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루미늄 회사에서 얻은 ‘절망의 죽음’ 증거들 [주기율표 위 건강과 사회]

김명희 입력 2024. 2. 25.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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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루미늄 제조업체 알코아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해고의 칼바람이 지나간 후 지속되는 영향을 보여준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와 불안은 그 자체로 건강을 잠식한다.
독일 작센주 한 금속 주조소에서 녹은 알루미늄이 밝게 빛나고 있다.ⓒEPA

내가 도대체 이걸 왜 보고 있는 거지? TV 홈쇼핑 화면에 혼을 빼앗길 때가 가끔 있다. 이를테면 화면 가득 확대한 모델의 콧잔등에서 피지를 한 개씩 쏙쏙 뽑아내거나, 종아리에 비누칠을 한 쇼핑호스트가 자신의 가락국수 같은 때를 열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들이 그렇다. 기상천외한 제품의 기능, 인체의 신비, 직업적 성실함의 예상치 못한 조합은 그저 감탄을 자아낸다.

최근 나의 감탄 목록에는 3중 바닥에 특수코팅을 장착한 프라이팬 세트가 추가되었다. 고추장 양념으로 버무려진 낙지볶음을 태우고도 물 한 번만 끼얹으면 말끔히 세척될 뿐 아니라, 곧바로 달걀지단과 밀전병을 부쳐도 프라이팬 안에서 컬링스톤처럼 매끄럽게 움직였다. 연속 매진 중이라는 메시지가 터무니없는 과장은 아니었는지, 어느 날 출근길에 앞집 현관 앞에 배송된 그 제품과 직접 마주치기도 했다. 난데없는 반가움 한편에, 저출생·고령화와 기후변화라는 중대한 위기 상황에서 저 많은 프라이팬들을 다 어쩔 것인가 걱정이 들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소식은 프라이팬의 소재가 되는 금속자원들은 재활용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이었다.

프라이팬에서 높은 열전도율을 담당하는 재료는 원소기호 13번, 알루미늄이다. 알루미늄은 특히 재활용률이 높은 금속이다. 지각을 구성하는 요소 중 세 번째로 흔한 원소이지만 자연계에서 금속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주로 보크사이트라는 광석에 포함된 화합물을 전기분해하여 알루미늄 금속을 얻는다. 이때 상당한 규모의 전기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천문학적 전기요금을 감당하기보다는 분리배출된 캔 등을 열로 녹여서 알루미늄을 회수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인류가 알루미늄 원소를 발견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825년이지만, 이미 기원전 5000년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에도 알루미늄 성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나 바빌론에서는 알루미늄 성분이 함유된 찰흙이 의약품으로 쓰이기도 했단다. 정제 기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찰흙 속의 은’으로 불리면서 귀금속 대우를 받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가 자신의 왕관을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오늘날 귀금속의 지위는 잃어버렸지만, 산업 현장과 일상생활에서 알루미늄은 매우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철 무게의 3분의 1밖에 안 되면서 강도가 뛰어나고 열과 전기의 전도성이 좋기 때문에 건물과 차량의 구조물, 송전선, 주방에서 사용하는 포일, 냄비와 프라이팬, 음료 캔 등 수많은 제품을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

이렇게 산업적 규모의 알루미늄 생산이 가능해진 것은 1886년 미국과 프랑스의 화학자들이 전기분해 제련법을 발견한 덕분이었다. 이 중 미국의 화학자 찰스 홀은 1888년에 알코아(Alcoa)라는 알루미늄 제조업체를 직접 설립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회사는 130년 넘는 역사를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알루미늄 제조사의 이름을 보건학 전공자인 내가 어찌 아는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연구 때문이다.

알코아는 1997년부터 학계와 협력하여 광범위한 연구용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초기 연구는 전통적인 직업안전보건 문제, 이를테면 작업환경의 물리화학적 유해인자, 노동시간 같은 문제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후 미국 국립노화연구소와 국립직업안전보건연구원 등의 연구비 지원을 받으면서 연구 범위는 점차 확대되었다. 수집하는 데이터의 범위도 기업 내부의 작업환경 측정 자료와 고용·인사 자료를 넘어서 사망 자료, 건강보험 청구 자료, 국세청 세금신고 자료, 센서스 자료 등으로 확장되어, 데이터 연계가 이루어졌다. 노동자 개개인의 고용 상태와 유형, 직급과 직무, 급여와 수당의 변화 상황을 파악할 수 있고, 미국 15개 주에 흩어진 사업장들이 동일한 (심지어 넉넉한) 건강보험 혜택을 제공해왔기 때문에 고용과 노동환경의 장기간에 걸친 건강 영향을 분석하기에도 맞춤하다.

아메리칸 매뉴팩처링 코호트(American Manufacturing Cohort·AMC)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알코아의 코호트 연구는 2016년 회사가 두 개로 분리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지금도 연구자들에 의해 연계 데이터의 업데이트가 지속되고 있다. AMC 데이터는 14만2000여 명의 노동자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중 약 71.9%가 시급을 받는 생산직이고, 75.7%는 남성, 69.8%는 백인, 평균연령은 41.4세다. 미국 사회의 제조업 백인 남성 노동자의 전형을 나타내는 표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량해고 ‘생존자’들 건강은 어떨까

알코아라는 이름이 뇌리에 각인된 것은 리먼브라더스 사태에서 촉발된 2007~2009년 ‘대침체(the Great Recession)’ 시기 대량해고가 건강에 미친 영향을 다룬 논문 덕분이다. 이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미국에서 가장 심각했던 경기침체기로 여겨진다. 사실 실업이 노동자나 가족의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대량해고의 칼바람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부정적 영향을 받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기존 연구들도 방법론 측면에서 비판받았다. 무엇보다도 원래 건강상태가 좋았던 사람들일수록 해고를 피해 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대량해고 사건이 건강에 미친 인과적 효과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2020년 6월30일 스페인 루고에 있는 알코아 공장 근처에서 노동자들이 500명 이상 직원 해고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타이어를 태우고 있다. ⓒEPA

AMC 연구는 경제위기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인 1990년대 후반부터 고용 상태와 건강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축적해왔기에 이런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대침체기에 인력 감소 폭이 5% 미만인 곳에서부터 40%에 이르기까지, 사업장마다 고용 충격의 정도가 달랐기 때문에 동일한 코호트 구성원 사이에서 고용 충격 정도의 차이에 따른 비교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

2013년에 발표된 논문은 2006년 1월부터 2010년 1월까지 고용이 지속되고 건강보험 청구 자료가 가용한 1만3000여 명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2008년에 100명 이상이 고용되어 있는 30개 사업장 중에서, 2009년 1년 동안 인력이 20% 이상 감소하거나 동일한 날짜에 40명 이상의 고용이 종결된 이벤트가 있었던 사업장들을 ‘대량해고 고위험군’으로, 인력 감소가 11% 미만인 사업장을 ‘저위험군’, 나머지 사업장을 ‘중등도 위험군’으로 정의했다. 노동자 개개인의 성별, 나이, 인종, 고용계약 형태, 임금 구조(시급·월급), 근속기간, 개인별 건강 위험 점수, 사업장 위치와 지역의 실업률, 노동조합 유무 등의 변수도 고려했다.

분석 결과, 예상대로 경제위기 이전에 건강한 노동자일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했다. 그리고 다른 요인을 모두 고려했을 때에도, 대량해고 고위험 사업장의 생존자들은 저위험 사업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에 비해 고혈압 발생 위험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업장이 위치한 지역의 실업률이 높으면 고혈압 발생 위험이 더욱 높아졌고, 이러한 건강 위협은 시급을 받는 생산직 노동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2018년 발표된 또 다른 AMC 논문은 고용불안이 정신건강과 일터 손상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두었다. 이번에는 2003~2013년 30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매 분기(3개월)의 시급 노동자, 즉 생산직 노동자 고용 규모를 측정해 20% 이상 감소가 일어난 경우를 대량해고라고 정의했다. 분석에는 1만5000명 이상의 생존 노동자가 포함되었으며, 총 7차례 대량해고 이벤트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역시 2009년에 가장 많았다. 이렇게 대량해고가 발생한 사업장의 해당 분기와 이전 연도 같은 분기 사이에 소속 노동자의 건강 변화, 대량해고가 발생하지 않은 사업장을 대조군으로 삼아 같은 시기의 건강 변화를 비교하는 이중차분법을 이용했다.

분석 결과 대량해고 발생 분기에 손상은 경미하게 감소했지만, 정신과 외래 방문은 1% 늘어났고, 정신과 약물 처방 확률이 1.4%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약품 처방 증가는 일차적으로 오피오이드(opioid,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마약성 진통제)와 관련 있었다. 대규모 알루미늄 제조사에서 이루어진 이들 연구는 해고의 칼바람을 피했으니 이제 다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고용 불안정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와 불안은 현실의 실직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건강을 잠식한다.

익명의 숫자 뒤 수많은 고통들

부부 경제학자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은 2015년 ‘절망의 죽음(death of despair)’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며, 미국 노동계급이 직면한 건강 위기를 지적해왔다. 20세기 초반부터 현재까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꾸준히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데 비해, 미국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중장년 인구의 사망률이 높아지고 기대수명은 줄어드는 매우 독특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문제는 주로 백인 저학력 인구 집단, 즉 전통적인 산업노동자 계층에서 두드러지며, 사망 증가를 가져온 주요 사인은 약물과 알코올 중독, 자살, 만성 간질환과 간경화 등이다. 사망에 앞서는 다양한 건강지표들, 이를테면 자가 평가 건강수준, 정신건강, 장애, 만성통증, 건강 문제와 관련한 노동 불능 상태 지표들도 역시 악화되고 있다.

2014년 3월4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철도공사 대규모 징계·해고 규탄’ 기자회견. ⓒ시사IN 이명익

이 문제의 원인을 한 가지로 콕 집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불평등·빈곤 등 여러 가지 요인 중에서 ‘절망의 죽음’과 가장 일관되게 상관성을 보인 것은 지역의 고용률이었다. 만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을 안 하기로 선택한 것이라면 노동력이 귀해진 만큼 임금이 올라가고 일하는 노동자의 삶의 질이 개선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제조업 부문 노동자들의 임금은 수십 년째 정체되고 있다.

일자리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고, 그나마 존재하는 일자리는 불안정하고 임금이 낮으며, 이런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전망도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절망’에 빠진다. 일은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때로는 유일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저 생계 수단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을 하다가 다치고 아프고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일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사회적 존중과 정체감을 얻는데, 이를 획득하는 데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것이다. 게다가 노동시장에서 배제되면 절망에서 비롯된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공적 건강보험제도가 존재하지 않고 의료서비스 가격이 매우 비싼 미국 사회의 독특한 초상이다. 이제 쉽게 구할 수 있는 오피오이드와 술이라는 ‘셀프 처방’에 의존하게 된다.

논문에 건조하게 기술된 ‘20% 대량해고’ ‘같은 날짜에 40명 이상 계약 종료’ 같은 사건은 자연실험(natural experiment) 설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연구자가 반색할 만한 ‘유용한’ 변수들이다. 하지만 숫자 뒤에 익명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사건도 없고 이런 논문이 쓰일 일도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게다가 단기간의 극적 사건으로 나타나지 않는 장기적 경기침체, 일자리 감소, 일자리의 질 저하는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질병과 죽음이라는 청구서로 날아들고, 뒤늦은 연구는 그저 무력하다. 그럼에도 이런 연구들에 다시금 눈길이 가는 것은 요즘 한국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은 탓이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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