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뜨는 아트를 보려면 호텔로 가라… ‘아트캉스’의 시대
호텔은 여행의 공간이자 쉼의 공간이고 감각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기꺼이 비용을 부담하고 고급 호텔에 들어서는 건 그에 아깝지 않은 만족감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새하얗고 푹신한 침구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오감을 일깨우는 식사일 수도 있겠다. 천장이 높은 수영장, 시야가 탁 트인 피트니스룸, 향이 좋은 보디클렌저와 로션, 어마어마하면서도 세심한 꽃꽂이…. 우리는 취향에 따라 호텔을 고르기도 하지만 호텔에서 취향을 습득하기도 한다. 사랑받는 호텔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략과 노고로 구석구석 공간을 채워 우리의 감각을 깨운다.
호텔에서 경험하는 낯선 감각 중의 최고는 아트가 아닐까 한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거나 식사할 때 우리는 평소보다 느긋한 태도를 갖게 된다. 하루쯤은 호강하겠다는 마음이기 때문에 모든 감각을 열고 벽에 걸린 아트 작품을 들여다보는 여유가 생긴다. 요즘 호텔의 아트는 세계적 미술관이나 갤러리급이다. 홈페이지에 작품 소개를 상세히 해 두고, 원하는 투숙 고객에게는 아트 투어도 해준다. 공간의 모퉁이마다, 식사 대기 장소에도 아트 작품들이 있다.
●400여 점의 아트 여행
‘아트캉스’(아트+바캉스)로 입소문이 난 서울 강남구 역삼동 조선팰리스에 다녀왔다. 신세계그룹 조선호텔앤리조트의 최상급 브랜드 호텔로 2021년 5월 문을 연 조선팰리스에는 400여 점의 아트 작품이 곳곳에 비치돼 있다. 로비에 들어서면서부터 펼쳐지는 아트 여행의 시작은 미국 미술가 대니얼 아셤이다. 높이가 260cm에 달하는 ‘풍화된 푸른 방해석 모세상’(2019년)은 언뜻 보면 십계명을 든 모세상이지만 조각상의 벗겨진 부분에 푸른 수정들이 반짝인다. 미켈란젤로의 3대 조각으로 꼽히는 모세상과 똑같은 크기로 제작해 과거의 유물에서 새로움이 반짝이며 돋아나는 걸 표현했다. 신세계는 그룹의 자존심을 건 최상급 호텔을 브랜딩하면서 로비의 아트 작업을 얼마나 고민했을까. 그 선택이 아셤이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면서도 흥미롭다.
1980년 태어난 아셤은 요즘 전 세계 명품 브랜드들이 손을 잡고 싶어 열광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무려 143만 명. 최근에는 보석 브랜드 티파니와 ‘포켓몬 컬렉션’을 내놓았고, 크리스티앙 디오르와는 스니커즈와 가방, 포르쉐와는 ‘대니얼 아셤 포르쉐 911’을 선보였다. 그가 ‘미래의 유물’이라는 콘셉트를 갖고 발전시킨 세계관은 ‘허구의 고고학’이다. 구형 카메라 같은 사물들을 석고로 제작해 고고학 발굴현장에서 찾아낸 것처럼 펼쳐낸다. 그의 전시를 감상하다 보면 우리는 ‘미래의 과거’에 발을 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토니엘의 구슬 꽃, 정해나의 책가도…
조선팰리스는 해외 명품 브랜드 관계자들이 출장 와서 자주 찾는다. 스위트룸에서는 이들 브랜드의 홍보 행사도 종종 열린다. 서울 테헤란로 한복판에 위치해 고층빌딩 숲과 선정릉, 시그니엘 타워까지 바라보는 전망을 갖춰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호텔의 아트 컬렉션은 세계적 작가들에서부터 한국의 신진 작가들의 작품까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지난해 프랑스 최고의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현대 미술가 장 미셸 오토니엘의 ‘국화(Chrysanteme)’는 은박 위에 검은 잉크를 찍어 국화꽃을 표현했다. 파리 팔레 루아얄을 비롯해 국내에서 서울시립미술관과 덕수궁 연못 작품을 선보였던 그는 꽃 작품을 통해 생명력과 부활의 의미를 전한다. 벨기에 출신의 도예가이자 미술가인 요한 크레텐의 ‘글로리 스프링(Glory Spring)’은 황금빛 구슬들로 낙관적 미래에 대한 설레는 빛남을 담았다.
도서관과 궁전 같은 공적 장소를 촬영하는 라인하르트 괴르너의 대형 사진 작품들, 로버트 모어랜드의 미니멀리즘 패널 작품, 흑백의 대비와 질감의 극대화로 꽃을 추상화하는 조셉 스타쉬케베츠의 꽃 시리즈…. 세계적 거장의 작품 이외에 김지원, 양주혜, 장인희, 박민하 등 국내 중견작가와 신진 작가 작품들도 눈에 많이 띈다. 특히 정해나의 책가도는 전통 장식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점이 돋보인다. 가로, 세로 60cm의 정방형 작품은 집에 들이고 싶을 정도다. 실제로 젊은 고객들이 호텔의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지 종종 문의한다고 한다.
●‘이타닉 가든’에서의 아트 런치
조선팰리스 36층에 위치한 한식당 ‘이타닉 가든’은 미셰린 레스토랑이다. 아름다운 한국의 식물을 새롭게 바라보고 나누기 위해 식당 이름을 ‘먹다(eat)’와 ‘보타닉 가든(botanic garden·식물원)’을 결합해 지었다. 이곳에 걸린 이정진 작가의 사진 작품 세 점은 수묵화 느낌이어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다.
오픈 주방을 바라보는 U자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중앙에는 이끼와 돌로 구현한 작은 정원이 있고, 각자의 자리 앞에는 세밀화로 그린 한식 재료 카드가 꽂혀 있다. 군고구마, 주전부리, 머위, 콩, 장, 대추, 매생이, 블랙 트러플, 한식 디저트가 담긴 자개함…. 카드마다 담긴 식재료에 대한 설명이 앞으로 다가올 식사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머위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조선 정조 때 이만영의 글에 ‘백 가지 풀 가운데 머위만이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머위는 강릉이 고향인 저에게는 어릴 적 ‘머구대(머위대의 방언) 나물 먹어봐’라고 하시며 숟가락 위에 얹어 주시던 할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식재료입니다.” MZ세대인 손종원 이타닉 가든 셰프는 이 추억을 머위 냉채로 풀어 가져왔다. 숯에 구워낸 머위와 절여낸 머위장아찌를 곱게 간 잣과 감을 함께 버무리고 대하, 관자, 북장 조개를 곁들여 다양한 식감을 갖게 한 냉채였다.
파래김을 종이학처럼 접어낸 주전부리도 감동이었는데, 한식 코스의 마지막 자개함은 한국의 미(美)의 결정판이었다. 나비와 모란 문양을 새긴 나전칠기함 서랍을 열 때마다 탄복이 터져 나왔다. 막걸리로 속을 채운 초콜릿 봉봉, 들깨 가나슈, 청 겨자 사과 젤리, 햇생강 찹쌀 약과, 도라지 정과, 곶감 단자…. 눈 속에 입속에 한국의 꽃 작품이 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 와서 점심 한식 코스를 즐기는 젊은 남성 몇몇이 보였다. 요리사들이 호텔에 찾아와 시식해보는 것일까 궁금해 호텔 측에 확인하니, ‘나만의 여유’를 찾아오는 MZ세대 고객이 많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젊은 여성이 혼자 와서 식사했는데, 원거리 연애를 하는 남자친구가 예약해줘서 온 것이었다. 천천히 음식을 음미하며 영상통화로 남자친구에게 그 과정을 전하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그렇다. 요즘 세대는 호텔을 감각한다. 호텔은 우리가 사는 하나의 방식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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