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이 온다면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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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손희정(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이 2년 반 만에 내놓은 단독 저서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메멘토 펴냄)는 자본주의의 끝에 관한 이야기다. 손상된>
손희정은 새빨간 스틸레토힐을 신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청중을 응시하며 비평 언어를 줄줄 읊는 매력적인 강연자이자 저술가이자 다독가이자 번역가이자 학자이자 방송·유튜브·신문 등 매체를 가리지 않는 영화평론가이자 지금은 거의 명맥이 끊긴 문화평론가라는 직함을 유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방위 문화비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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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 인간은 정녕 파국을 맞을 것인가?
문화평론가 손희정(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이 2년 반 만에 내놓은 단독 저서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메멘토 펴냄)는 자본주의의 끝에 관한 이야기다. 요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는 사조인 포스트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 신유물론 같은 담론 지형을 포괄하는 지도 겸 나침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손희정은 새빨간 스틸레토힐을 신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청중을 응시하며 비평 언어를 줄줄 읊는 매력적인 강연자이자 저술가이자 다독가이자 번역가이자 학자이자 방송·유튜브·신문 등 매체를 가리지 않는 영화평론가이자 지금은 거의 명맥이 끊긴 문화평론가라는 직함을 유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방위 문화비평가다. 그는 2017년 한국 최대 진보적 학술행사 ‘맑스코뮤날레’에서 내로라하는 한국 좌파(주로 남성)들이 운집한 가운데 ‘(좌파의) 비전 부재와 운동 에너지 고갈이 혐오를 가중했다’고 명랑하게 저격해 충격을 던졌다.
2010년대 중반 한국의 페미니즘 대중화 현상을 <페미니즘 리부트>(나무연필 펴냄, 2017)로 정의한 사람도 손희정이다. 2023년 말 최대 흥행 영화 <서울의 봄>을 놓고 ‘남성 서사 과잉’이라고 비판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아무렴, 그는 시의적절한 화제를 놓치지 않는 기막힌 ‘촉’을 가진 평론가이자 개입과 도전을 겁내지 않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대중적인 방송부터 전문적인 학술장까지 아우르는 비평가로서 그만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그런 그가 내놓은 파국에 관한 책이니 과연 ‘종말론’이라는 과녁의 정중앙을 확실하게 꿰뚫는다.
책을 보면, 21세기 첫 20년간 대중문화는 종말의 이미지가 난무했다. 하지만 저자는 과학철학자 도나 해러웨이처럼 “‘망했다’는 좌절감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자세를 취한다. “어떻게 하면 인간 너머를 말하되 파괴적인 인간 혐오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궁리하며 저자는 파국에 관한 철학 이론과 문화 코드를 촘촘하게 엮어낸다. 이런 시도야말로 해러웨이가 말한, 인류만의 것이 아닌 이 지구에서 ‘트러블과 함께’하는 새로운 세상의 급진적인 ‘실뜨기’ 작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이 시대에 필수적인 페미니즘·신유물론·돌봄 독서 목록을 보여주면서 영화인들이 제시한 다양한 파국의 세계를 비평한다. <수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등에서 나타난 공생·공산·재생의 가능성을 경유해, 전작보다 더 퇴행해버린 <말레피센트 2> <아바타: 물의 길> <겨울왕국 2> 등을 비판적으로 살핀다. 이 영화들은 남성 가장의 권위를 복권하거나 자연-문명 갈등 구도를 답습하며 페미니즘 텍스트의 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밖에 여성 영웅 서사가 군사화하는 맥락을 예리하게 짚으면서 ‘시스템’ 외부를 사유하는 데는 ‘능력과 배짱’(김엘리)이 필요하다는 점까지 아울러 일깨운다.
“신나게 바닷속에 콘크리트를 처박아넣는 인간이 있다면, 자연이 준 것을 감사히 여기며 그 안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고자 하는 인간도 있다.” 파국을 앞둔 시대에 절망에서 한발 떨어져 정신 차리고 할 일을 하자며 독자에게 다음 실뜨기를 건네는 시의적절하고 뜨거운 신작이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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