고 전자산업 분야에서 대체재 역할을 하기를 희망한다는 것을 솔직히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과학 및 신기술 분야의 베트남 인력 양성을 미국이 지원하겠다는 것이 바이든 행정부의 의도인 것이다.
베트남의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오던 회사는 미국의 인텔이다. 2010년 첫 반도체 조립 테스트 공장을 완공한 이후 현재까지 약 15억 달러를 투자해 패키징-테스트 분야에 집중해 왔다. 패키징 분야 세계 2위 기업인 앰코테크놀로지도 5억2000만 달러를 투자해 베트남에 공장을 완공했으며, 10억7500만 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AI) 반도체로 각광받고 있는 엔비디아의 경우 이미 2억5000만 달러를 투자한 데 이어 추가적인 투자를 베트남 정부와 논의하고 있다. 양적으로만 보면 외국인 투자에 의해 베트남 반도체 산업은 급속히 성장하고 있으며, 단계적 발전 경로를 착실히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패키징과 테스트 중심의 후공정 역할
하지만 베트남 정부는 패키징과 테스트 중심의 후공정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수준 높은 반도체 산업 육성을 원하고 있다. 인건비에 기반한 단순 조립으로는 국내에 관련 산업이 육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휴대전화와 스마트폰을 통해 인식한 것이다. 이에 베트남 정부는 보조금 지급을 통해 자국의 반도체 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를 희망하고 있다. 현지 기업과의 공동연구 및 합작이라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삼성전자와 엔비디아를 비롯한 기업들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더라도 반드시 유치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이러한 베트남의 반도체 육성 전략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인력 양성이다. 베트남은 과학기술교육 기반은 보유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체계나 교육 인력이 부족한 점이 큰 문제점으로 꼽히고 있다. 현재 약 6000명의 반도체 부문 엔지니어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미래 수요를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고, 인력 부족이 해외기업의 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 정부는 팜 민 찐 총리의 지시에 따라 2023년 하반기부터 반도체 인력 양성을 위한 국가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일단 2030년까지 반도체 엔지니어 3만~5만 명을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기획투자부, 정보통신부, 교육훈련부, 과학기술부 등 관계부처를 총동원해 세부적인 사항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의 가장 큰 수혜자는 베트남으로 여겨지고 있다. 베트남 역시 대나무 외교라고 불리는 유연함을 발휘하면서 미·중 양국 갈등 속에서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으로 향하고 있는 반도체 산업의 흐름은 베트남에 또 한 번의 기회가 되고 있다. 이러한 기회를 잘 살릴 수 있느냐에 따라 베트남 제조업의 고도화 여부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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