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세계 4대 뮤지컬'은 누가 정했을까? '세계 O대'를 섣불리 믿지 말아야 할 이유
제가 사는 동네에서 태국음식 전문 음식점을 새로 발견해서 며칠 전에 가봤습니다. 메뉴를 뒤적이는데, '똠양꿍'을 '세계 3대 수프 중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더라고요. '세계 3대 수프'라는 문구를 참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보니 똠양꿍 외에 중국의 샥스핀(상어 지느러미 요리), 프랑스의 '부야베스(해물 스튜)'가 '세계 3대 수프'였던 것 같아요.
이 '세계 3대 수프'는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 누가 이런 말을 처음 썼을까요. 아마도 일본에서 '世界三大スープ'라고 썼던 말이 건너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찾아봐도 정확한 유래는 모르겠더라고요. 저는 똠양꿍을 좋아하긴 하지만 '세계 3대 수프'라는 데에는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똠양꿍을 주문해 먹으면서 저는 또 다른 '세계 O대'를 떠올렸습니다. 바로 '세계 4대 뮤지컬'입니다.
'세계 4대 뮤지컬'은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을 묶어 부르는 말입니다. 한국에서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이 잇따라 개막한 2023년은 '세계 4대 뮤지컬' 중에 세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해라는 기사가 나온 적도 있습니다. 이 중 레미제라블은 해를 넘겨 지금도 공연 중이고요.
'뮤지컬 빅4'에서 '세계 4대 뮤지컬'로
'메가뮤지컬'의 메가(Mega)는 '크다'는 뜻의 접두어입니다. 뮤지컬 중심지였던 미국에 1980년대부터 영국산 대형 뮤지컬들이 잇따라 상륙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이런 작품들을 '메가뮤지컬'로 불렀던 게 유래입니다. 메가뮤지컬의 대표 인물은 영국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입니다. 특히 카메론 매킨토시는 뮤지컬 빅 4로 불리는 네 작품을 모두 프로듀싱했습니다.
'에비타'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으로 영국산 뮤지컬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1980년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와 팀을 이뤄 '캣츠'를 발표합니다. '캣츠'는 메가뮤지컬의 시조라 할 만한 작품인데요, 매킨토시는 '캣츠'가 관객에게 단순한 관람을 넘어 '고양이 세계 속에 들어가는 체험'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무대는 원형으로 제작했고, 고양이들이 객석 사이를 오가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다시 손잡은 '오페라의 유령'(1986) 역시 웨스트엔드에서 브로드웨이를 넘어 전 세계를 강타했습니다.
카메론 매킨토시는 또 클로드 미셸 쉔버그(작곡)-알랑 부블릴(작사) 팀과 함께 '레미제라블'을 내놓게 됩니다. '레미제라블'는 1980년 프랑스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는데, 음반을 접한 매킨토시가 새롭게 제작할 것을 제안했고, 이에 따라 1985년 음악과 대본을 대폭 수정한 버전이 런던에서 처음 공연됐습니다. 프랑스 초연 무대와는 굉장히 많이 달라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초연 무대였습니다. 이후 이 팀은 '미스 사이공'을 런던에서 초연(1989)했고, '미스 사이공' 역시 전 세계적인 흥행작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90년대 브로드웨이를 강타했던 유럽산 메가뮤지컬은 이전의 미국 뮤지컬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음악이 중심에 있고 대사는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오페라로 착각할 정도로 성악 발성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무대에서 헬리콥터가 날아오르는 공연'으로 유명했던 '미스 사이공'에서 보듯 '스펙터클한 무대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비극적인 내용이 주를 이뤘는데, 이 역시 기존의 브로드웨이 뮤지컬과는 차별되는 지점이었습니다.
'뮤지컬은 미국의 것'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미국 평론가들은 영국산 대형 뮤지컬들이 브로드웨이로 몰려오기 시작하자 '영국의 침공(British Invasion)'이라며 경계하고 외면했습니다. 사실 '메가뮤지컬'이라는 말 자체도 처음에는 다소 조롱하는 느낌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작품성은 없고 무작정 크기만 하다'는 뉘앙스를 담았던 거죠.
그래서 브로드웨이에 상륙한 메가뮤지컬에 대한 미국 언론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토니상 같은 주요 시상식에서도 메가뮤지컬을 외면했고요. 하지만 평론가들이 혹평을 내놓든 말든 관객들은 새로운 영국산 뮤지컬들에 열광했습니다. 영국에서 탄생한 메가뮤지컬은 브로드웨이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이를 발판으로 전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메가뮤지컬은 제작 과정을 철저하게 매뉴얼화해서 세계 어디에서 공연이 이뤄지든 동일한 공연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물론 극장과 배우와 언어가 달라지면 완벽하게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오리지널'을 최대한 복제한다는 겁니다. 또 출연 배우를 홍보하기보다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한 마케팅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 공연해도, 누가 출연해도, 바로 그 작품이니까 보러 오는 관객을 만들겠다는 거죠.
강렬하고 상징적인 이미지가 인상적인 뮤지컬 포스터를 떠올려 보면 금방 이해가 가실 겁니다. '오페라의 유령' 포스터에는 장미와 흰 마스크, '캣츠'는 고양이 눈, '레미제라블'은 삼색기 바탕 소녀의 모습, '미스 사이공'은 태양 앞의 헬리콥터... 세계 어디서 공연하든 포스터 이미지는 똑같습니다. 뮤지컬 OST 음반뿐 아니라, 뮤지컬 대표 이미지를 새긴 티셔츠, 머그컵, 문구 등등 부가상품도 다양하게 만들어 판매했습니다. 역시 전 세계에서 동일한 디자인으로 팔려 나갑니다.
메가뮤지컬은 이렇게 뮤지컬의 글로벌 산업화를 촉진한 1등 공신입니다. 메가뮤지컬이 택했던 라이선스 수출과 마케팅 방식은 뮤지컬 산업의 표준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도 메가뮤지컬에 영향받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는데요, '미녀와 야수'(1994)로 시작해 '라이언 킹(1997)'으로 단숨에 뮤지컬 시장 강자가 된 디즈니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1세기 들어 젊은 창작자들의 재기 발랄한 시도에 작품 소재와 주제도 더 다양해졌고, 메가뮤지컬의 기세가 예전 같지는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브로드웨이에서 최장기 공연이었던 '오페라의 유령'이 지난해 35년 만에 막을 내린 것은 메가뮤지컬의 퇴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느껴집니다. (웨스트엔드에서는 아직 공연 중입니다)
'세계 4대 뮤지컬' 표현을 쓰지 않으려는 이유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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