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격전지 ‘낙동강 벨트’에는 구포국수 맞수도 있답니다
[양세욱의 호모 코쿠엔스] 근현대사 담은 국수 한 그릇
‘낙동강 벨트’에는 지금 매화가 절정이다. 양산 통도사, 김해 건설공고 같은 매화 명소마다 주말 상춘객이 북적일 터이다. 낙동강과 경부선 철로를 배경으로 흐드러진 매화를 조망할 수 있는 양산 원동마을의 축제는 다음 달 9~17일로 예고되었지만, 매화가 기다려줄지 알 수 없다. 길가에 늘어선 청매, 홍매를 길벗 삼아 낙동강 일대를 다녀왔다. 이 계절에 어울리는 구포국수를 찾아 나선 여행이다.
첫 목적지는 낙동강 서편 김해 ‘대동할매국수’다. 한때 궁벽하던 이곳은 남해‧중앙‧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가 둘러싸면서 요지로 바뀌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촬영지인 대동화명대교도 지척이다. 모르는 사람이 드문 맛집답게 주차장은 북적이고 대기 줄은 만만치 않다. 선결제로 물국수(6000원)를 주문하고 배정받은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새 단장을 마친 식당은 넓고 정결하다. 진갈색 제복을 갖춘 직원들의 몸놀림은 민첩하면서도 절도가 있다. 1959년 인근 장터에서 국수를 말기 시작해 60년 동안 주방을 지켰던 1대 주동금 할머니, 조카인 2대 주징청 사장의 흑백사진도 인상적이다.
부추, 단무지, 김을 고명으로 얹은 국수에 양념장을 치고 멸치 육수를 부어 먹는 구포국수는 더는 특별할 게 없는 국수인지 모른다. 중간 굵기의 짭조름한 국수를 쓴다는 점, 부추와 단무지를 듬뿍 얹는다는 점 정도가 특징이랄 수 있겠으나, 화려한 토핑의 다른 국수와 견줄 바는 아니다. 주전자에 담긴 육수 한 모금을 들이켜자마자 이런 상념은 오갈 데 없다. 남해에서 건져 올린 은빛 멸치 떼가 부리는 마법으로 잊혔던 미각이 되살아나고 머리는 아득해진다. 여운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 이 육수는 이토록 매혹적이다.
골목을 벗어나 낙동강을 거슬러 북으로 달린다. 낙동대교 너머 밀양 삼랑진에 두 번째 목적지 ‘태극기가 펄럭입니다’가 있다. 경전선 낙동강역 옆 허름한 식당이다. 라이더들이 몰려드는 때가 아니라면 한적한 이곳은 낙동강 맞은편 대동할매국수와 여러모로 대조를 이룬다. 저편이 톱스타라면 이편은 은둔 고수다. 상호처럼 높게 펄럭이는 태극기가 아니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지도에서조차도 ‘강촌국수쉼터’로 입력해야 찾을 수 있다.
삶은 달걀을 까며 주변을 살핀다. 벽면 낙서가 늘었을 뿐 변한 게 없다. 언제부턴가 아들이 주방에서 주인 아주머니를 도우면서 불규칙하던 영업 시간도 매일 오전 열한 시부터 오후 네다섯 시로 자리를 잡았다. 10여 년 전 이맘때, 우연히 들렀다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작이 있었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없는 숙취까지 불러내 해소할 법한 개운한 국물이었다는 기억만은 또렷하다. 이번 국수(6000원)는 단무지 대신 호박 채가 고명으로 올라왔지만 그윽한 육수는 여전하다.
종착지는 구포역이다. 구포역, 구포국수체험관(지난달부터 영업을 잠정 중단한 상태다), 구포시장으로 이어지는 구포만세길이야말로 구포국수의 요람이다. 1919년 3월 29일 구포장터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이름이다. 지금도 1만 명 안팎의 부산 서부와 경남 동부 주민들이 이용하는 구포역 일대는 일찌감치 인근 농수산물의 집산지였다. 1905년 경부선 개통 이후 황해도 사리원에서 재배된 밀이 구포를 거쳐 일본으로 실려갔고, 1955년 이승만 정부가 미국과 체결한 ‘미국 공법 제480호’에 따라 부산항으로 들어온 미국산 밀은 근처 제분, 제면 공장에서 가공을 거쳤다. 낙동강 하구와 옥상 빨랫줄에 하얀 국수를 널어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에 말리던 지난날은 이제는 사진으로 남은 아득한 풍경이지만, 구포국수는 이런 시절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최근 부산 북구청은 도시재생을 위해 구포만세길을 밀당거리로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수제 밀맥주 ‘구포만세329′를 마실 수 있는 ‘밀당브로이’, 구포 밀로 파스타와 빵을 만드는 스페인 식당 ‘프린체’와 베이커리 ‘제과점빵’이 차례로 문을 열면서 구포역 주변은 밀 거리이자 맛집 거리로 탈바꿈하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낙동강 벨트가 달아오르고 있다. 의석수도 적지 않거니와 전체 판세를 이곳에서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과 허물없이 국수를 나누며 지역의 지나온 날과 함께할 날들을 고민하는 일꾼들로 아홉 의석이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 낙동강 벨트
한국 정치 용어 중 하나. 지역적으로 서부산과 김해·양산 등 동부 경남을 일컫는다. 모두 낙동강을 끼고 있거나 인접해 있는 곳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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