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후버 대통령 닮은 현제명, ‘표현파’ 지휘자 홍난파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2. 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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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안석주가 쓰고 그린 음악가 群像…지금 봐도 모던한 캐리커처
만문만화가 안석주가 그린 1930년대 음악가 캐리커처를 한 컷에 담았다.왼쪽부터 테너 안기영, 피아니스트 김영환,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홍난파, 테너 현제명./조선디자인랩 정다운
만문만화가 안석주가 조선일보에 실은 1930년대 음악가 초상을 한 컷에 모았다. 왼쪽부터 1세대 음악가 김인식, 바이올리니스트 최호영, 피아니스트 독고선, '봉선화' 작사가 김형준./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어느 때든지 연미복을 나르는 듯이 입고 옛 임금님의 위력을 보여주는 홀(笏)같이 하얀 종이 조각을 동글동글 말아서 쥐고 가볍게 저으며 청중들의 안전(眼前)에 군림한다. 옥안(玉顔)은 분지(粉紙)로 닦은 듯이 눈이 부시게 빛나나, 파지고 또 여윈 씨(氏)의 양협(兩頰·두 뺨)은 지난 날의 고락을 낱낱이 말하는 듯하지만 안개 자욱한 두 눈은 정열에 반짝인다.’(‘악단인의 철상요태’ 안기영씨’, 조선일보 1931년2월17일)

테너 안기영(1900~1980)을 소개한 만문만화가 석영 안석주(1901~1950)의 글이다. 연희전문 출신 안기영은 1926년부터 3년간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의 앨리슨-화이트 음악학교(Ellison-White Conservatory)에서 공부한 유학파 출신이었다. 1928년 귀국한 그는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1928년 히트곡 ‘그리운 강남’을 작곡했고, 1929년 조선인 첫 가곡집을 발표한 작곡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음악회에서 청중을 사로잡는 성악가로 유명했다. 안석주는 ‘애련한 멜로디로 언제나 청중의 ‘하-트’를 연분홍색으로 물들여주는 이’라고 썼다.

안석주가의 캐리커처를 보노라면, 글보다 역시 그림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연미복 차림으로 종이를 말아쥐고 한쪽 팔꿈치를 기댄 채 아리아를 부르는 안기영의 모습은 노래가 들리는 것처럼 디테일이 생생하다.

안석주가 쓰고 그린 테너 안기영 스케치. 조선일보 1931년2월17일자
안석영이 쓰고 그린 홍난파.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홍난파의 모습을 익살맞게 그렸다. 조선일보 1931년2월19일자

◇표현파(?)식 지휘하는 홍난파

안석주는 1923년 토월회 연극 ‘부활’에서 남자 주인공 네플류도프 공작을 연기한 배우이자 화가, 소설가, 시인 겸 신문기자였다. 1927년 조선일보에 들어온 안석주는 소설 삽화를 그리면서 만문만화로 이름을 날렸다.

‘악단인의 철상요태(凸相凹態)’는 안석주가 1931년 2월 신문에 연재한 기획이었다. 당시로선 신종 직업인 음악가들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서양음악 1세대인 김인식과 김형준을 비롯, 조선의 첫 피아니스트 김영환,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 테너 현제명, 바이올리니스트 최호영, 피아니스트 독고선 등 8명의 음악가들이 등장한다. 촌철살인의 짤막한 글과 함께 그린 캐리커처가 수준급이다. 공연장 안팎에서 이들을 오래 지켜본 관찰자의 시선이 적절히 녹아있다.

홍난파에 대해선 이렇게 썼다. ‘’빠요린’(바이올린)이 코주부들의 턱밑에 끼고 손가락을 떨어야 소리나는 양국(洋國) 깡깡인줄만 알고 일반이 신기해하던 시대에 먼저 ‘유모레스크’를 독주한 이도 씨(氏)인만큼 악단에 있어서 선진인 씨(氏)다.’(홍난파, 조선일보 1931년2월19일)

홍난파를 조선의 첫 바이올리니스트로 평가하면서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그의 문하를 거치지 않은 이가 드물다고 했다. 안석주는 홍난파를 지휘자로도 소개했다. ‘씨가 ‘콘덕터-’의 위(位)에 올라섰을 때에는 씨(氏)의 심령에 통하는 옛날 악성들의 정령의 활동이 격화하야 표현파나 미래파극의 과작(科作)을 볼 수 있는 것이 몹시도 새로워 보이고….’ 표현파, 미래파까지 거론하는 지휘 스타일은 뭔 소릴까. 안석주가 그린 캐리커처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격렬한 춤을 추듯 지휘하는 연미복차림 지휘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안석영이 쓰고 그린 테너 현제명. 미국 후버 대통령 또는 남양군도 사람을 닮았다고 썼다. 조선일보 1931년2월20일자

◇남양군도사람 같은 현제명

‘얼른 보면 미국 통령 ‘후버-’같고 또 어찌 보면 남양군도 사람 같은 남성적이면서 순후해보이는 이가 씨(氏)다. 그러나 ‘굿빠이’ 노래만 할 때에는 어디서 나오는 애교인지 굴곡이 많던 얼굴에 오색꽃이 난만해진다.’(현제명씨, 조선일보 1931년2월20일) 테너 현제명은 우락부락한 얼굴이지만 감정을 담아 노래할 때는 따스한 표정으로 바뀐다고 했다. 하지만 육중한 몸집에 비해 성량은 아쉬웠던 모양이다.

‘씨(氏)는 악단에서 드문 체구이면서 음성이 섬세한 것은 기이한 일이나 모(某)씨 모양으로 콧노래로 시종치않는 것은 씨의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체구에 ‘스키파’이상의 우렁찬 소리가 굴러나왔으면 더 없는 만족일것같다는 사람도 있지만 영양부족인 이 강토의 사람인데야….’

티토 스키파(Tito Schipa·1889~1965)는 이탈리아 테너로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시카고 오페라 주역으로 활약한 성악가다. 유성기 음반을 통해 조선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안석주가 쓰고 그린 피아니스트 김영환. 머리를 피아노에 바싹 붙이고 두 손을 휘두르는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했다. 조선일보 1931년2월18일자.

◇카리스마 넘치는 피아니스트 김영환

‘씨(氏)가 조선말을 하나 일본말을 하나 양국(洋國)말을 하나 어느 말을 하거나 자기만 알 말 같은 독특한 말을 사용하여 난해는 난해이나 눈치빠른 사람이어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 귀에 익지 못하면 고상한 줄 모를 씨의 피아노 독주나 마찬가지일 것같다.’(김영환씨, 조선일보 1931년 2월18일)

조선인 첫 동경음악학교 졸업생이자 조선의 첫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김영환(1893~1978)은 말투가 좀 어물어물했던 모양이다. 안석주는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피아노 연주에 그의 말투를 빗댔다. 또 음악회란 음악회엔 약방 감초처럼 나서는 김영환이 출연 펑크도 잦다면서 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언제나 씨의 출연에는 재청 우삼청’이라면서 연주를 반겼다.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대는 교육가라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안석주의 진가는 역시 김영환을 스케치한 캐리커처에서 빛을 발했다.

‘피아노 칠 때에 머리는 건반에 대다시피 손은 공중에 춤추듯 한다. 이리하여 재박이 쏟아지고야 만다.’ (’삼천리’제4권제7호, 1932년6월)는 기사처럼,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갈퀴처럼 휘두르는 독특한 모습을 그렸다. 안석주의 캐리커처가 눈길을 끌었던지, 월간 ‘동광’은 1932년 1월호에 음악가 특집을 실으면서 이 그림을 다시 실었다.

안석주가 쓰고 그린 1세대 음악인 김인식. 인상쓰면서 노래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조선일보 1931년2월24일자

◇안면 활동이 무시무시한 김인식, 바이올린만 들고있어도 슬픈 최호영

안석주는 약간 과장된 터치로 인물을 묘사하면서 특징을 짚어냈다. 1세대 음악가로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친 김인식(1885~1963)은 짱구머리에 한 손에 부채를 쥔 채 입을 잔뜩 벌린 표정이다. ‘씨(氏)가 독창을 할 때에는 아무리 분장을 잘 하는 배우라도 못따를만치 안면의 활동이 무시무시하다’(김인식씨, 조선일보 1931년2월24일)

홍난파가 이끈 경성방송국 관현악단 바이올린 주자를 맡았던 최호영에 대해선 ‘스타일이나 천생으로 된 그 얼굴이 바이올린을 키지 않고 들고만 섰어도 키고 있는 듯이 그 표정이 슬프면서 급흐다’(최호영씨, 조선일보 1931년2월22일)고 썼다.

안석주가 쓰고 그린 바이올리니스트 최호영. 조선일보 1931년2월22일자

홍난파 가곡 ‘봉선화’ 작사자인 김형준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두루마기를 걸친 노신사로 그렸다. ‘씨(氏)가 근일에 안질이 심한지 캄캄 칠야(漆夜)에도 조고약(趙膏藥) 같은 묵경(墨鏡)을 쓰고 집회에까지 나타나시는 것은 안질이 아니고 변해가는 세태가 꼴같잖아서 풍자적으로 쓰시는지는 몰라도 퀘스천 마크(?)를 사람의 마음 마음에 던져준다.’(김형준씨, 조선일보 1931년2월21일) 김형준은 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아버지이자 홍난파의 이웃 친구였다.

피아노앞에만 앉으면 심각해지는 독고선 캐리커처. 안석영이 그렸다. 조선일보 1931년2월26일자

피아니스트 독고선은 구불구불한 파마 머리에 잔뜩 찌푸리고 연주하는 모습이다. ‘조금도 악감(惡感)을 일으키지 않는 수수한 얼굴이 피아노를 거울로 삼았을 때는 금방 소낙비가 쏟아질듯이 찡그린 하늘 같은데 그의 고운 손이 춤을 출때는 봄날의 궂은 비같이 졸졸졸 흐르는 샘물같이 청아하고 애처롭다.’(독고선씨, 조선일보 1932년2월26일)

안석주의 글과 그림은 직접 만나고 겪은 인물이 아니면 담을 수 없는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캐리커처는 90년이 흐른 지금 봐도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사진만으로 느낄 수 없는 당시 분위기를 헤아릴 수있게 된 것은 순전히 안석주의 작품 덕분이다.

◇참고자료

홍종인, 반도악단인만평, 동광 제22호, 1931.6

채규엽, 인기음악가언파레-트, 삼천리 제4권제7호, 1932.6

신명직, 모던보이, 경성을 거닐다, 현실문화연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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