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이승만 아들 행세하며 극진한 대접받은 백수 청년…'가짜 이강석 사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2일 방송된 '황태자와 찰리 채플린'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개그맨 김진수, 배우 이영진, 가수 청하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특종을 찾아라
때는 1957년 9월 18일 대구지방검찰청. 한 남자가 초조한 얼굴로 시계를 보고 있어. 그의 이름은 김시열. 대구매일신문의 신입 검찰 출입기자야. 기사 마감 시간인 낮 12시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아직 쓸 만한 기사거리를 못 건졌어. 김 기자는 뭐라도 하나 건질 게 없나 해서 조심스럽게 부장검사실에 들어섰어. 지금은 힘들지만 그때만 해도 기자가 부장검사실도 드나들고 그랬어.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해. 부장검사가 뭔가 어이없는 일이 있다는 듯, "기가 막혀서 원. 이런 바보 같은 것들. '각하'가 뭐야. 그걸 못 알아차리나"라며 중얼거리고 있어. 김 기자는 촉이 딱 왔어. 그래서 슬그머니 다가가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바보들 같이"라고 부장검사의 말에 맞장구를 쳤어. 그제서야 김 기자를 본 부장검사가 흠칫 놀라며 "어? 벌써 조사가 끝났나?"라고 말했어. 김기자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알고 있는 것처럼 적당히 얼버무렸어. 그러고 반응을 기다리는데, 부장검사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질 않아. 시계를 보니 11시 50분, 이제 마감이 10분도 안 남았어. 김 기자는 슬그머니 부장검사실을 빠져나와. 그리고는 막 뛰었어. 어디로? 검사실로. 누군가 조사를 받는다면, 지금 검사실에 있을 테니까.
검사실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안면이 있는 박 검사가 어떤 청년을 심문하고 있어. 김 기자가 당시 상황에 대해 적은 글이 있어.
"수갑 찬 청년을 앞에 두고 나직이 묻고 있는 박찬 검사 쪽으로 다가섰다. '병역법 위반 강성병, 22세'란 것만 어깨너머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박 검사는 나를 발견하자 필요 이상의 당황한 빛을 보이며 서류를 황급히 덮어 버렸다. '병역법 위반' 사건치고는 그 당황하는 빛이 이상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땡삐의 분노' 161쪽 내용 中
김 기자는 거기서도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능청스럽게 행동했어. 그러자 박 검사의 눈이 더 커져. 이제 결정타를 날릴 때야. "하~ 참 바보 같은 사람들. '각하'가 다 뭐랍니까?"라며 아까 부장검사에게 주워들은 말을 툭 던졌어. 그러자 제대로 먹혔어. 박 검사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해. 그러더니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떠밀어. 김 기자는 검사실에서 쫓겨났어.
시계를 보니 마감 5분 전이야. 아직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어. 유일한 단서는 '각하'라는 단어뿐이야. 김 기자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부장검사실로 달려갔어. 그리고는 "박 검사가 조사하는 강성병 말입니다. 기소는 언제 합니까?"라며 검사실에서 본 걸 토대로 질문을 툭 던졌어. 그리고 "대체 '각하'라고 한 게 누굽니까?"라고 가장 묻고 싶은 걸 물었어.
마침내 부장검사가 굳게 다문 입을 열기 시작해. 그리고 김 기자는 직감해. '내가 지금 일생일대의 특종을 마주하고 있구나'라고.
▲ 경주에 뜬 황태자
부장검사의 이야기는 지난달로 거슬러 올라가. 1957년 8월 21일, 강력한 슈퍼태풍이 남해안에 상륙했어. 7호 태풍 아그네스가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거야. 경상도 지방이 특히 피해가 컸어. 인명피해가 무려 486명, 4만 명이 넘는 이재민이 길바닥에 나앉았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 거야.
수해 복구에 한창이던 8월 30일 금요일 저녁 7시. 경상북도 경주에 막 도착한 시외버스에서 한 청년이 내려. 하얀 난방에 황색 바지, 카메라 가방을 멘 이 청년. 나이는 스무 살 갓 넘어 보여. 이 청년으로 인해 경북일대는 또 한 번 발칵 뒤집히게 돼. 이 청년은 슈퍼태풍보다 강력한 메가톤급 태풍을 몰고 와.
저녁 8시 반. 차를 마신 중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방을 나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서장님 되십니까?"라고 불러. 돌아보니 새파랗게 젊은 놈이 서 있어. 아까 터미널에 내렸던 그 청년이야. "내가 서장인데, 그쪽은 뉘시오?"라고 물었어. 그런데 이어지는 청년의 말에 헉! 하얗게 질리고 말아. 이렇게 말했거든.
"나.. 이강석이오."
'이강석'이란 이름, 혹시 들어본 적 있어? 이강석이 누구길래, 경찰서장이 화들짝 놀란 걸까. 이 사진을 봐.
가운데 있는 청년이 바로 이강석이야. 그 뒤 왼쪽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앉아있어.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시 세 번째 대통령을 맡고 있었어. 명실상부 대한민국 권력 서열 1인자야.
이강석의 오른쪽 뒤에는 국회의장 이기붕과 부인 박마리아 여사야. 이기붕 의장은 자유당의 실세로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꼽혀.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렸어. 경무대는 대통령이 있는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용산 대통령실이야. 당시 이기붕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지.
대한민국 넘버 원, 넘버 투를 배경으로 둔 이강석. 그의 정체는 이기붕 의장의 장남이야. 그런데 그해 3월 26일. 이 대통령의 82번째 생일날. 이기붕 의장이 깜짝 놀랄 선물을 준비해. 바로 자신의 장남을 선물한 거야. 이 대통령은 이강석을 양자로 입양했어. 이 대통령의 측근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어.
"이 대통령은 휴전 이후 다소 한숨을 돌리게 되자 자녀가 없음을 비관하는 말을 내비치곤 했었다. 일선의 군부대를 순시하는 도중 이름 없는 무덤들과 마주치면 '저 묘는 어떤 후손이 지켜주고 있을까?'라며 감상에 젖어드는 장면을 몇 차례 볼 수 있었다."
그런 이 대통령을 위해 이기붕 의장이 장남을 내준 거야. 여기에는 정치적으로 중대한 의미가 숨겨져 있어.
"이 대통령의 양자 입적문제는 사실상 개인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으나 그 여파는 정계에 중대영향을 던져주고 있는 것으로, 이기붕 의장의 위치는 반석으로 굳어졌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반면에 바로 엊그제까지도 권토중래를 자랑하고 있던 타 일파의 꿈은 완전한 백일몽으로 끝났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유당 내의 세력싸움은 이로써 끝을 맺다."
-동아일보 (1957.3.28)
정치적인 관계를 넘어 이제는 한가족이 됐어. 이강석은 대한민국 2인자의 장남이자, 1인자의 양자가 된 거야. 그 당시 대통령은 지금과는 의미가 달랐어.
"이승만 대통령은 그 세도라든가 권위라든가 이런 것이 옛날에 왕 못지않다고… 이기붕이 그 아들놈이 청와대에 가 가지고 동궁마마 같은 대접을 받았다. 동궁마마 이상일 수도 있지."
- 김진배, 前 경향신문 기자
심지어 대통령에게 '각하'라는 호칭 대신 '전하'라고 부르기도 했대. 그런 이 대통령의 양자가 된 거야. 사람들은 이강석을 '대한민국의 황태자'라고 불렀어.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 넘버 쓰리', 3인자라고도 했어. 불과 스무 살 된 청년이 엄청난 위세를 누리게 된 거야.
그럼 이강석, 그는 어떤 인물일까? 직접 만났던 분에게 들어봤어.
"4층짜리 옛날 일제시대 때 만든 빌딩이 하나 있었어요. 거기서 마침 '반공 전시회'를 한다, 우리 한 번 구경 가자 했죠. 그래서 지인을 따라서 갔는데, 들어가서 보고 있는데, '강석아!' 하니까 누가 확 달려오더라고요. '아이고 형님 오셨습니까?' '저 이강석입니다'… '자주 만나야 되겠군요. 언제든 기회 있으면 자주 만납시다' 거기서 인사를 하고… 이강석이 인상은, 키는 조금 조그마하지만 똥똥하고 아주 말도 또박또박하고 사람이 총명하구나. 머리가 좋겠다. 앞으로 무슨 일이든지 하여튼 뭔가 한자리 하겠구나..."
-이성춘, 前 한국일보 기자
이강석은 간부교육을 받고 육군 소위로 임관해. 이건 금수저를 넘은 다이아몬드 수저야. 그런데 그런 이강석이 불쑥 경주에 나타난 거야. 황태자를 마주한 경찰서장, 어떤 심정일까? 서장은 그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어.
"아이고~ '귀하신 몸'이 어찌 홀로 오셨습니까?"
경찰서장은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해. 이강석은 "아버님의 분부로 경주지방 수해 상황을 시찰하러 왔습니다. 지방 관리들의 비리도 내사할 겸 비밀리에 온 것이니 새어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주십시오"라며 암행어사처럼 신분을 숨기고 왔다고 말했어.
"새파랗게 아들뻘 되는 녀석한테 '여기 왕림해 주셔서 가문의 영광입니다' 뭐뭐 하면서 온갖 아첨과 아부를 하는 거지."
-이성춘, 前 한국일보 기자
꼬투리라도 잡히면 바로 목이 달아날 판이야. 하지만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서장은 황태자의 방문을 절호의 기회로 삼기로 해.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제가 모시겠습니다"라며 이강석을 여관으로 데려가. 여관에서도 극진하게 모셨대. 하지만 서장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어. 자기가 모시는 이 청년, 실은 이강석이 아니라 가짜라는 걸.
▲ '가짜 이강석' 강성병
이강석을 사칭한 이 청년의 진짜 이름은 강성병. 아까 박 검사가 병역법 위반으로 신문하고 있던 그 청년이야. 강성병은 연이어 대학입시에 떨어지고 집안 형편도 급격히 나빠졌대. 방학 때마다 고향을 찾아오는 대학생들을 보며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돼. 자기도 보란 듯이 출세하겠다며 집을 나간 뒤로 소식이 끊겼어. 그런 그가 이강석 행세를 하며 경주에 나타난 거야. 강성병은 왜 이강석을 사칭한 걸까?
"집에서도 버린 자식으로 내버리니까 뛰쳐나와 가지고 떠돌이 생활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강석이가 (양자가) 됐다는 얘기를 하고 보면서 '아, 이 관리들이 이강석이라면 부들부들 떨 거 아니냐' 그러니까 이거 한 번쯤, 자기가 가짜 이강석이 역할로서 이른바 부패 관료들, 이 관료시스템을 완전히 큰 충격을 줘야 되겠다..."
-이성춘, 前 한국일보 기자
그런데 가짜라는 게 금방 탄로 나지는 않을까? 강성병은 평소 "이강석과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해. 정말 닮았는지 직접 비교해 봐.
왼쪽이 이강석, 오른쪽이 강성병의 모습이야. 어때? 요즘처럼 인터넷이 있는 시대가 아니잖아. 신문 속 작은 사진만 보고는 알아차리기 힘들 것도 같아. 그리고 강성병은 고등학교 때 연극을 해본 경험도 있었대. 이참에 대담한 연극을 해 보기로 결심했던 거야.
이튿날 오전, 경찰서장은 물론, 경주시장까지 강성병의 숙소로 찾아와. 그리고 이강석을 사칭한 강성병에게 "영감님. 편히 주무셨습니까?"라고 문안 인사를 올리고는 진수성찬을 대접해. 식사를 마치고는 직접 불국사 관광까지 시켜줘. 그게 끝이 아냐. 안마기, 인형, 수건, 책 등 기념품까지 한아름 안겨줘. 어떻게든 이강석 눈에 들려고 애들을 써. 마지막으로 나란히 기념사진도 찍어. 황태자와 찍은 인증사진을 대대손손 남겨야 되니까.
헤어지기 전 강성병은 경찰서장에게 "덕분에 아버지의 분부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해. 그러자 서장이 슬쩍 이런 말을 해. "듣자 하니 치안국 통신과장 자리가 비어있다던데요"라고. 그 자리에 꽂아 달라는 청탁이지. 강성병은 "한번 알아보지요"라고 화답했어. 서장은 강성병의 이야기에 기뻐하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모셔. 그의 다음 행선지가 영천이란 말에, 공무에 쓰는 관용 지프차를 턱 내놓으며 운전기사까지 붙여줘. 덕분에 강성병은 편안하게 영천으로 갔어.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야. 영천에 도착하니 경무계장이 맞이해. 경주 경찰서에서 미리 알린 거야. 그런데 경무계장이 강성병을 보자마자 "지난달에 제가 동생 강욱 군을 직접 모신 적이 있는데요"라고 말해. 강욱은 이강석의 친동생이야. 그 동생을 직접 만났다는 거야. 이러다가 정체가 탄로 나는 건 아닐까?
그런데 경무계장은 "강욱 군과 꼭 닮으셨습니다. 한눈에 알아봤지 뭡니까"라며 웃어 보여. 아예 의심조차 안 해. 강성병은 영천에서도 극진한 환대를 받았어. 다음 행선지인 안동으로 떠나기 전, 경무계장이 스윽 돈을 내밀어. 가는 길에 여비로 쓰라고 서장님이 줬다며.
그때는 화폐 단위가 '원'이 아니라 '환'이었어. 봉투에 든 돈은 만환. 1957년 당시 소고기 한 근이 509환이야. 만환이면, 약 소고기 20근 값이야. 60명이 소고기로 회식할 수 있는 액수야. 그리고는 경무계장이 관용 지프차로 안동까지 경호해 줘. 슬쩍 이런 말도 해. "영감님. 경무대 수행계장 자리가 나면 어떻게 좀..." 다들 기회를 붙잡고 싶어서 안달이야.
이런 모습을 보며 강성병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작태가 우습기도 하면서 한편 자신감이 생기더래. "내가 저들의 약점을 쥐고 있는 셈이니 나를 함부로 체포하지는 못하겠구나"라고. 강성병의 연극은 더욱 대담해지기 시작해.
그날 저녁 안동에서도 융숭한 대접이 이어져. 진수성찬에, 안동 최고의 여관도 잡아줘. 숙소 앞에는 경관들이 밤새 경호를 서. 완전 V.I.P 대접이야. 그렇게 둘째 날 밤이 가고 다음날이 밝았어. 아침 8시부터 여관방 앞이 웅성웅성해. 안동 군수, 읍장 등 유지들이 아침 문안인사를 온 거야.
한참을 기다리니 귀하신 몸이 문을 열고 나와. 그러자 관등성명을 대며 아침 문안인사를 올려. 이건 뭐 말만 하면 뭐든 갖다 바칠 판이야. 강성병은 안동의 은행지점장을 만난 자리에서 슬쩍 이런 말을 꺼냈어.
"수해 이재민들에게 구호품으로 백미 20가마를 배급했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이건 대놓고 돈을 달라고 하는 거야. 지점장의 반응은 어땠을까? 누구 안전이라고 거부해? 일요일인데도 바로 20만 환을 가져다가 바쳐어. 여비로 쓰시라며 안동군수는 5만 환, 읍장은 만 오천 환을 찔러줘. 진짜 말만 하면 돈이 굴러들어 와.
강성병은 내친김에 봉화에도 갔어. 똑같은 말을 했더니 또 20만 환을 가져와. 그렇게 40만 환이 훌쩍 넘는 거금을 챙기고 나니 이제 슬슬 판을 접을 때가 된 거 같아. 꼬리가 길면 밟힐 수도 있으니.
▲ 정체가 들통나기까지
강성병이 "이제 서울로 올라가야겠다"고 하자, "서울엔 어떻게 가시려 하냐", "저희가 배웅해 드리겠다"며 이 사람들이 도무지 떨어지려고 하질 않아. 강성병은 "안동에서 기차를 타고 원주를 거쳐 서울로 갈까 한다"라고 계획을 밝혔어. 그러자 기차 침대칸은 다 팔렸고 2등칸 밖에 없대. 천하의 이강석이 2등칸을 탄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럼 다들 의심할 테니까. 강성병은 "그럼 대구로 가서 내일 특별비행기 편으로 올라가겠다"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이 사람들, 대구까지 또 차로 모시겠대. 다들 깍듯하게 경호를 하면서 강성병을 혼자 두지를 않아. 할 수 없이 마련해 준 지프차를 타고 대구로 가기로 해. 점점 꼬리가 길어지고 있어.
대구를 향해 가고 있는데 뒤에서 웬 지프차가 엄청난 속도로 쫓아와. 차창 밖으로 정지신호를 보내더니 앞을 가로막아. 지프차에서 누가 내리는데 모자에 별 하나가 번쩍! 안동 지역의 군 사단장 박 준장이야. 이강석이 군 간부 교육을 받던 시절 교장으로 있던 인물이야. 다시 말해 이강석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인 거지.
박 준장이 뚜벅뚜벅 강성병이 탄 차로 다가와. 그리고 강성병을 보더니 어깨를 탁 붙잡아. 박 준장은 뭐라고 했을까?
"박 준장은 가짜 이강석 군인 강성병이 사단지역을 지나간 것을 알고 뒤쫓아가서 어깨를 치며 '자네가 여기까지 와서 나를 보지 않고 갈 수 있느냐'고 친근한 인사를 한 후 정중히 대하였다고 하며 부관을 파견하여 강성병을 호송까지 하였던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동아일보 (1957.10.13)
박 준장은 강성병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 소위! 아버지의 명으로 시찰하느라 참으로 노고가 많네"라고 치하해 주고 갔대. 이강석하고 닮긴 닮았나 봐. 다행히(?) 위기를 넘기고 지프차는 다시 대구로 향해.
하지만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칠곡에 들어서니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경북도경 사찰과장이 대구에서 마중을 나온 거야. 안동 경찰서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는 부랴부랴 달려왔어. 강성병이 가는 곳마다 난리법석이야.
일이 점점 커지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언제 들통날지 몰라. 불안해진 강성병은 버럭 소리를 질러. "이 사람들이! 절대 비밀로 하랬더니! 대체 누가 소문을 낸 거요!"라고. 하지만 도무지 빠져나갈 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사찰과장의 차에 올라. 사찰과장은 "경북도지사 관사까지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했어. 도지사라니, 강성병을 만나는 인물의 지위가 점점 올라가고 있어. 경북도지사는 다음 내무부 장관으로 예정된 인물이야. 그는 진짜 이강석의 얼굴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고민하던 강성병은 "아무래도 오늘 밤차로 서울에 올라가야겠습니다. 대구역으로 가주시죠"라고 말했어. 근데 과장은 "대구역에 도착할 때면 열차가 끊길 것 같은데요"라고 해. 이미 시간이 꽤 늦었거든. 강성병은 "가보기 전에 어찌 압니까? 빨리 대구역으로 갑시다!"라고 보채며 차를 달려 대구역에 도착했어. 하지만 이미 기차는 끊겼어.
과장은 지사 관사로 가자고 했어. 점점 막다른 길로 내몰리고 있어. 강성병은 "경북도지사는 내무부 장관으로 내정돼 있으니, 아버님께서 절대 만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라며 지사 관사가 아닌 경찰국장 관사에 머물겠다고 했어. 어떻게든 도지사와의 만남은 피해야 하니까. 그런데 돌아오는 과장의 대답은 "경찰국장은 지금 청도로 출장 중입니다. 환영만찬을 준비해 놨으니 지사 관사로 가시지요"야. 외통수야. 이젠 방법이 없어. 그렇게 강성병은 마지못해 경북도지사 관사로 가게 돼.
"당시 경북도지사는 이근직 씨라고, 이 분이 수해복구를 지휘하느라고 그 현장에 나가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자기 관저에 이강석이가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온 거지. 도지사나 장, 차관 되면 경무대에 이런저런 회의나 행사 때문에 자주 올라가거든. 갈 때마다 이강석이를 봤단 말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얼굴도 알고, 자기 큰아들이 이강석이하고 동창이야. 멀리서 보니까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다 이거야. 그래서 그 도지사가 직접 만나기는 좀 뭐하니까, 아들을 불러가지고 '니가 니 친구인 강석이가 맞는지 진짜 뭐 때문에 왔는지 한번 물어봐라'…"
-이성춘, 前 한국일보 기자
강성병은 경주에서부터 3일간 같은 옷을 입고 있었어. 이 지사가 보기에, '구겨진 난방차림의 저 청년이 이강석이라고?'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거야. 이 지사는 자신의 아들을 불러서 "저 안에 있는 게 이강석이 맞는지 확인 좀 해다오"라고 말했어. 아들은 강성병이 있는 곳으로 갔고, 그를 보고는 깜짝 놀라.
"저놈은 강석이가 아닙니다. 가짜예요!"
결국 강성병은 체포되고 말아. 그렇게 사상초유 사기극은 3일 만에 막을 내리게 돼.
▲ 채플린의 공판
이건 강성병이 이동한 동선이야. 대구에서 경주로 넘어가서, 영천, 안동, 봉화, 다시 대구까지, 경북 일대를 종횡무진하며 고관들을 농락한 거야.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한 백수 청년의 연극에 속아 고개를 조아리고 거금을 바친 지방공무원들. 그야말로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해. 대구지검은 이 사건을 극비로 수사했어. 그러던 중 마감에 쫓기던 한 신입 기자에게 꼬리를 잡히고 만 거야.
이미 마감시간이 지났지만, 김 기자는 신문사로 부리나케 달려가. 그리고 그날 저녁 신문에 이 기사가 실리게 돼.
김 기자는 특종 상금으로 3만 환을 받았어. 이 기사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거든. 실화라고 믿기 힘든 이 막장 코미디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놨어. 연일 후속보도가 이어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돼. 이 소식을 들은 진짜 이강석의 반응은 어땠을까?
"서울 모 고위층은 이 사건에 격분하여 '엄중조사, 처단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며 진짜 이강석 군 역시 몹시 분개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사기당한 각 경찰서장들도 진술서에서 '악질적'이라고 말하고 '엄중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땡삐의 분노' 169쪽 내용 中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가짜 이강석 사건. 공판이 열리는 날, 대구법원에는 사상 유례없는 인파가 몰려.
천 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면서 법정 안은 콩나물시루야. 창문을 넘어 들어온 사람들이 검사석 옆까지 들어찼어. 의자들 반이 넘게 부서지고 판사의 법복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해. 모두 강성병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거야.
왜 이강석을 사칭했냐고 묻자 강성병은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이강석 행세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답해. 바로 이 기사야.
"서울시내 명동파출소에 들어선 젊은 청년 한 사람. 군복에 검은 테 안경을 쓴 으리으리한 차림인데 때마침 파출소에 주재하는 김 모 육군 헌병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알자 '근무 중에 낮잠이 뭐냐!'고 다짜고짜 뺨을 후려갈겨. 헌병 당국에선 백차가 동원되고 영관급 장교까지 현장에 급거 출동하는 등 소동을 일으켰으나 청년의 신원을 알게 되자 모두들 긴장, 그다음부터는 입을 꼭 다물고 '쉬쉬'. 청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대통령의 양자 이강석 군이었다는 것이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
-동아일보 1957.8.3.-
기사만 봐도 이강석의 위세가 대단하지? 강성병은 "헌병의 뺨을 때려도 아무 일이 없는 걸 보면, 이강석 행세를 하면 뭘 하든 통하리라 믿었습니다"라고 답했어. 판사의 질문은 계속됐어. "경주에 갔을 때 피고인을 보고 뭐라고 하던가?"라고 물었어.
"귀하신 몸이 어찌 홀로 오셨냐고 하더이다."
방청객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어. 판사는 다시 "피고인을 부를 때 뭐라고 부르던가?"라고 물었어.
"'영감'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각하'라고 부릅디다."
강성병이 입을 열 때마다 방청객들은 빵빵 터져. 강성병은 고관들의 추태를 낱낱이 폭로했어. 금품을 안겨주며 영전을 부탁했던 일도 폭로해. 그러고는 카운터펀치를 날려.
"내가 만일 간첩이었다면, 저 서장이나 고관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법정 안은 웃음소리, 박수소리가 끊이질 않아. 오죽했으면 판사가 "조용히 하시오. 여긴 극장이 아니오!"라고 외칠 정도였어.
공판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강성병은 통렬하게 비판했어. 지금 심경이 어떻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해.
"권력이란 게 진짜 좋더군요. 몸소 체험하고 나니 그저 놀랐을 뿐입니다. 할리우드 같으면 내 연기에 60만불 정도는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연기료 대신 벌을 받게 됐지 뭡니까?"
농담까지 하고 아주 여유만만 해. 한 기자가 "당신한테 속은 고관들이 시국적 악질범이니 엄중 처벌해 달라고 했다는데요?"라고 말하자 강성병은 통렬한 한 마디를 남겨.
"내가 시국적 악질범이면, 나에게 아첨한 서장, 군수들은 시국적 간신배들이오!"
그가 내뱉은 말들은 고스란히 기사화돼서 세상에 알려져.
"가짜 이강석, 강성병 군은 새로운 타입의 풍자가라고 하고 싶다. 아닌 게 아니라 그만하면 채플린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요. 강 군은 무대 아닌 실지에서 연극을 한바탕 멋있게 연출 겸 연기까지 하였으니, 법정신에 입각하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자비를 베풀어 주면 어떨까."
- 경향신문 1957.10.17. -
강성병을 코미디 배우이면서 사회를 풍자했던 찰리 채플린에 비유한 거야. 민심은 강성병에게 호의적이었던 것 같아. 덕분에 높은 관리들의 부패상이 드러났으니 상을 줘야 된다, 13년간 묵혔던 체증을 풀어줬다, 이런 말까지 나왔다고 해. 1957년은 자유당의 위세가 대단했던 때야. 대놓고 욕 한번 못하던 때야. 이참에 맘껏 비웃을 수 있으니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어.
그러면 한국의 찰리 채플린, 판결은 어떻게 나왔을까?
'귀하신 몸에 징역 10월'
강성병은 징역 10월을 선고받았어. 또 명예를 실추시킨 서장들은 모두 징계를 받았어. 그리고 가짜 이강석 사건은 당대의 유행어를 만들어내. '귀하신 몸'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가짜 이강석 사건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야. 하지만 한 발 떨어져서 보면 비극이기도 해. 당시 권력에 아부하는 고관들의 작태, 얼마나 부패한 시대였는가를 보여준 사건이었거든.
▲ 최악의 부정선거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면 당시 시대상을 알아야 해. 이승만 정권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현재 대한민국의 기틀을 잡는데 큰 공을 세운 건 맞아. 그런데 10년 넘게 집권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돼. 그러다가 이런 가짜 이강석 사건도 일어난 거지.
그로부터 3년 후인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열리는 날이야. 이 선거는 훗날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불리지. 바로 '3.15 부정선거'야. 이때 자유당에서 내건 대통령 후보가 이승만 대통령. 네 번째 집권에 나선 거야.
"이 박사로선 생각하는 게 자기 한 몸도 한 몸이지만 내가 없이는 나라가 보전이 안 된다. 쉽게 말하면 '김일성한테 맡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고..."
-김진배, 前 경향신문 기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러닝메이트였던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는 만송 이기붕 의장이야. 이강석의 두 아버지가 나란히 정,부통령 선거에 나선 거야. 자유당 입장에서는 반드시 두 사람 모두 당선돼야만 해. 왜냐? 이승만 대통령의 나이 때문이야.
"이 박사로선 그때 벌써 나이가 80이 다 넘었는데. 당신이 돌아가시면 바로 부통령이 계승하는데, 이건 어떤 사람도 안 되고 이기붕 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야."
-김진배, 前 경향신문 기자
이때 이 대통령의 나이가 85세였거든. 그땐 평균수명도 길지 않았어. 환갑만 넘겨도 천수를 누린 거라 하던 시절이야. 이기붕이 부통령이 되어야 자유당이 계속 권력을 쥘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이건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에서 펴낸 책자야. 제목은 '민족의 해와 달'. '해와 달'은 누굴 가리키는 말일까? 맞아, 이승만과 이기붕.
첫 장에 이승만 대통령, 다음장에 이기붕 의장의 사진이 나와. '민족의 해와 달'은 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야.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후계자 이기붕의 권력 승계 구도를 만들려는 거지. 당시 자유당 강경파인 최인규 내무장관은 이렇게 지시해.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무슨 수를 써서든 두 사람을 당선시켜!"
그렇게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최악의 부정선거가 시작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셋이다, 그럼 우리가 3인조가 되는 거예요. 3인조가 같이 들어가 가지고는 '우리 누구 찍자' 이렇게 할 뿐만 아니라, 공개를 하는 거야. 보여주는 거야. 그렇게 공개투표를 하는 거야… 나중에는 어떠냐면 이놈의 게 유권자 수보다 많아져 버린 거야."
-김진배, 前 경향신문 기자
"요즘 투표소, 개표소 가면 '참관인' 있죠? 정당 참관인들. 경찰이 깡패들을 시켜서 공갈, 협박해서 다 내쫓아버렸어. 자기네 여당 후보 투표용지 30~40%를 사전투표 해 가지고 마음대로 도장 찍어서 집어넣어 가지고, 거기다 갖다 놓는 거."
-이성춘, 前 한국일보 기자
투표하러 갔더니 누가 내 이름으로 벌써 투표를 했어. 어느 지역은 유권자수보다 득표수가 더 많이 나왔어. 진짜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부정을 저지른 거야.
"대통령에는 자유당계 입후보자이신 이승만 박사가 총 유권자수의 86%인 963만 3376표로써 당선이 확정되고, 부통령에는 또한 자유당계의 이기붕 씨가 총 유권자수의 74.5%인 833만 7052표를 얻어서 당선됐습니다."
-당시 뉴스
이로써 자유당은 장기집권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하지만 이 선택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아. 부정선거를 목격한 국민들이 들고일어났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 역사의 심판
"애국에 피 끓는 우리 청소년 학도들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시위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당시 뉴스
서울 시내에서 대학생 10만 명이 들고일어났어. 이날이 바로, 4월 19일이었어. 4.19 혁명의 시작이야.
"국회의사당과 중앙청 앞을 지나 경무대로 향하던 서울의 학생 데모대들은 그들을 막으려는 경찰관들과 충돌했습니다. 학생 데모대를 해산시키고자 경찰은 방화수와 최루탄을 사용했으나 학생들은 과감하게 이를 물리치고 돌진했습니다. 마침내 경찰의 총격으로 학생이 쓰러지자 흥분한 데모대는 서울신문사와 반공청년단 본부, 그리고 시내의 여러 경찰관 파출소를 불태우는 등 그들의 분노는 폭발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포했어.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려 한 거야. 당시 186명이 사망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부상자가 생겼어. 역사는 이날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르게 돼. 분노한 대학생들이 이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로 향해.
"민주주의 사수하자! 이승만 정권 물러나라!"
그동안 억눌러온 분노가 일제히 폭발했어. 이런 상황에서 주한미국대사가 "학생들의 시위는 정당했다"라고 성명을 발표해. 미국이 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는 얘기야. 이 대통령은 더 이상 기댈 데가 없어.
1960년 4월 26일. 국민들이 원하는 소식이 들려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겠다고 발표해. 모든 걸 내려놓기로 결심한 거야.
이 소식을 접한 이기붕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야 성명이 발표된 지 이틀 후...
"탕! 탕! 탕! 탕! 탕!"
새벽 5시 40분, 경무대에서 다섯 발의 총성이 울려. 그리고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비극으로 끝마친 이기붕 씨 일가. 저주도 회한도 잊은 망령의 길. 양친을 먼저 쏜 다음 동생, 그리고 자신을 강석 군이 비장한 최후를 결행."
-당시 신문 기사 내용 中
이기붕 일가 네 식구가 모두 사망한 채 발견됐어. 이기붕과 부인 박마리아, 차남 강욱 군은 소파에 나란히 앉은 채 사망했다고 해. 발견됐을 때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고 전해져. 그리고 그 맞은편, 장남 이강석이 바닥에 누워 있었어. 가슴에 한 발, 머리에 한 발, 총상이 발견됐어. 현장을 조사한 결과, 일가족이 자살한 것으로 발표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소식을 들은 후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었던 걸까?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일가족은 한날한시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어. 권력은 무너질 때 한 순간이야.
이기붕 일가의 장례식장에는 네 개의 관이 놓여. 이승만 박사는 부축을 받으며 조문을 왔어. 그는 가장 믿었던 수하와 아들을 잃은 거야. 천천히 관 옆을 지나가던 이승만 박사는 이강석의 관 앞에서 걸음을 멈춰. 그리고 관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고 해.
▲ 황태자와 찰리 채플린
하지만 이기붕 일가의 죽음 뒤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해. 어떤 소문이 있었는지 들어봐.
"나는 말이야. 지금도 그 의문점을 갖고 있는게, 가슴에다 한 방 쏘고 또 거기에 머리에다 쏴? 자기 머리에? 이거는 말이야. 이건 아무리 철인이라도 그렇게 못 한다 이거야. 난 지금도 미스터리라 생각해."
-이성춘, 前 한국일보 기자
의혹들이 많았다고 해. 이강석과 동생 강욱이는 사망한 게 아니라 미국으로 망명을 갔다는 소문도 있었어. 하지만 이기붕 일가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수사기록, 검안기록 등 어떤 자료도 남아있지 않아. 자살이든 타살이든 아니면 망명을 했든, 황태자 이강석의 말로는 비극으로 끝을 맺고 말아.
이쯤에서 궁금한 인물이 하나 있지? 가짜 이강석, 강성병은 어떻게 됐을까?
10개월 형을 살고 나온 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어. 하지만 강성병을 직접 만난 사람이 있어. 바로, 가짜 이강석 사건을 최초 특종 보도했던 김 기자. 그분이 남긴 글이 있어.
"파리한 얼굴을 한 강성병 군이 신문사로 나를 찾아왔다. 이강석 군의 자살에 조의를 표하는 예의를 잊지 않고 있었다. '취직도 안 되고 살기가 귀찮다'고 몹시 지쳐있었다. '힘을 내라'는 격려에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이며 힘없이 사라진 모습이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난 어느 날, 염세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진짜, 그리고 가짜... 다만 다 같이 젊었던 두 청년의 명복을 빌 뿐이다."
-'땡삐의 분노' 179쪽 내용 中
1963년 8월 7일 밤. 강성병은 대구의 한 술집에서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어. 그는 세상일이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해. 세상을 비관해서 그런 선택을 했던 것으로 보여.
서로 닮은 얼굴로 태어나 다른 삶을 살다가 같은 운명을 맞이한 두 청년. 한국판 '왕자와 거지'의 씁쓸한 결말이야.
권력은 달콤한 꿈같은 게 아닐까? 깨고 싶지 않지만 깨고 나면 허무한 꿈. 강성병이 권력의 달콤한 맛을 느낀 것은 3일에 불과해. 어쩌면 가짜 이강석으로 지냈던 3일간의 경험이 그에게 독이 된 건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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