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보러 다닌 엄마에게 돌아온 ‘아들의 죽음’…범인의 고백에 또다시 무너진 이유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4. 2. 25.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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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113] 영화 ‘밀양’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밀양’(2007)에서 이창동 감독은 주인공 신애(전도연)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영화의 감상이 많이 달라질 것 같다. 개봉 당시 작품을 봤을 때, 다소 냉소적인 눈길로 응시한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신애는 남에 대해 쉽게 우월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고, 우월감을 유지하기 위해 자꾸 본인한테 없는 것을 끌어다 자신을 포장하려 들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겪는 대부분의 어려움은 스스로를 남보다 나은 존재로 꾸미려는 태도 때문에 자초한 부분이 있다.

신애(가운데)는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한다. 아들과 함께 탄 차가 고장 나서 연락한 카센터의 주인이 바로 종찬(왼쪽)이다. [사진 제공=시네마서비스]
최근 영화를 다시 봤을 땐 연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버닝’에서 무기력한 청춘인 종수를 볼 때처럼, ‘시’에서 인생의 추악함을 직시하고 괴로워하는 미자를 볼 때처럼 말이다. 신애에게 자기기만이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자기기만적 성향이 있다고 해서 한 사람이 이토록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가깝다. 남편이 죽고, 자식이 죽고, 아들 유괴범에게 모욕당하는 그 끔찍한 일들이 자기기만의 대가라면 인생은 너무 가혹하다. 영화는 인생의 불공평함을 묵묵히 감내하고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이야기한다.
신애는 왜 굳이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했을까. 그녀 동생의 이야기로 봤을 때, 죽은 남편은 신애를 많이 사랑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오기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경향이 있는 인물이고, 남편이 자기를 사랑했다고 믿어버리기로 한다. ‘자신을 사랑했던’ 남편 고향에 사는 아내가 됨으로써 자기 믿음을 사실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듯하다. [사진 제공=시네마서비스]
땅 알아보러 다니던 그녀, 아들이 유괴됐다
내용을 훑어보자. 신애는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한다. 어린 아들과 함께 당도한 밀양에서 그녀는 피아노 학원을 차린다. 이후 땅을 알아보러 다니는데, 그녀 말에 따르면 시중 은행 이자는 너무 싸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 가는 밀양이 어떤 동네인지 궁금해한다. 지역 주민들이 텃세를 부릴 게 걱정됐는지도 모른다. [사진 제공=시네마서비스]
이후 신애의 아들은 유괴돼서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오는데, 범인이 신애 아들을 타깃으로 삼은 이유는 하나다. 바로 신애가 땅을 알아보러 다녀서다. 신애가 이곳저곳에서 부동산 투자처를 물색하고 다닐 때, 이를 유심히 듣고 있던 남자가 그녀 아들을 납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아들의 웅변학원 원장이다.

사실 그녀에겐 땅을 살 정도의 돈이 없었다. 통장을 탈탈 털어서 870만원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저 재산깨나 있다고 소문나면, 동네에서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듯하다.

아이가 유괴되던 날 밤, 그녀는 동네 상인들과 회식했다. 아들은 그녀가 회식 중일 때, 전화해서 무섭다고 했다. 그 말을 아들의 ‘약한 모습’이라고 해석했던 게 실수였다. [사진 제공=시네마서비스]
신의 사랑을 경험한 그녀,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하다
이후 극도의 고통을 받던 신애는 교회에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신의 사랑’을 경험한다. 아들이 범죄를 당하기 전부터 신애는 교회에 나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동네 약사가 남편 잃은 그녀 인생을 ‘불행’으로 규정짓고, 교회에 나와 하나님 사랑을 느껴보라고 전도한 것이다.

아들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그처럼 남의 인생을 쉽게 평가하는 태도를 불편해하던 신애였다. 그렇지만 아들의 사망 후 내면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던 그녀는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고, 거기서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한다. 신애는 마음이 편해진 것을 신의 사랑으로 해석한다.

아들을 화장한 뒤 그녀는 시모로부터 “너는 눈물도 없냐”는 이야기를 듣는다. 전도연 배우는 화장터에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텅 비어버린 신애의 내면을 표현하며,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사진 제공=시네마서비스]
“가슴을 누가 짓누르는 것처럼 아팠는데, 이제는 안 아파요”라고 간증하고 다니는 그녀는 여전히 고통스럽다. 남들 앞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 행복하다며 웃지만, 혼자 있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진다. 이후 그녀는 유괴범이 갇힌 교도소로 면회하러 가겠다고 마음먹는데, 어쩌면 이를 통해 자신이 진정한 평안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지 모른다. 원수를 용서함으로써 신의 사랑을 실천하면 다른 단계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목사조차 그녀가 범인을 면회한다는 계획에 의구심을 표한다. 그건 단순 ‘신앙’으로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시네마서비스]
신애는 면회 이후 분노로 실성하게 되는데, 살인범이 자기 앞에서 한 고백 때문이다. 자기도 예수를 믿고, 용서받았다고. 그래서 늘 신애를 위해 기도한다고. 그녀는 자기가 살인범을 용서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했다는 ‘신’을 증오하게 되고, 신앙인의 위선을 고발하려고 애쓴다.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준이 어머니를 위해서도 항상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역시 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살인범의 파렴치한 고백을 들은 신애는 실성한다. [사진 제공=시네마서비스]
“나도 신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범인의 고백 앞에 신애는 무너졌다
이건 특정 종교를 비난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보단 우월감에 빠지기 쉬운 인간 본성에 관한 얘기다. 신앙을 가진 뒤, 인간은 비신자와 자신을 구분하기도 하는데, 그건 신의 존재를 아는지 여부로 갈린다. 상대방의 상태를 ‘무지’로 간주하면, 그건 종종 우월감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신에게 상대방보다 우월한 지위를 부여해서는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기 어렵다.
신애는 독특한 캐릭터인데, 신에게 그토록 실망스러운 사건을 경험한 뒤에도 그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그녀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신과 대결해보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신앙인의 위선을 고발하면 자신이 신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사진 제공=시네마서비스]
신애는 어쩌면 신앙을 통해 남보다 나아질 수 있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남들이 생각한 것처럼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일련의 사건을 통해 신의 뜻과 사랑을 알게 된 ‘선택받은 자’란 것이다. 그러나 “나도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고백하는 범인 앞에서 신애가 무너지는 건, 사실 그녀는 범인을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종교를 통해 내면의 평화를 얻었다는 범인의 태도가 자기중심적이라는 데 이견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 사랑을 알게 돼서 범인을 용서할 수 있다는 그녀의 고백도 진실한 건 아니었다. 그녀에겐 신의 뜻을 먼저 안 자신이 직접 범인을 용서하는 순간이 필요했다.

인간이 예수가 될 수 있을까
남들에게 우월의식을 느꼈다고 해서, 또는 자기 부를 거짓으로 꾸몄다고 해서 한 사람이 이 정도 수난을 당해야 한다면 너무 가혹하다. 다만, 그러지 않았다면 조금 덜 힘들었을지 모른다. 신애가 교회에 간 뒤, 내면이 약간 평안해지는 정도로 만족했다면, 범인의 파렴치한 얼굴을 보고 절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예수가 될 수 없고, 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애초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줬기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기 아들이 죽은 지 얼마 안 돼 살인범을 용서하는 건 웬만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걸 흉내 내보려다가 신애는 더 큰 수렁에 빠졌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게 됐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자신을 찾아온 신애에게 종찬은 버럭 화를 낸다. 그가 신애에게 화를 내는 유일한 장면이다. 종찬은 신애가 약해진 순간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사진 제공=시네마서비스]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종찬(송강호)은 아마 신이 아닌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답인지 모른다. 신애와 깊은 사이가 되고 싶어서 곁을 맴돌지만 선을 넘진 않는다. 필요가 있으면 채워주되, 상대가 불편해하면 거기서 멈춘다. 자기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가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순간, 외려 더 거리를 둔다. 상대방을 아끼기에 그녀가 약해진 순간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고치려 들지 않는다. 스스로 더 나아지려고 무리하거나, 상대방에게 더 나아지라고 강요하는 대신, 서로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옆에 머문다.

영화 ‘밀양’ 포스터. [사진 제공=시네마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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