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버린 엄마의 내연남을 죽였다···피의 복수가 부른 역설적 영광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2. 25.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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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58] 그녀에겐 내연의 애인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주 싫어서였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동성연애에만 탐닉했으니까요. 남편은 남자친구에게 가정의 재산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남겨뒀던 소중한 재산도 빼돌리려 했었지요. 그때 그녀는 애인과 함께 결심합니다. “남편을 죽여야겠어.”

음모는 성공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공격을 에상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아들마저 두 사람의 뜻에 동참했다니. 남편은 충격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미국에서 초연된 연극 ‘에드워드 3’의 한 장면. [사진출처=Pacific Repertory Theatre]
상황은 또다시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내연남이 아들의 재산까지 탐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안의 가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기 시작합니다. 이유 없이 아들을 훈계하는 일도 많아졌지요.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은 분노합니다. 믿었던 엄마마저도 내연남의 편을 들었습니다.

다시 피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결국 사달이 벌어집니다. 아들이 내연남을 죽이고, 엄마도 집에서 쫓아내 버렸지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습니다.

막장 드라마 전개와도 같은 이 이야기가 중세 잉글랜드 왕실에서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와 그의 어머니 이사벨라 왕비의 이야기입니다. 사색 전편에서 다룬 동성애자 남편인 에드워드2세부터 시작된 또 다른 드라마를 오늘 소개합니다.

엄마의 품이 싫었던 에드워드 3세
“잉글랜드를 강국으로 이끈 에드워드 3세”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인정받는 군주 중 하나입니다. 아버지 에드워드 2세가 불러온 혼란을 잠재우고 대내외적으로 잉글랜드를 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존재기 때문입니다.

후대인 16세기 후반에 묘사된 에드워드 3세.
시작은 불안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지 에드워드 2세의 실정이 계속되자 어머니 이사벨라가 내연남인 귀족 로저 모티머와 쿠데타를 일으켰지요. 두 사람은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키고, 몰래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에드워드 3세가 14살에 즉위하게 된 배경입니다.

모친과 그 내연남에 의한 즉위였으니, 에드워드 3세가 힘을 쓸 여지가 없는 건 당연했습니다. 10대 초반의 어린 왕은 두 사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지요. 당시 잉글랜드를 지배하는 건 프랑스 출신의 여왕 이사벨라와 로저 모티머였습니다.

잉글랜드의 실질적 지배자이던 이사벨라와 모티머를 묘사한 그림. 중간에 작은 아이가 에드워드 3세다.
잉글랜드를 쥐락펴락한 프랑스의 ‘암늑대’의 최후
암군을 몰아내고 찾아온 건 또 다른 암군이었습니다. 이사벨라와 모티머는 국정을 운영할 그릇이 안 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사적으로 재산을 유용한 데다가, 요직에 자신의 사람을 앉혔습니다. 에드워드 3세의 삼촌을 처형할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지요.
이사벨라를 묘사한 그림.
잉글랜드는 계속해서 병들어가고 있었습니다.사람들은 “프랑스의 암늑대가 잉글랜드를 망치고 있다”고 수군댑니다. 북쪽의 스코틀랜드는 점점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지요.

“이제 내가 직접 통치한다.”

에드워드 3세는 야망이 있는 사내였습니다. 두 사람의 꼭두각시로 평생을 살고 있을 위인이 아니었지요. 자신의 세력을 알음알음 규합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엄 몬태규와 같은 인물이 에드워드 3세의 대의에 동참했지요. 다른 귀족들도 에드워드의 편에 섭니다. 로저 모티머와 이사벨라의 폭정을 더는 참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에드워드 3세의 작전은 성공합니다. 어머니의 연인을 처형대에 세우는 데 성공했지요. 어머니 이사벨라는 간청합니다. “아들아, 로저 모티머를 가엽게 여겨다오.”

중세 시대 교수형을 당하던 타이번 교수대.
이사벨라는 깨달았습니다. 아들이 사사로운 정에 휘둘릴 인물이 아니었음을요. 로저 모티머의 목이 교수대에 매달립니다. 그는 죽어서도 교수대에서 내려올 수 없었습니다. ‘반역의 미래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재산 역시 모두 몰수됩니다. 그의 연인이자 잉글랜드 여왕 이사벨라 역시 가택연금을 피할 수 없었지요.
‘스코틀랜드의 망치’였던 할아버지를 닮은 에드워드3세
에드워드 3세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의 나이 고작 18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정치적 결단은 결코 소년의 것이 아니었지요. 자신의 아버지보다 ‘전사왕’이었던 할아버지 에드워드 1세를 닮았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망치’였던 할아버지처럼 즉위 직후 스코틀랜드 원정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1332년의 일이었지요

스코틀랜드엔 사면초가였습니다. 민족 영웅 로버트 1세가 이미 세상을 떠나서였습니다. 왕 데이비드 2세는 고작 8살에 불과한 어린아이.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요. 할리던 전투에서 에드워드 3세는 대승을 거뒀습니다.

데이비드 2세가 에드워드 3세를 자신의 영주로 인정한 사건을 다룬 그림. 왼쪽이 에드워드 3세다.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요. 에드워드 3세는 꼭두각시 바리올을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세운 뒤, 눈을 외부로 돌렸습니다. 영원한 숙적 프랑스였습니다.
불안하게 잉글랜드를 지켜보는 프랑스
프랑스도 불안한 상황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왕 샤를 4세가 승하한 뒤 불거진 승계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남자 상속자를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승계 순위대로라면 가장 가까운 친척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였습니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이사벨라가 프랑스 공주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야 오마주는 해야지. ” 1370년 원고에서 표기된 에드워드 3세가 필립 6세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모습. 실제로 행한 일일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프랑스 귀족들은 에드워드가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것을 꺼렸습니다. 에드워드가 프랑스보다는 잉글랜드의 이익을 대변할 사람으로 여겨서였습니다. “프랑스 왕위 상속권은 여성을 통해 계승되지 않는다”는 살리카 법을 들이밀었지요.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이자 프랑스의 공주인 이사벨라가 상속권이 없으니, 에드워드 3세 역시 프랑스의 왕이 될 수 없다는 선언. 발루아 가문의 필립 6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른 배경입니다.

‘대국’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한 에드워드
“에드워드 3세를 계속 관찰하게.”

필립 6세는 불안했습니다. 에드워드 3세의 기세가 매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영토 내에 알짜배기 땅인 아키텐을 ‘귀족 작위’로서 지배하고 있었지요(물론 이 땅에 대해서는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서약인 오마주가 필요했지만요).

에드워드는 기사단을 만들면서 귀족들의 충성과 단합을 요구했다.
필립은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난 데이비드 2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면서 에드워드 3세를 견제합니다. 적의 적과 친구가 되는 방식으로 힘의 균형을 맞추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에드워드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프랑스에서 죄를 짓고 도망친 백작 로베르를 대놓고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필립 6세가 에드워드의 ‘반역’을 명분으로 영지 아키텐 몰수를 선언합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땅을 직접 소유하려는 ‘정치적’인 작업이었지요.

필립 6세와 여동생 이사벨라(왼쪽 세 번째)가 함께 묘사된 그림. 잉글랜드 왕실을 상징하는 삼사자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이사벨라다.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어머니 이사벨라의 권리를 근거로 프랑스 왕위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에드워드는 참지 않았습니다. 아키텐 땅을 되찾는 것을 넘어 프랑스 왕위까지 계승하겠다고 선언하지요. 그의 문장에는 잉글랜드의 상징인 ‘삼사자’ 넘어 ‘백합’ 문장까지 함께 새겨집니다. 백합은 프랑스의 왕을 의미했지요. 백년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1337년의 일입니다.
연전연승을 거둔 잉글랜드
“누가 저 괴물을 막아다오.”

프랑스는 역시 잉글랜드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전쟁에 있어서 탁월한 전략가였습니다.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확실하게 작위를 약속하면서 내부 결속력도 다졌지요. 심지어 어머니의 내연남이던 로저 모티머의 손자를 사면해 자신의 사람으로 포섭합니다. 그는 도움이 된다면 과거는 잊어버리는 그릇을 가진 사내였지요.

로저 머티머의 손자는 에드워드 3세로부터 사면을 받고 그를 향해 충성을 다했다. 에드워드 3세의 용인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진은 로저 모티머의 동명의 손자.
기존에는 없던 해군 창설을 주도해 바다의 주도권도 잡았습니다. 에드워드 3세의 닉네임이 ‘바다의 왕’으로 알려진 배경이지요.

그 유명한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 군을 압도했습니다. 해안 도시 칼레로 쳐들어가 항복을 받아냈지요(자신을 희생해 시민들을 지키려 했던 칼레 귀족들의 이야기가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란 작품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칼레의 시민들 동상. [사진출처-=Romainberth]
백년전쟁 1차전을 완벽하게 승리로 이끈 에드워드
잉글랜드의 승전이 거의 확실하게 된 건 푸아티에 전투에서였습니다.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가 맹활약을 하면서였습니다. 그 사이 필립 6세는 전쟁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 장 2세가 그의 뒤를 이었지만, 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포로로 잡히고 말았지요. 프랑스의 왕이 런던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또 승리인가.” 흑태자 에드워드를 묘사한 19세기 미국화가 줄리안 러셀 스토리의 작품.
크레시 전투에서 사망자 수를 세고 있는 에드워드 3세.
“푸아티에에서 끔찍한 패배를 당한 후 프랑스군은 모든 시민의 경멸을 받았다.”

100년 전쟁 초기, 잉글랜드는 그야말로 대승을 거뒀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장 2세와 브리타뉴 조약을 체결합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의 왕좌를 포기하는 대신 프랑스 서남부의 광활한 영토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앗 잡혔다.” 에드워드 3세에게 포로로 잡힌 장 2세.
그것도 프랑스 왕에게 오마주를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프랑스의 빵바구니로 불리는 옥토가 잉글랜드의 실효 지배에 놓이게 된 셈. 더불어 장 2세에 대한 석방 조건으로 프랑스 1년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기도 했습니다. 돈과 땅을 조약 하나로 모두 얻은 셈입니다.
브리타뉴 조약으로 연한 빨간색이 잉글랜드의 영토가 됐다.
그러나 역사는 동화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동화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대를 이을 명장 흑태자 에드워드가 137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국 캔터베리 대성당에 묻힌 흑태자 에드워드. [사진출처=Jerrye & Roy Klotz, MD]
에드워드 3세가 죽기 한 해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건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 잉글랜드를 긴 내전으로 빠뜨린 ‘장미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역사는 희망 속에 절망이라는 씨앗을 반드시 심어놓기 마련입니다.

<네줄요약>

ㅇ1300년대 초반 혼란의 잉글랜드를 바로 세운 건 에드워드 3세였다.

ㅇ그는 어머니 이사벨라와 내연남 로저 모티머의 지배를 벗어나 18살에 ‘친정’을 선언했다.

ㅇ스코틀랜드와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프랑스와 전쟁을 선포해 크게 이겼다.

ㅇ100년 전쟁 초반부 잉글랜드가 승기를 잡은 배경이었다.

<참고문헌>

ㅇ찰스 디킨스, 영국사 산책, 옥당북스, 2023년.

ㅇ윌터 스콧, 스코틀랜드 역사이야기, 현대지성사, 2005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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