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 이으면 되지, 왜 사서 고생?”…괴짜 상속자의 신박한 덕질 (上)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2. 2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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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프릭에서 프릭(freak)은 괴짜·광(狂)을 뜻합니다. 한 분야에 지나치게 집착하듯 관심이 많은 사람이죠. 와인에 흠뻑 빠진 필자 스스로 정한 필명이기도 합니다. 매니악(maniac)이나 퍼내틱(fanatic) 등도 비슷한 느낌의 단어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술의 범주에 속한 작업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와인을 양조하는 일은 포도나무 식재부터 과실 재배, 수확, 양조, 숙성, 판매와 그 후까지 변수의 연속이어서 가히 괴짜들의 업(業)이라고 할만 합니다. 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광(狂)이 아니라면 좀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해나가기 힘든 일이죠.

오늘 소개하는 사람은 그런 와인 양조자들 사이에서도 괴짜라고 불립니다. ‘괴짜들의 괴짜’ 정도로 표현하면 적당할까요. 포도밭 위로 로켓을 쏘아올리고, 007가방 같은 스마트케이스에 와인을 포장하는가 하면, 총알 모양의 독자개발한 마개를 사용하고 자신이 생산한 와인병마다 특이한 색깔의 스티커를 붙이기도 합니다.

얼핏보면 어느 와이너리 상속자의 철 없는 돈놀이거나, 돈 많은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의 덕질 정도로 보이기도 하는데요. 기행처럼 비춰지는 그 행동엔 나름대로 이유와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번 주 와인프릭은 일흔을 앞둔 나이에도 와인에 대해 얘기할때면 어린 아이처럼 눈동자를 빛내며 해맑은 미소를 짓는 부르고뉴의 괴짜 테크니션, 로랑 퐁소(Laurent Ponsot)의 이야기 입니다.

부르고뉴의 괴짜 테크니션, 로랑 퐁소. [사진=전형민 기자]
이 세상에 ‘절대’는 없다
어느 언어학 교수가 대학교에서 강의를 합니다. “여러분, 부정과 부정이 더해지면 긍정이 되는 경우는 있어도, 절대로 세계 어느 언어도 긍정+긍정이 부정으로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간단히만 생각해봐도 교수님 말씀은 틀렸습니다”고 반박하고, 자존심이 상한 교수는 갖가지 이론을 열거하며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그러자 학생이 나직 이렇게 내뱉습니다. “잘도, 그러겠다.”

한때 유행하던 우스갯소리인데요.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단순합니다.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다는거죠.

20년도 더 된 이야기를 굳이 꺼낸 것은, 로랑 퐁소가 바로 ‘절대’에 도전한 양조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도전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봤던 가능성을 지키고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혁신을 거듭하는 것에 충실한 양조자였습니다.

로랑 퐁소는 프랑스 북동부 부르고뉴에서 유서깊은 양조자 가문, 도멘 퐁소(Domaine Ponsot)의 일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또한 젊은 시절 도멘 퐁소에서 가문의 와이너리를 관리하며 와인을 양조했죠.

그런데 지난 2017년 돌연 36년을 바친 가문의 와이너리에서 떠나 아들(Clement)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와이너리, 로랑 퐁소를 설립합니다. 그에게 주어진 도멘 퐁소의 지분을 팔아치워서요.

가만히 있어도 전도가 유망한 건 둘째치고, 이미 본인 실력에 대한 증명도 끝낸 로랑이 늘그막에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자세한 내용을 밝히진 않았습니다만, 그는 “도멘 퐁소의 미래에 대한 나의 비전과 다른 가족의 비전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비전이었는지는 그가 로랑 퐁소 와이너리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와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도멘 퐁소 와이너리의 사진. [출처=vinovest.co]
‘왜 꼭 그래야만 하는데?’라는 의문
부르고뉴가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산지 중 하나라는 점은 많은 와인 애호가들이 두루 공감하는 이야기입니다.

부르고뉴는 길이 70㎞, 평균 폭 1㎞에 불과한 지역에 1200개의 아펠라시옹(appellation·법적인 지리적 표시 보호 단위)이 밀집해있는데, 그 좁은 곳에서 1200여개의 구분가능한 다양한 캐릭터의 와인이 양조된다는 뜻입니다.

이 중에서도 로랑 퐁소가 일했던 도멘 퐁소는 모레 생 드니(Morey-Saint-Denis)를 대표하는 와이너리였습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역 최고의 가족 와이너리에서 30년 넘게 일한 중년의 농부였던 로랑 퐁소는 문득 ‘왜 꼭 한 밭의 포도만 고집해야 하는가?’라는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부르고뉴 와이너리들이 그동안 한 밭의 포도만을 가지고 한 가지 와인을 만들어온 이유는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그만큼 밭마다 캐릭터가 다양하고 특징적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밭들을 일구고 거둬들이면서 거의 평생을 보낸 중년의 로랑 퐁소는 당연한듯 해오던 일을 거부합니다. 밭마다 가진 캐릭터를 하나로 조화시켜보고 싶어진 겁니다.

꼭 맞는 비교는 아니겠지만 오랜 시간 싱글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던 곡을 현악4중주, 혹은 오케스트라를 활용해 연주해보자는 생각을 한 것이라고 보면 될 듯 합니다.

하지만 전통 방식으로도 세계 제일인 기존 부르고뉴 생산자들의 입장에서는 ‘긁어 부스럼’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모레 생 드니 지역 지도. [출처=bourgogne-wines.com]
교향곡의 지휘자가 되고 싶었던 농부
로랑은 당시 생각에 대해 “나는 농부였다. 현재는 양조자다.(I was a farmer. Now I am a oenologist). 농부로서 내 생각을 바꿨다. 세상에는 나보다 좋은 농부가 있고, 우리는(부르고뉴에는) 이미 3500명의 농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건 와이너리를 설립한 후, 자기 스타일의 와인을 양조를 할 수 있게 되고 나서야 스스로를 양조자라고 부를만하다고 느낀듯 합니다.

역사적으로 부르고뉴 지방 와인의 뿌리가 네고시앙(여러 밭에서 생산된 포도를 사서, 양조만해서 판매하는 상인)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는 “1970년대보다 전까지 부르고뉴에는 네고시앙 와인이 훨씬 더 많았다. 과거의 히스토리를 따져봤을 때도 네고시앙이 부르고뉴 와인의 원래 정체성인만큼, 그때의 스타일을 찾고 싶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부르고뉴 지역은) 블렌드(여러 밭에서 수확한 포도를 혼합하는 것)를 통해 우리 만의 조합을 찾아야 한다. 여러 밭의 포도를 써서 아펠라시옹의 진정한 캐릭터를 찾고자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어쨌든 로랑은 자신의 생각을 실현합니다. 자신의 도멘 퐁소 지분을 매각해 2017년부터 그의 이름을 건 새 와이너리를 시작한 겁니다. 같은 아펠라시옹 내에서 여러 재배자의 포도를 사서 이를 혼합해 와인을 양조하겠다는 생각을 현실로 만든 것이죠. 아무튼 이러한 그의 선택은 일반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결정입니다.

그는 “밭별로 와인을 만들어내는 일은 그 자체로도 대단하다. 하지만 같은 아펠라시옹은 통일된 캐릭터가 있어야 하고, 나는 여러 밭의 포도를 조합해 그 아펠라시옹이 가진 캐릭터를 가장 순수하고 완벽하게 끌어내길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도전자들이 으레 갖기 마련인 호승심보다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결과물을 존중하자는 뉘앙스 입니다.

*다음 주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인터뷰 내용을 충실히 담기 위해 상하편으로 나눠서 연재합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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