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삶 싣고… 꿈 싣고… 오늘도 새벽길 달린다 [밀착취재]

최상수 입력 2024. 2. 24.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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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50분 첫차’ 8146번 버스기사 윤종수씨
새벽 3시 서울 노원구 상계동.
 
적막한 공기 속에 가로등 불빛만 낮게 깔린 도로에 파란색 버스 3대가 나란히 들어온다. 서울에서 가장 일찍 아침을 여는 출근 버스인 8146번 버스다. 시민들은 5분 간격(오전 3시50분, 3시55분, 4시)으로 출발하는 이 3대의 버스를 묶어서 그냥 다 첫차라고 부른다.
 
상계동 7단지영업소를 시작으로 강남으로 가는 8146번 버스는 지난해 1월16일 노선이 신설되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새해 ‘국민과의 만남’ 행사의 하나로 새벽 만원 버스라 불리는 146번 버스에 탑승해 첫차를 이용하는 시민 의견을 반영한 결과다. 첫차 시간을 앞당겨 달라는 것이 시민들의 가장 큰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노원구 7단지영업소 정류장에서 출발한 8164번 버스가 손님들을 태운 채 새벽 도로를 달리고 있다. 최상수 기자
오전 3시30분쯤 버스가 출발하기도 전에 버스 정류장이 아닌 대기 장소까지 찾아온 두 아주머니가 올라탔다. “시간이 좀 빨라진 건 다행이지만 조금만 더 일찍 갔으면 좋겠다”며 출발을 기다렸다. 원래 오전 4시5분에 3대가 동시에 출발하던 버스는 오전 3시50분부터 차례로 새벽을 열고 있다. 8146번 버스가 모두 출발한 뒤 오전 4시5분이 되면 기존의 146번 버스가 같은 노선을 운행한다.
오전 3시50분 출발하는 ‘진짜 첫차’는 수락산역∼노원역∼중계역∼태릉입구역∼청담역∼삼성역∼강남역 등을 거쳐 서초푸르지오써밋·롯데캐슬클래식 정류장에서 회차해 오전 6시 37∼46분 출발지로 되돌아온다. 한강을 가로질러 서울 동부의 강남북 노선을 약 3시간 동안 달린다.
윤종수 기사가 서울 노원구 7단지영업소 정류장에서 출발한 8164번 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윤종수 기사가 서울 노원구 7단지영업소 정류장에서 출발한 8164번 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올해로 36년째 버스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는 윤종수씨는 ‘진짜 첫차’를 맡았다. 시동을 걸어 보고, 문은 잘 열리는지, 각종 버튼과 레버를 점검한다. “여기는 조용하지만 빠르면 먹골역쯤, 보통은 면목동쯤이면 버스가 가득 차요. 원래는 뒷문으로 탑승하면 안 되지만 사람이 가득 차서 나중에는 뒷문으로라도 태우고 가죠.” 윤씨가 말했다.
오전 3시50분 버스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거리를 비추며 도로로 나선다. 인적 없이 고요한 거리를 다니는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설 때마다 탑승객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대부분 남들 잠든 시간 미화나 경비를 위해 강남구까지 가는 승객들이다. 다들 매일 보는 사이인지 마실 나온 듯 “어머 언니, 오늘은 이쁜 거 입고 왔네?”, “새벽 공기 쌀쌀하네”하며 서로 정다운 인사를 나눈다.
서울 노원구 7단지영업소 정류장에서 출발한 8164번 버스가 손님들을 태운 채 새벽 도로를 달리고 있다. 최상수 기자
한 아주머니는 타자마자 문 옆의 맨 앞 좌석에 앉더니 가방에서 자신이 준비해 온 휴대용 방석을 꺼내 발판 쪽에 놓았다. 이어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탑승한 다른 아주머니가 익숙한 듯 휴대용 방석에 앉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앉으라고 일부러 여기 앉아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출근하는 두 사람에게 버스 앞 좌석은 지정석 같은 곳이다. “나는 (서울)고등법원에서 일하고, 이분은 강남구청에서 일해요. 이른 시간에 나가는 게 힘들지만, 일자리 구하기 힘든 68세에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세심한 배려심으로 방석을 까는 아주머니가 말했다. 오전 4시25분쯤 서울 중랑구 동일로 먹골역 정류장에 다다르자 버스는 벌써 만원이 됐다.
한 분에게 “이런 새벽에 멀리(강남)까지 힘드시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다. “다 이러고 (사느라고) 다닙니다.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거죠”라며 “우리나라는 (새벽에도 열심히 일하는) 어머니들이 존경스러워요. 진짜 어머니들같이 부지런하면 우리나라 진짜 부강할 거예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윤종수 기사가 서울 노원구 7단지영업소 정류장에서 출발하는 8164번 버스 운행을 준비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우리는 아침을 시작할 때 깨끗한 거리, 산뜻한 지하철, 깔끔한 사무실과 만난다. 그 뒤에는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이분들의 정성이 있고, 그 뒤에는 또 삶의 터전을 왕래하는 이분들의 발이 되는 8146번 버스의 노고가 있다.

오늘도 8146번 버스는 서민의 고귀한 삶을 태우고 새벽길을 달린다.

글·사진=최상수 기자 kilr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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