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학교가 두렵나”…‘반성 않는 일본’에 회초리 든 시민들

정혁준 기자 2024. 2. 24.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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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커버스토리
‘조선학교 차별 반대’ 555회 집회 현장
일본 시민단체 ‘조선고급학교 무상화를 요구하는 연락회·오사카’ 회원들이 지난 6일 오사카시 오사카부 청사 앞에서 ‘화요일 행동 555회’ 집회를 열었다. 나가사키 유미코 사무국장(오른쪽 둘째)은 12년 전 이 단체의 집회를 사진으로 보도한 한겨레신문(2012년 10월15일치)을 들고나왔다. 오사카/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무상교육 배제’에 반발, 2012년 3월1일 창립한 일본 오사카 시민단체
매주 ‘화요행동’…“똑같이 세금받고 왜 차별? 부끄러운 어른 되지 말자”
소송 도왔지만 모두 패소…“안정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게 기부 활동”

지난 6일 오전 11시30분 일본 오사카시 오사카부 청사 앞. 이곳은 오사카 동쪽 지역으로 오사카성이 바로 옆에 있다. 40대에서 8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이곳으로 모였다. 30여명 정도였다.

어떤 이는 스피커를 연결했고, 어떤 이들은 북과 탬버린을 들었다.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라고 적힌 펼침막이 보였다. 모두 결연한 얼굴이었다. 이날 기온은 영상 7도였지만, 바람이 강했다. 쌀쌀한 날씨에 펼침막을 들고 있는 손은 추워 보였고 안쓰러웠다.

정오가 되자 일본 조선학교를 응원하는 집회가 시작됐다. 일본 시민단체 ‘조선고급(고등)학교 무상화를 요구하는 연락회·오사카’(이하 연락회)가 주최한 ‘화요일 행동(이하 화요행동) 555회’ 집회였다. 연락회는 2012년 3월1일 처음으로 창립대회를 열었다. 한국의 삼일절에 맞춘 설립이었다. 그해 4월17일부터 오사카부 청사 앞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집회를 열고 있다.

12년 전 신문에 실린 집회 사진

조선학교는 1945년 8월 해방 뒤 일본에 남아 있던 재일조선인들이 아이들에게 우리 말과 글,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학교다.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가 결성된 뒤 총련이 학교 운영을 지원했다.

현재 일본의 조선학교로는 유치원, 초·중·고교, 대학교까지 있다. 일본에서 조선고급학교(이하 조선학교) 무상화 논란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 일본의 집권 민주당은 그해 4월부터 교육의 기회균등을 내걸며 고등학교 수업료를 국가가 부담하는 고교무상화 정책을 시작했다. 일본에 있는 한국학교·국제학교 등 외국인학교에도 이 정책이 적용됐다. 하지만 당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불거지면서 조선학교에 적용을 보류했다. 보수적인 아베 신조 내각이 출범한 2013년에는 조선학교를 무상화 대상에서 완전히 빼버렸다. 때를 맞춰 오사카부도 그동안 교부해온 초·중·고 조선학교에 지원하던 보조금을 끊었다. 현재 일본 전역에 있는 조선학교 수는 60여개다.

빨간 모자를 쓰고 집회에 참석한 나가사키 유미코 연락회 사무국장이 말했다. “추운 날씨에도 조선학교 차별 철폐를 위해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집회에 참여하신 분들이 들고 계신 펼침막은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미술 선생님이 직접 만들었거나, 한국 시민들이 만들어 보내준 것입니다. 희망을 담은 펼침막처럼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가야겠죠.”

2013년 2월7일 조선학교 학생들과 학교 관계자들이 일본 도쿄의 중의원(하원)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민당 정권의 고교 무상화 배제를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후지나가 다케시 연락회 공동대표가 말을 이었다. “2013년 2월20일은 일본 정부가 무상화 정책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하겠다고 통보한 날이었습니다. 일본의 모든 고등학교는 무상화 교육을 받고 있지만, 조선학교만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엔에서도 일본의 이런 조처를 ‘차별’이라고 규정하고 조선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보장해줄 것을 권고했습니다. 더는 부끄러운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오무라 가즈코는 오래된 신문 한쪽을 펼치며 차별 철폐를 촉구했다. 2012년 10월15일치 한겨레의 사진칼럼 ‘이순간’이었다. 10여명이 그해 시작한 ‘화요행동’의 집회를 다룬 사진과 글이 실려 있었다. 일본 시민단체 ‘1% 저력으로 민족교육을 지키는 모임’ 소속의 다무라 요시코는 “조선학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세금을 내면서도 제대로 권리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라며 “일본 사람처럼 세금을 내는데도 교육받을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면 불평등하다”고 강조했다.

연락회의 후지나가 공동대표(왼쪽부터), 나가사키 사무국장, 아라이가 오사카의 이자카야 앞에서 조선학교 지원을 위해 판매하는 티셔츠를 선보이고 있다. 오사카/이정용 선임기자

집회에 참석한 아라이 노부요시는 이자카야를 운영하면서 조선학교를 응원하는 티셔츠를 팔고 있다. 그는 얼마 전에 있었던 ‘특별한 판매’를 소개했다. “지난해 11월 한 한국인이 제가 이자카야에서 판매하는 티셔츠를 보고 ‘일본에 와서 티셔츠를 사겠다’고 약속했죠. 당시엔 제 진정성을 약간 의심한 것 같은데 그 한국인은 올해 2월에 와서 티셔츠를 샀습니다. 이렇게 일본과 한국 시민 사이에서 작은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넓어지면 조선학교 아이들에게 좀 더 희망과 응원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일동포 고기련씨는 최근 일본 군마현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 추도비가 철거된 일을 거론하며 울먹였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는 추도비는 일본 전국에만 160여개가 있습니다. 이런 추도비는 일본 정부가 만든 게 아니에요. 대부분 강제 동원을 반성하는 시민들이 세웠습니다. 하루 이틀 동안 추도비를 없앤다고 해서 100년의 역사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조선학교 차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회 중간중간 참가자들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고향의 봄’ 같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재일동포 진승원씨는 “날씨는 추워도, 가슴은 뜨겁다”고 했다. 집회를 마치며 참가자들이 한국어로 노래를 불렀다. 제목은 ‘승리의 그날까지’였다. “고개를 들어요. 한숨을 거두자요. 아이들의 웃음을 빼앗길 순 없잖아요. 포기를 말자요. 단념도 하지 말고, 전진만이 우리의 길, 승리의 그날까지.”

“조선학교는 일본 침략 역사의 증인”

집회를 마친 뒤 후지나가 공동대표, 나가사키 사무국장, 아라이가 오사카 남쪽 니시나리로 향했다. 이곳엔 아라이가 운영하는 특별한 이자카야가 있다. 가게 벽과 천장, 화장실 등 곳곳에 체 게바라 사진이 붙어 있다. 이자카야에 책장이 있는 것도 흥미롭다. 책장엔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책이 꽂혀 있다.

아라이가 운영하는 이자카야의 이름은 ‘그란마호’다. 체 게바라가 1956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꿈꾸며 탄 8인승 보트와 같은 이름이다. 세 사람은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혁명을 꿈꾸는 혁명가 같았다.

555 회를 맞은 ‘화요행동’ 집회에 나가사키 사무국장은 남편과 함께 매번 참가한다. 나가사키 사무국장은 “집회에 참가할 때마다 빨리 조선학교 차별이 사라져 집회가 더는 열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며 “집회에서 느끼는 열정이 너무 좋다. 아이들을 위해 하나가 되는 그런 열정”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조선학교에 관심을 쏟게 된 계기가 있을까? “제 전문 연구 분야가 한국 근현대사여서 조선학교를 조금 알고 있었어요. 제 고향이 과거 한반도와의 왕래 관문이던 시모노세키입니다.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는 어릴 때부터 친숙한 존재였죠. 연락회 결성 때 참여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후지나가 공동대표)

“대학교를 졸업한 뒤 보육원에서 일하게 됐는데, 70%가 재일동포 아이들이었죠. 하지만 아이들을 위한 민족교육은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재일동포 보육사와 함께 ‘잘 먹었습니다’와 같은 한국말을 가르치기도 하고, 반 이름을 ‘사랑’ ‘바람’ 등으로 바꾸기도 했죠. 사물놀이를 배워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끼게 됐어요. 보육원을 졸업한 아이들이 조선학교에 입학하고, 그 아이들이 조선학교 선생님이 되기도 했어요.”(나가사키 사무국장)

“저는 요코하마에서 자랐는데, 집 근처에 조선학교가 있었어요. 학생들이 싸움을 잘한다는 인상을 받았죠(웃음). 그 뒤 재일동포 친구도 생기고, 이자카야에 재일동포가 손님으로 오시면서 조선학교 문제를 조금은 알게 됐어요. 조선학교 차별 문제를 들었을 때 정치와 외교 문제를 떠나 ‘상식적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아라이)

시민단체 ‘조선고급학교 무상화를 요구하는 연락회·오사카’ 회원들이 6일 오사카시 오사카부 청사 앞에서 ‘화요일 행동 555회’ 집회를 연 뒤 차별 철폐를 촉구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오사카/이정용 선임기자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차별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고 있을까? 후지나가 공동대표는 “일본은 일제 강점기부터 (조선의) 민족교육을 일본 체제와 질서를 흔드는 문제로 보고 탄압했다. 현재 일본 정부도 일본인 납치·북핵 문제 등을 이유로 조선학교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가사키 사무국장은 “일본이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을 반성하지 않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조선학교에서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라며 “조선학교 자체가 역사의 증인이 될 수 있기에 탄압한다고 본다”고 짚었다.

‘달걀로 바위 치기’ 이어가기

2013년부터 도쿄·오사카·아이치·히로시마·후쿠오카 등 5개 조선학교에서 무상화 배제 취소 소송과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2021년까지 이어진 재판은 오사카지방재판소(1심)에서 한번 승소했을 뿐 모두 패소했다. 승소한 오사카 1심도 대법원에선 패소가 확정됐다.

연락회는 비용을 모금하면서 조선학교의 소송을 지원했다. “조선학교 내부에서도 처음에는 부담스러운 법정 투쟁을 적극적으로 원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일본 정부의 차별정책을 간과할 수 없고, 아이들 미래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후지나가 공동대표)

“처음에는 (보조금 지원을 끊은) 오사카부와 교섭을 통해 교부금 문제를 풀려고 했죠. 그런데 2010년 오사카의 한 조선학교 관계자가 찾아와 상담했습니다. 당시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부 지사가 오사카 조선고급학교를 방문해 럭비부 연습을 관람하면서 ‘너희는 오사카의 자랑’이라고 말한 뒤 보조금을 끊어버렸어요. 아이들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고 정치에 불신이 생겼죠. 재판에 나선 이유였습니다. 재판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법 정의가 살아 있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정의는 없었습니다.”(나가사키 사무국장)

재판 결과가 보여주듯 일본 사법부도 차별적 인식에서 자유롭지 않다. “일본 법원의 역사 인식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식민 지배로 빼앗은 민족교육권을 회복해줘야 한다는 역사적 의미를 인식하지 못했거나 인식하지 않으려 한 것이죠. 이는 현재 일본 사회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 인식의 반영이기도 합니다.”(후지나가 공동대표)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보수화된 정치와 관련돼 있다고 봅니다. 일본 정치권이 강제 동원, 관동 대지진, 위안부 문제 등에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다 보니, 사법부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나가사키 사무국장)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 중 소수자인 조선학교를 돕는 일은 ‘달걀로 바위 치기’같이 버거운 일이다. 사법부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서 이들이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할지가 궁금했다. “패소에도 기죽지 않는 재일동포 어머니들의 진취적인 자세가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법정에선 패했지만, 이번 소송을 통해 해결해야 할 새로운 과제도 많이 나왔습니다. 조선학교 관계자들과 시민단체, 법률가들과 함께 연대해 정보를 모으고 새로운 과제를 찾으려 합니다. 언젠가는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후지나가 공동대표)

나가사키 사무국장은 “재판에서 진 뒤 조선학교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지만 민족교육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다음 세대에도 이어주겠다는 다짐도 했다고 한다”며 “기부활동을 통해 좀 더 안정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시민단체가 활동에 어려움을 겪는다. 일본은 어떨까? 나가사키 사무국장은 “보수적인 정치권과 함께 보수적인 언론이 문제”라며 “정부 시각에 맞춰, 시민단체 활동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후지나가 공동대표는 “지금보다 젊은층이 시민단체에 많이 들어와 활동을 벌여야 한다. 좀 더 젊은 사람들이 시민단체 활동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모두 한국 현대사도 잘 알고 있었다. 아라이는 “전두환은 광주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나가사키 사무국장이 말을 이었다. “제가 대학생 때 김대중 사형 반대 집회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당시엔 한국의 독재 정권에서 이분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됐어요. 그런데 나중에 한국 대통령이 된 것이 인상적이었죠.” 후지나가 공동대표는 “일본 시민사회가 한국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김대중 구명 운동이었다”며 “1980년 광주에서 독재 정권이 잔혹함을 보였지만 1987년 민주화 운동에서 한국의 역동성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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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일본 오사카시 히가시오사카에 있는 조선학교 모습. 정문 동판에는 ‘오사까 조선고급학교’라고 적혀 있다. 오사카/이정용 선임기자

“총련·민단 구분해 사람 만나지 않아요”

지난 7일 오후 1시 오사카시 동쪽 지역에 있는 조선학교 앞. 정문 동판에는 ‘오사까 조선고급학교’라고 적혀 있었다. 교정 안엔 벌써 피어난 동백꽃이 보였고 운동장엔 몇몇 학생들이 축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까르르’거리며 장난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에 앞서 한겨레는 오사카조선고급학교·고베조선고급학교 등에 기사 취지를 설명하며 인터뷰를 제안했다. 하지만 최근 남북관계가 악화된 상황을 반영하듯 학교 쪽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한국에선 조선학교 차별 문제를 다룬 영화를 만들면서 총련과 조선학교 인사를 접촉했다는 이유로 제재를 가하려 한다. 통일부는 지난해 11월 조선학교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차별’을 제작한 김지운 감독에게 총련과 조선학교 인사를 접촉했다는 이유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는 공문을 보내 ‘남북교류 검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남북교류협력법에선 ‘북한 주민’과 만나려면 상세한 인적 사항을 적어 사전 접촉 신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만날 사람의 신원을 특정하기 어렵거나 예상치 못한 접촉이 이뤄지면 사후 신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일부는 ‘사전 신고’를 강조하며 위반 사례를 찾아내고 사후 신고도 거부하고 있다.

김 감독은 ‘차별’을 만든 계기를 설명하며 황당해했다. “2017년 히로시마에서 조선학교 무상화 소송의 첫 판결이 났어요. 당시 한 재일동포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동포들이 재판장 앞에서 울부짖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고, 영화감독으로서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뒤 김 감독은 일본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다. “조선학교를 응원하고 지원하는 수많은 일본인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일본 시민단체와 변호사들, 시민들의 활동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2년간 기록을 해서 2021년 다큐멘터리를 완성했습니다.”

오사카 고등재판소가 2018년 9월27일 오사카 조선고급학교의 고교 무상화 항소심에서 패소 판결을 내리자 조선학교 쪽 관계자들이 “사법부가 아이들을 버렸다” “부당 판결”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지운 감독 제공

김 감독은 “‘차별’이 통일부 추천 다큐멘터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차별’은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와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에 초청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중·고교에서 상영회를 열어 또래의 조선학교 아이들도 소개하고 재일동포 역사도 제대로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물거품이 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조선학교 교류사업이나 방문을 남북교류협력법으로 막는 사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정부의 통일부는 참 한심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남북교류와 협력을 위한 법을 교류를 막는 법으로 악용하니까….” 김 감독은 지난 21일부터 일본 기타큐슈·히로시마·교토에서 ‘차별’ 상영회를 열고 있다.

국내 시민단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도 통일부에서 조선학교 사람들을 접촉한 경위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김명준 몽당연필 사무총장은 “조선학교는 나라가 힘이 없어 일본으로 강제로 갈 수밖에 없었던 많은 조선인의 한이 담긴 교육기관이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녀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학교였다”며 “이데올로기와 정치를 떠나 지원해줘야 하는 학교인데, 통일부는 이런 활동을 펼치는 시민단체에 과거 행적을 파헤쳐 겁을 주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선학교를 돕고 있는 일본인도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가 아는 재일동포들은 총련이나 민단을 구분해 사람을 만나지 않아요. 그런데 총련 사람을 만날 때 신고해야 한다면 시민사회 활동을 하는 데 상당히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윤석열 정권이 남북교류를 전면적으로 막으려는 탄압과 심술 같습니다.”(나가사키 사무국장)

아라이가 판매하는 티셔츠엔 다음과 같은 설명글이 들어 있다.

“일본 사회가 조선 비난을 지속하는 가운데, 조선학교는 아이들이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하고 민족 정체성을 키우는 소중한 커뮤니티입니다. 자신에게도 자부심을 느끼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조선학교 졸업생들은 일본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어준 그 손을 놓지 않으면 반드시 승리한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승리의 길!’ 한국과 오키나와 친구가 보낸 이 말을 가슴에 새기려고 합니다. 꼭 지원 바랍니다.”

이 글은 나가사키 사무국장이 썼다. 아라이는 이자카야를 찾는 손님에게 이 티셔츠를 권하고, 몇몇 손님은 티셔츠를 산다. 이렇게 작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인권 보호와 차별 철폐에 힘을 모은다. 민족과 정치, 이데올로기와 상관없는 일이다.

오사카/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인터뷰 | 니와 마사오 조선학교 재판 변호인단장
“치마저고리 갈아입은 학생들, 승소 판결에 기뻐해”

니와 마사오 변호사(조선학교 재판 변호인단장)가 지난 8일 일본 오사카시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오사카/이정용 선임기자

지난 8일 일본 오사카시 니시텐마의 사무실에서 니와 마사오 변호사(조선고급학교 무상화 재판 오사카 변호인단 단장)를 만났다. 니와 변호사는 일본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꼽힌다.

―조선학교 법정 투쟁에 나서게 된 계기가 있나요?

“2010년 오사카에 있는 조선학교 관계자가 찾아와 상담했어요. 당시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부 지사가 ‘북한이라는 국가는 폭력단과 같다’ ‘북한과 관계된 학교나 시설과는 상대하지 않는다’며 보조금을 중단한다고 결정했죠. 보조금 지급 중단에 이어 조선고급(고등)학교 10곳은 고교무상화 제도에서 제외됐어요. 상담 당시에는 오사카 변호사회 임원이어서 사건을 맡을 수 없었지만, 임원을 그만둔 뒤 변호인단을 결성해 시민과 함께 법적 대응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소송에 들어가는 비용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조선학교에서는 받지 않기로 했죠. 시민들이 기부금을 마련하면서 재판이 본격화한 거였죠.”

―법적으로 어떤 점에 초점을 맞췄나요?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가 총련과 밀접히 관련돼 있고, 지원금이 다른 용도로 쓰일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선학교가 ‘총련의 부당한 지배’를 받고 있다는 근거를 들기 위해서였죠. 우리는 조선학교가 민족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법인이므로 모국어와 모국의 역사·문화 교육은 민족교육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또 ‘교육의 기회균등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유엔에서도 교육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점도 강조했죠.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 자신이 원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우리 주장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오사카지방법원 1심은 유일한 승소였는데요. 재판 당일은 어땠나요?

“우리보다 먼저 1심 재판이 끝난 히로시마에선 패소했죠. 그래서 상당히 긴장됐습니다. 방청석 맨 앞에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학생들이 앉아 있었죠. 학생을 향한 테러로 이제는 학교 밖에서는 입지 못하게 된 그 교복을 가방에 넣어 와 법원에서 갈아입은 뒤 법정에 들어온 학생들이었습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판사가 주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 같은 변호사는 주문 첫 부분에서 재판 결과를 직관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겼다!’ 곧이어 여고생들이 서로 벌떡 일어나서 껴안는 걸 보면서 민족과 국적을 뛰어넘은 공통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나요?

“먼저 조선학교 학부모와 학생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판사에게 아이들 마음을 전달하고 교육받을 권리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조선학교 전체 학부모와 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설문조사 내용엔 왜 조선학교를 선택했는지 등이 들어갔고, 학교의 좋은 점과 안 좋은 점 등 객관적인 내용도 많이 포함됐습니다. 변호인단은 연락회와 조선학교 관계자들과 모의재판도 진행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잘 아는 분들은 일본 정부의 시각에서 패소 주장을 펼쳤고, 이 문제를 잘 모르는 분들은 승소 주장을 펼치면서 모의재판을 벌였어요. 이를 통해 허점을 잡고 논리를 단단히 굳혀 나갔죠. 언제나 끝나면 반드시 뒤풀이를 했죠.(웃음) 한국 시민단체가 낸 성명서도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조선학교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고, 남북한을 떠나 잘못된 전쟁과 역사의 문제라는 점을 재판부에 설득하기 위해서였죠. 이를 통해 한국이 재일동포 교육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이미지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오사카 1심도 대법원에서 뒤집어졌고 모두 패소했습니다.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에서 보면 매우 아쉽습니다. 오히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확정했어요.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이고, 불법 강점은 한-일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는 게 핵심이죠.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사법부는 이런 역사적인 인식을 통한 판결을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큽니다.”

오사카/정혁준 기자

인터뷰 | 권해효 몽당연필 대표
“작고 소중한 몽당연필처럼…배움 열망 꺾이지 않게”

권해효 몽당연필 대표가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 대표는 자신이 단 배지가 차별에 반대하는 주황색과 일본에서 차별 당한 아이들의 치마저고리를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혁준 기자

시민단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이하 몽당연필)은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다. 지난 13일 서울시 마포구의 몽당연필 사무실에서 권해효 대표를 만났다. 권 대표는 대중에게 잘 알려진 배우다.

―몽당연필은 어떻게 세워졌나요?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이 계기가 됐죠. 미야기·후쿠시마·이바라키현의 여러 조선학교가 피해를 보았어요. 교실 벽이 무너졌고 교육용 컴퓨터도 파손됐죠. 뭔가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마침 조선학교를 다룬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를 찍은 김명준 감독이 제안해서 동갑내기 세명(권 대표와 가수 안치환·이지상)과 여러 많은 분이 뜻을 모았죠. 나아가 공연과 행사를 열어 수익금을 지원하는 데 함께했죠. 처음엔 1년 동안 한시적으로 한 뒤 접을 생각이었어요.”

―1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활동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1년 동안 매달 전국콘서트를 펼쳤고, 1년을 마무리하는 콘서트를 2012년 도쿄에서 열었죠. 이 공연을 마지막으로 정리할 계획이었죠. 그런데 한·일 시민단체, 재일동포 등 많은 분들이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다른 시민단체에서 셋방살이하며 시작했죠. 사실 우리는 좀 색다른 시민단체였죠. 구호도 외치지 않았고, 대신 콘서트 하면서 활동했으니까요. 시민단체 영역에서 보지 못했던 방식이었죠.”

―몽당연필 뜻은 무엇인가요?

“행사를 열려면 주최 쪽 이름이 필요하잖아요. 김명준 감독이 ‘몽당연필’ 이름을 제안했어요. 다들 찬성했죠. 몽당연필이란 게 작고 특별하게 소중한 느낌을 주잖아요. 특히 조선학교는 재일동포들이 배움을 향한 열망을 위해 세운 거니까요. 그래서 더 애틋한 느낌으로 다가왔죠. 배지는 치마저고리를 상징하며 만들었어요. 조선학교 여학생 교복은 치마저고리가 많았는데, 이런 학생을 향한 테러가 많이 일어났어요. 배지는 테러와 차별에 반대하는 의미예요. 배지가 주황색인데 이 색 역시 차별을 반대하는 의미의 색이죠.”

―조선학교 응원 활동을 하면서 일본 시민단체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요?

“만날 때마다 그 열정에 깜짝깜짝 놀라요. 뵐 때마다 나이가 더 들어가고 계시지만, 더 열정적이신 것 같아요.(웃음) 저희도 그 열정을 많이 배워요. 반면 일본 시민단체 분들은 저희를 부러워하기도 하죠. 일본에서 시민단체는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젊은 한국의 시민단체를 보면 젊음이 생각난다고 하세요. 한국의 시민운동이 한국 정치 지형까지 바꿔버리는 것에도 부러워하세요. 이렇게 연대하면서 서로 배우고 있는 거죠.”

―조선학교 지원 활동을 할 때 언제 보람을 느꼈나요?

“조선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고 오는 게 좋았죠. 학교 담 밑에서 아이들과 함께 도시락을 까먹은 것도 기억이 나네요. 조선학교를 살리기 위해 헌신하는 동포를 만날 때가 있어요. 이분들은 ‘내 자식’이라고 말하기보다 ‘우리 아이들’이라고 먼저 말씀하세요.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조선학교 선생님도 자주 보고요. 응원하러 갔다가 제가 위로받고, 제가 응원받고 오는 느낌이 들죠.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돌아보는 계기도 됐죠.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 공동체를 저버리고 자기만의 안위를 위해 살아가는 어른들을 보면서 많은 자괴감이 들기도 했어요.”

―조선학교 법정 투쟁은 모두 패했습니다.

“아쉬움이 크죠.(긴 한숨) 다만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함께 한 응원과 노력이 실패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조선학교라는 존재를 알아주는 일, 그들이 80년 가까이 일본 땅에서 우리 말과 글을 지켜왔던 그 역사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일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게 했으니까요. 조선학교와 아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잊힌 존재가 되지 않기를 계속 지원하고 응원해야겠죠.”

―배우로서 시민단체 활동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가끔 ‘배우나 하지, 왜 다른 일 하냐’고 말하는 분이 계시죠. 하지만 저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많은 분을 만나고 사회 현안도 얘기하면서 좁은 시각으로 살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큰 가르침을 배우고 있어요. 배우로서 제가 하는 일은 사람을 표현하는 일이죠. 다양한 생각과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되면 배우 역할도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죠.”

정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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