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 준 판사[광화문에서/유성열]

유성열 사회부 차장 입력 2024. 2. 23. 23:42 수정 2024. 2. 24.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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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부산지법 동부지원 법정.

박 판사가 탄원서를 읽는 동안 피해자들은 하나둘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최 씨를 법정에서 내보낸 박 판사는 방청석에 앉아 있던 피해자들에게 "잠깐 할 말이 있으니 그대로 계셔 달라"며 이렇게 당부했다.

박 판사의 진심 어린 위로와 당부가 피해자들이 눈물을 닦을 수 있는 힘이 돼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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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열 사회부 차장
지난달 24일 부산지법 동부지원 법정. 형사1단독 박주영 부장판사가 이른바 ‘무자본 갭투기’로 전세사기를 벌인 혐의를 받는 50대 여성 최모 씨에 대한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최 씨는 오피스텔 등 건물 9채를 사들여 세입자 229명에게 보증금 180억 원을 받은 뒤 돌려주지 않은 혐의(사기 등)로 재판에 넘겨졌다.

박 판사는 먼저 “선고 내용이 길다”며 공지한 뒤 피해자 40여 명이 제출한 탄원서를 하나하나 요약해 읽어갔다. 40대 중반에 전세금을 마련해 독립했다가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는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 같다”고 자책했고, 결혼을 앞둔 피해자는 상견례 전날 파혼을 당했다. 부모님이 전세금에 보태라고 준 1600만 원을 고스란히 날린 딸도 있었다. 박 판사가 탄원서를 읽는 동안 피해자들은 하나둘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탄원서를 다 소개한 박 판사는 “이 사건의 주된 책임은 자기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임대사업을 벌인 피고인에게 있다”고 최 씨를 꾸짖으며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보다 2년 더 많은 형이었다. 최 씨를 법정에서 내보낸 박 판사는 방청석에 앉아 있던 피해자들에게 “잠깐 할 말이 있으니 그대로 계셔 달라”며 이렇게 당부했다.

“절대로 여러분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지극히 평범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입니다.”

박 판사의 당부는 한동안 계속됐다. 박 판사는 “한 개인의 욕망과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이라며 “결코 여러분이 뭔가 부족해서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 달라”고 했다. 이어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나날이겠지만, 빛과 어둠이 교차하듯 암흑 같은 시절도 다 지나갈 것”이라며 “여러분의 마음가짐과 의지에 따라서는 이 시련이 여러분의 인생을 더욱더 빛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엄중한 모습으로만 생각했던 판사의 위로와 당부에 법정은 눈물바다가 됐다. 재판이 끝나고 법정을 나서던 한 피해자는 “형량보다도, 우리의 잘못이 아니란 걸 인정받았다는 점이 큰 힘이 된다”고 했다. 박 판사의 진심 어린 위로와 당부가 피해자들이 눈물을 닦을 수 있는 힘이 돼 준 것이다. 박 판사는 지난해 12월 특수협박 혐의로 기소된 50대 노숙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건강을 챙기고 어머니 산소에 꼭 가보라”며 현금 10만 원과 중국 작가 위화의 대표작 ‘인생’을 선물하기도 했다. 보호관찰소가 재판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피고인이 평소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는 게 취미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 법과 판결이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 법을 해석하고 사법적 판단을 내리는 법관이 감정과 도덕에 휘둘린다면 법적 안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 하지만 법관은 범죄 피해자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기대고 의지하는 버팀목이다. 가해자를 엄단하면서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 주는 박 판사 같은 법관이 많아진다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훨씬 단단해질 것이다.

유성열 사회부 차장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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