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2007)에서 이창동 감독은 주인공 신애(전도연)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영화의 감상이 많이 달라질 것 같다. 개봉 당시 작품을 봤을 때, 다소 냉소적인 눈길로 응시한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신애는 남에 대해 쉽게 우월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고, 우월감을 유지하기 위해 자꾸 본인한테 없는 것을 끌어다 자신을 포장하려 들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겪는 대부분의 어려움은 스스로를 남보다 나은 존재로 꾸미려는 태도 때문에 자초한 부분이 있다.
최근 영화를 다시 봤을 땐 연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버닝’에서 무기력한 청춘인 종수를 볼 때처럼, ‘시’에서 인생의 추악함을 직시하고 괴로워하는 미자를 볼 때처럼 말이다. 신애에게 자기기만이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자기기만적 성향이 있다고 해서 한 사람이 이토록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가깝다. 남편이 죽고, 자식이 죽고, 아들 유괴범에게 모욕당하는 그 끔찍한 일들이 자기기만의 대가라면 인생은 너무 가혹하다. 영화는 인생의 불공평함을 묵묵히 감내하고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이야기한다.
땅 알아보러 다니던 그녀, 아들이 유괴됐다
내용을 훑어보자. 신애는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한다. 어린 아들과 함께 당도한 밀양에서 그녀는 피아노 학원을 차린다. 이후 땅을 알아보러 다니는데, 그녀 말에 따르면 시중 은행 이자는 너무 싸기 때문이다.
이후 신애의 아들은 유괴돼서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오는데, 범인이 신애 아들을 타깃으로 삼은 이유는 하나다. 바로 신애가 땅을 알아보러 다녀서다. 신애가 이곳저곳에서 부동산 투자처를 물색하고 다닐 때, 이를 유심히 듣고 있던 남자가 그녀 아들을 납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아들의 웅변학원 원장이다.
사실 그녀에겐 땅을 살 정도의 돈이 없었다. 통장을 탈탈 털어서 870만원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저 재산깨나 있다고 소문나면, 동네에서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듯하다.
신의 사랑을 경험한 그녀,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하다
이후 극도의 고통을 받던 신애는 교회에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신의 사랑’을 경험한다. 아들이 범죄를 당하기 전부터 신애는 교회에 나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동네 약사가 남편 잃은 그녀 인생을 ‘불행’으로 규정짓고, 교회에 나와 하나님 사랑을 느껴보라고 전도한 것이다.
아들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그처럼 남의 인생을 쉽게 평가하는 태도를 불편해하던 신애였다. 그렇지만 아들의 사망 후 내면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던 그녀는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고, 거기서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한다. 신애는 마음이 편해진 것을 신의 사랑으로 해석한다.
“가슴을 누가 짓누르는 것처럼 아팠는데, 이제는 안 아파요”라고 간증하고 다니는 그녀는 여전히 고통스럽다. 남들 앞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 행복하다며 웃지만, 혼자 있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진다. 이후 그녀는 유괴범이 갇힌 교도소로 면회하러 가겠다고 마음먹는데, 어쩌면 이를 통해 자신이 진정한 평안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지 모른다. 원수를 용서함으로써 신의 사랑을 실천하면 다른 단계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신애는 면회 이후 분노로 실성하게 되는데, 살인범이 자기 앞에서 한 고백 때문이다. 자기도 예수를 믿고, 용서받았다고. 그래서 늘 신애를 위해 기도한다고. 그녀는 자기가 살인범을 용서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했다는 ‘신’을 증오하게 되고, 신앙인의 위선을 고발하려고 애쓴다.
“나도 신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범인의 고백 앞에 신애는 무너졌다
이건 특정 종교를 비난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보단 우월감에 빠지기 쉬운 인간 본성에 관한 얘기다. 신앙을 가진 뒤, 인간은 비신자와 자신을 구분하기도 하는데, 그건 신의 존재를 아는지 여부로 갈린다. 상대방의 상태를 ‘무지’로 간주하면, 그건 종종 우월감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신에게 상대방보다 우월한 지위를 부여해서는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기 어렵다.
신애는 어쩌면 신앙을 통해 남보다 나아질 수 있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남들이 생각한 것처럼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일련의 사건을 통해 신의 뜻과 사랑을 알게 된 ‘선택받은 자’란 것이다. 그러나 “나도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고백하는 범인 앞에서 신애가 무너지는 건, 사실 그녀는 범인을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종교를 통해 내면의 평화를 얻었다는 범인의 태도가 자기중심적이라는 데 이견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 사랑을 알게 돼서 범인을 용서할 수 있다는 그녀의 고백도 진실한 건 아니었다. 그녀에겐 신의 뜻을 먼저 안 자신이 직접 범인을 용서하는 순간이 필요했다.
인간이 예수가 될 수 있을까
남들에게 우월의식을 느꼈다고 해서, 또는 자기 부를 거짓으로 꾸몄다고 해서 한 사람이 이 정도 수난을 당해야 한다면 너무 가혹하다. 다만, 그러지 않았다면 조금 덜 힘들었을지 모른다. 신애가 교회에 간 뒤, 내면이 약간 평안해지는 정도로 만족했다면, 범인의 파렴치한 얼굴을 보고 절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예수가 될 수 없고, 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애초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줬기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기 아들이 죽은 지 얼마 안 돼 살인범을 용서하는 건 웬만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걸 흉내 내보려다가 신애는 더 큰 수렁에 빠졌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게 됐다.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종찬(송강호)은 아마 신이 아닌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답인지 모른다. 신애와 깊은 사이가 되고 싶어서 곁을 맴돌지만 선을 넘진 않는다. 필요가 있으면 채워주되, 상대가 불편해하면 거기서 멈춘다. 자기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가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순간, 외려 더 거리를 둔다. 상대방을 아끼기에 그녀가 약해진 순간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고치려 들지 않는다. 스스로 더 나아지려고 무리하거나, 상대방에게 더 나아지라고 강요하는 대신, 서로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옆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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