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이상하다 싶을 때 불현듯…“일요일 새벽 동해로 왔다” [ESC]

한겨레 2024. 2. 2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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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의 작은 마을 여행 망상해변과 묵호
강원 동해시 망상해변. 넓고 넓은 해변이어서 이름 그대로 망상을 펼치기에 좋다.

기분 전환하려 새벽에 동해로
망상해변 산책하며 머리 식혀

불행의 반대말은 행복이 아니다. 불행의 반대말은 일상이다. 토요일 아침 눈을 떠 아무런 생각 없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있다면 불행하지 않은 것이다. 몸이 아픈 것을 느끼지 않는다면 건강한 것이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아프다고 느끼고 있다면 정말 불행한 것이고 정말 아픈 것이다. 아픈 몸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병원에 가야 하고 불행하다는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정신은 육체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매일 한시간씩 운동하고 삼십분씩 독서하는 사람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망상 즐긴 뒤 동해보양온천으로

그래서 지난 18일, 일요일 새벽에 동해로 왔다. 면도를 하다가 요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기 때문이다. 아, 이게 아닌데 하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안 좋은 생각 또는 기분을 떨쳐내는 데는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 좋은 건 없다. 칫솔과 귤 두개, 두유 하나를 챙겨 차 시동을 걸었다.

어두운 서울양양고속도로를 달려 강릉을 지날 때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동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망상나들목으로 나왔다. 동해시엔 망상·추암·어달·대진·하평·한섬·고불개·노봉 등 예쁜 해변이 많다. 이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망상해변이다. ‘아재 개그’ 같지만 이름이 좋다. 망상이라니…. 활시위처럼 휘어진 해변은 넓고 넓어서 이름 그대로 망상을 펼치기에 좋다. 길이가 2㎞에 이른다.

맑은 바다에는 봄햇살이 내려앉고 있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하다. 기온은 영상 17도. 두꺼운 외투는 차 안에 벗어두고 티셔츠 차림으로 해변을 걷고 있다. 귓전으로 다가오는 파도 소리가 경쾌하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해변을 걷는다. 햇빛에 따뜻하게 데워진 모래가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이런 감각을 잊지 않고 살아야지. 자고로 깨달음은 문밖에 있고, 인생에는 불현듯 떠날 수 있는 바다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나는 귤을 까먹으며 천천히 해변을 걷는다.

망상해변 가까이 동해보양온천이 있다. 새벽부터 달려온 피곤한 몸을 녹이고 싶어 들어왔다. 언젠가 이 자리에서 밝혔듯, 여행을 갔을 때 좋은 온천이 있다면 꼭 가보려고 한다. 예전엔 이곳저곳 바쁘게 다니는 것이 좋았지만, 이젠 조금은 느긋하게, 약간은 게으르게 다니는 것이 좋다. 탕 속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고 따뜻함을 즐기고 있노라면 이게 어른의 여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온천을 마치고 나와 가지고 온 두유를 먹고 묵호항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망상에서 묵호항으로 가는 길 내내 짙푸른 바다가 왼쪽 차창으로 보인다. 길은 바다를 따라가며 이리저리 휘어지고 차창 옆으로는 파도가 밀려온다. 봄빛을 잔뜩 머금은 바다는 배부른 고양이처럼 순하다.

석탄 수출과 어업전진기지로 한 때 동해 제일의 항구였던 묵호항.

‘상속자들’ 촬영지 유명해진 묵호
‘3대 장터’ 북평장엔 국밥거리가

오징어 잡고 무연탄 찍어내던 묵호

묵호항 뒤편에는 바다를 바라보며 들어선 마을이 있고, 그 마을을 헤집으며 구불구불 골목이 이어진다. 한때 뱃사람들이 살던 골목인데 지금은 그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포구에 들어서니 코끝에 비린내가 훅하고 감긴다. 길가에는 오징어가 바닷바람에 펄럭이며 말라가고 그 밑으로 도둑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린다. 조업을 마친 배들이 뱃고동을 길게 울리며 돌아온다. 여기저기서 상인들의 외침이 들려오는 포구는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든 채 어판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관광객들과 얼음을 잔뜩 실은 리어카들로 북적인다.

묵호항에서 고개를 돌리면 붉고 푸른 지붕을 얹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보인다. 게딱지를 얹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을은 한때 ‘붉은 언덕’으로 불렸다. 뱃사람들이 몰려 살았고 시멘트 공장과 무연탄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여름이면 생선 내장 썩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고 비가 오면 붉은 진흙이 흘러내렸다. 석탄을 실은 기차가 지나면 탄가루가 마을까지 자욱하게 날아들었다고 한다. 지금 길은 시멘트로 단단하게 포장됐고 더 이상 진흙이 흘러 내리지도, 탄가루가 날리지도 않는다. 십여년 전 찾았는데 그다지 변한 것 없어 보인다.

지금의 묵호는 동해시의 한 동(洞)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1981년 북평읍과 통합되어 동해시로 바뀌기 전까지 묵호는 동해 제일의 항구였다. 무연탄과 석회석의 수출 항구이자 어업전진기지였다. 전국에서 뱃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남자들은 오징어잡이 배를 탔고 무연탄 공장에서 석탄을 날랐다. 아낙들은 어시장에서 밤새 생선의 배를 갈랐다. 묵호역은 동해 영동선의 주요 정차역이었다.

묵호항에서 이 마을까지 ‘등대오름길’이라는 예쁜 길이 이어진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옛 묵호항의 정취와 마을의 풍경을 추억하는 벽화들을 만날 수 있다. 출항하는 오징어 배, 해풍에 말라가는 오징어, 대폿집과 이발소, 구멍가게 등의 벽화들이 마음 한쪽을 짠하게 만든다. 길 끝에 묵호등대가 서 있다. 십여년 전 묵호등대를 찾았을 때, 밤이었는데 눈이 내렸던 것 같다. 수평선에는 환하게 어화를 밝힌 고기잡이 배들이 가득했던 것 같다.

묵호등대.

마을은 작다. 30~40여호나 될까. 낮은 집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다. 조용하던 마을은 벽화가 예쁘다고 소문이 나면서 여행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드라마 ‘상속자들’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부쩍 유명세를 탔다. 동해시는 이곳을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로 조성했다. ‘도째비’는 도깨비의 강원도 사투리. 예전에 이곳에 공동묘지가 있어 밤이면 푸른빛이 돌아다닌다고 해 ‘도째비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지금은 59m 높이의 스카이워크가 들어서 있다. 이곳을 찾은 여행객들은 와이어를 따라 상공을 달리는 스카이 사이클을 타기도 한다. 마을 아래 바닷가에는 해상 교량인 ‘해랑 전망대’(길이 85m)도 있다.

옛 바닷가 마을의 정취를 느껴볼 수 있는 논골담길.

등대오름길은 묵호등대 앞에서 끝이 난다. 등대 앞은 마을버스 종점. 여기서부터 논골담1·2·3길이 갈래를 치는데, 이 길을 따라가며 옛 바닷가 마을의 정취를 느껴볼 수도 있다. 바닷가 마을답게 붉고 푸른 양철지붕을 인 집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 있고 노란색·초록색 등 원색의 벽들이 어울려 강렬한 풍광을 보여준다. 골목 대부분에서 묵호항이 내려다보인다. 거대한 냉동창고, 시멘트 공장, 석탄 공장이 무표정하게 서 있다.

묵호에는 ‘여행책방 잔잔하게’라는 다정하고 예쁜 책방이 있다. 여행작가인 채지형씨가 2020년 묵호로 내려와 문을 열었다. 신문사에서 기자, 아이티(IT)기업에서 에스엔에스(SNS) 기획자로 일하던 그는 동해의 한 도서관에 강의를 하러 내려왔다가 동해에 반해 그만 눌러앉고 말았다. 인생은 때로 이런 식이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채지형 작가도 서점 주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나는 여행작가로 살아가게 될 줄은 몰랐다. 훗날 나는 어느 도시에서 살고 있을까. 아무튼 내가 부러워하는 것들은 모두 바닷가에 있다.

묵호에서 ‘여행책방 잔잔하게’를 운영하는 여행작가 채지형씨.

여행을 와서 작은 책방을 돌아보는 일은 무척이나 즐겁다. 매대에는 서울의 교보문고나 인터넷 서점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곳은 여행책 전문 책방답게 다양한 여행책들이 놓여 있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많은 여행책이 있었다니! 모두들 여행을 다니고, 모두들 자신의 여행을 쓰는구나.

나는 ‘태국 문방구’라는 책과 ‘미식가를 위한 일본어 안내서’라는 두권의 책을 샀다. ‘태국 문방구’는 제목 그대로 태국의 문방구를 다닌 기록인데, 내겐 그다지 필요가 없는 책이지만 그래도 샀다. 언젠가 볼 날이 오겠지. 살다 보면 무용한 것이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이 정말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식가를 위한 일본어 안내서’는 유용한 책 같아 집어 들었다. 여행은 기분인데, 계획에 없던 뜻밖의 물건을 사는 건 기분의 뒤꿈치를 5㎝ 정도 올라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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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때부터 시작된 5일장

슬슬 배가 고프다. 뭘 먹을까. 채 작가에게 물어보니 마침 오늘이 북평장이 서는 날이란다. 운이 좋다. 가는 날이 장날이니 말이다. “가서 국밥 한그릇 드세요. 거기 국밥거리가 있는데 맛있어요. 뭐 어느 집이나 비슷하니 아무 곳이나 들어가도 돼요.”

영민한 여행자는 언제나 현지인의 충고를 귀담아듣는다. 북평장은 크다. 전국 각지에서 상인들이 모여드는 강원도 최대의 5일장이라고 한다. 끝자리가 3일과 8일인 날, 42번 국도와 7번 국도가 만나는 북평 삼거리에서 열린다. 4차선 도로 양옆으로 1㎞가 넘는 길은 아침 일찍부터 행상들에게 점령당한다.

북평장에는 태백과 삼척 등 강원 영서 남부와 영동 지역에서 나는 약초와 산나물, 바다에서 나는 싱싱한 해산물이 모인다. 요즈음 전국의 전통 5일장이 점점 그 규모가 작아지고 있지만 북평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금강산 유람선이 여기서 뜨고 나서부터 장이 커졌지. 지금은 아마도 강원도에서 제일 클 것이오.” 강원도 정선에서 나물을 팔러 나왔다는 한 아주머니는 “북평장에나 와야 겨우 사람 구경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웃는다.

북평장에는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 쌀과 보리 등 각종 곡류를 비롯해 태백·삼척·정선·울진 등에서 나는 약초와 산나물, 마늘·고추 등 채소류, 강아지·토종닭 등 가축들과 옷·신발·낫·곡괭이 등 도시에서 생산된 물건까지 온갖 것들이 장마당을 메운다.

‘동해시지’에 따르면 북평장은 조선 정조 병신년(1796년)에 시작됐다. 2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물물교환 방식의 정기시장이 열린 것은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강원도 장타령에 “한자 두자 삼척장 베가 많어 못 보고…”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삼척장은 북평삼베장이다. 지금은 북평이 동해시에 속해 있지만 예전에는 삼척군 소속이었다. 전국의 유명 장터를 찾아 떠도는 장돌뱅이들은 북평장을 전북 이리장(익산장), 경기 성남 모란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장터로 꼽는다.

북평장 소머리국밥.

장 구경을 마치고 국밥거리로 왔다. 북평장은 다른 5일장과 마찬가지로 우시장이 함께 섰다. 지금 우시장은 사라지고 소머리국밥만 남았다. 국밥 한그릇을 시켜 놓고 앉았다. 국밥이 나오길 기다리며 책방에서 사 온 ‘미식가를 위한 일본어 안내서’를 펼쳐 본다. ‘이것만 써도 오케이(OK) 마법의 일본어 세 문장’이라는 꼭지가 있다. 세 문장은 “스미마셍”(실례합니다), “오네가이시마스“(부탁합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다.

실례합니다,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세 문장은 굳이 여행에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해야 할 말이다. 이 세말만 잘하면 인생이 훨씬 부드럽게 굴러간다. 어느새 국밥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나는 뜨거운 국물에 밥을 말았다. 뭔가 좋지 않은 기분이 들 땐 움직일 것, 쓸 데 없는 물건을 하나쯤 살 것, 그리고 뜨끈한 국밥을 먹을 것. 오늘 여행도 역시나 떠나오길 잘했다.

덕취원의 간짜장.
‘여행책방 잔잔하게’(인스타그램 @zanzan_bookshop)는 묵호항에서 가깝다. 오전 11시에서 오후 7시까지 운영한다. 매주 화요일 휴무.

묵호항 주변에 곰치국을 하는 집이 많다. 곰치 몇 토막에 묵은김치 숭숭 썰어 푹 끓여낸 곰치국은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묵호항에 있는 부흥횟집(033-539-5209)이 유명하다. 동북횟집(033-532-7156)의 물회도 유명하다.

덕취원(033-521-4054)은 80년 전통의 화상중국집이다. 간짜장과 삼선짬뽕이 맛있다.

북평장 국밥 거리엔 여느 집이나 맛과 가격은 비슷하니 취향에 따라 찾아가면 된다. 두꺼비집(033-521-5283), 옛날장터국밥(033-521-5283), 부산식당(033-522-1847) 등이 유명하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시인이자 여행 작가다.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지은 책으로는 ‘어제보다 나은 사람’,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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