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치료 중심주의’가 의료 위기 불렀다

한겨레 2024. 2. 2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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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82)
‘바틀비’는 왜 ‘하지 않는’ 쪽을 택했는가
인공지능이 그린 바틀비의 초상.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1]

문학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 보셨을 위 문장은 ‘모비 딕’의 작가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단편 ‘바틀비’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필경사(scrivener) 또는 서기 바틀비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거절하면서 위의 발화를 반복한다. 철학자들은 바틀비의 태도나 이 표현의 특수한 위치를 분석하면서 그에게 다양한 위치를 부여해 왔다.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 이(아감벤)도,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 이(네그리)도, 미학적 해석을 시도한 이(들뢰즈)도 있으며 그에게서 급진적 저항의 태도를 찾아낸 이(지제크)도 있었다. 이런 바틀비는 이전과 전혀 다른 변화를 실현하는 주체로 이해된다.

모든 해석을 긍정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바틀비의 행위를 능동적 저항이 아닌 시대에 대한 수동적 반응으로 읽어내고자 한다. 바틀비는 이미 19세기부터 인간도, 세계도 없이 돈에만 최우선의 가치를 부여하던 월스트리트의 희생자이며, 그의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은 시대의 분위기에 내몰린 한 인간의 단말마적 비명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태도에 지금의 보건의료적 접근 하나를 비추어 보려고 한다. 굳이 현안도 하나 더 해서.

먼저, 바틀비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고, 그를 비인간적 힘의 희생자로 읽는 이유를 ‘바틀비’ 자체에서 찾아보자.

바틀비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걸까

화자는 월스트리트에서 “부자들의 채권과 저당권, 등기권리증을 취급하는 은밀한 업무에 종사하는” 변호사다(10쪽). 그는 화려한 논변을 법정에서 뽐내는 쪽보다 조용히 현실적인 결과를 내는 것을 선호하는 체제 순응적인 인물로서, 세 명의 직원을 데리고 법률사무실을 꾸리고 있다. 터키, 니퍼스, 진저너트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들 중 앞의 둘은 서기, 즉 서류를 베끼는 일을 하며 셋째는 잡무를 보는 사환이다. 화자에겐 안타깝게도, 두 서기의 업무 능력은 지속성이 떨어진다. 터키는 오전에는 괜찮다가 점심 이후부턴 활력이 과해 일을 망치고, 니퍼스는 오전 내내 여러 가지 짜증을 부리다가 오후에는 조용히 보낸다. 마치 교대 근무처럼 직원이 번갈아 일하는 것에 고통받던 화자는 새 직원을 들이기로 결심한다. 광고를 보고 찾아온 이가 바틀비, 말끔하고 예의 바르며 쓸쓸한 그다.

처음엔 꼼꼼하고 근면히 일하던 바틀비의 모습을 기뻐하는 화자이지만, 곧 그의 이상한 태도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바틀비는 자신에게 처음 주어진 일인 서류 베껴 쓰기 외 당연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들, 예컨대 베껴 쓴 서류 대조하기, 우체국 다녀오기를 거부한다.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할 뿐. 심지어, 어느새 바틀비는 사무실을 떠나지도 않고 그곳에 살고 있다.

바틀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게 된 화자는 바틀비와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염려해, 이동을 거부하는 바틀비를 두고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사무실의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어떤 것도 거부하는 바틀비는 결국 부랑자로 경찰에 신고되어 툼스 교도소로 연행되고, 그곳에서도 먹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거부한 바틀비가 결국 죽었음을 화자는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 ‘바틀비’를 처음 접하면 보통 독자들은 당혹하게 된다. 작품 속에서 바틀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화자가 작품 밖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바틀비라는 인물을 그려내는 소설의 구조상, 이 사람은 뭐지? 왜 이러지? 라는 질문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작품에 제시되는 여러 요소를 해석적 자원으로 끌어모아 자신의 답을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바틀비의 의지가 아닌 환경

허먼 멜빌의 대표작은 아무래도 백경, ‘모비 딕’이지만 그의 단편 또한 인간 본질의 탐구를 통한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다. 글에서 소개한 ‘바틀비’, 유고작인 ‘선원, 빌리 버드’ 등의 작품이 실린 단편집.

나는 바틀비와 같은 일을 하던 서기부터 출발한다. 터키와 니퍼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일하며 하루의 절반만 제대로 업무를 처리하는 이들은 다른 기질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아침에 온화한 안색인 터키는 점심이 지나면 얼굴색이 “크리스마스 때 석탄으로 가득 찬 벽난로처럼 벌겋게” 타오르는 다혈질, 고혈압, 과도한 원기의 소유자다(12쪽). 반대로, 아침에 짜증이 가득한 니퍼스는 무얼 고쳐야 할지도 모르면서 의자와 책상을 계속 조정하고 욕설을 내뱉는데, 그런 그를 지배하는 것은 “야심과 소화불량”이다.(15쪽) 고혈압과 소화불량은 마치 그들의 본성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그것이 그들의 업무환경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의심은 다분히 합리적이다. 사무실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의 묘사를 보자.

이것은 풍경화가들이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여된 삭막한 풍경이라 할 만했다. 한데 사무실 다른 한끝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반대쪽과 크게 다를 것이 없긴 하지만 적어도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는 했다. (…) 벽은 근시안인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무실 창문에서 불과 3미터밖에 되지 않는 곳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의 건물들이 워낙 높은 데다 우리 사무실은 2층에 있어서 그 벽과 우리 사무실 사이의 공간은 거대한 사각형 물탱크를 연상시켰다.(11~12쪽)

변호사 사무실은 양쪽이 트여 있고, 한쪽은 삭막하고 다른 한쪽은 벽으로 막혀 있다. “대조적인”이라는 수사에 현혹되어 다른 쪽의 풍경은 괜찮으리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쪽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물탱크”니까. 사무실의 어디를 내다보아도 생명을 느낄 수 없는 이곳은 그저 사무실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월스트리트라는 사막 같은 현실에 대한 상징이다. 그리고 생명 없는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어딘가 고장나 있다.

여기로 떠밀려 온 바틀비가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선언을 하고, 그 하지 않음의 영역이 점차 넓어지는 것이 우연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터키와 니퍼스가 빼앗긴 생명을 여러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처럼, 바틀비 또한 자신의 상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멜빌의 ‘바틀비’는 당시의 관점에서 쓰인 구조주의적 관점의 사회 비판 또는 환경·생태주의적 문제 제기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논지를 보강하기 위해 여러 지점을 더 짚을 수 있겠지만 두 지점만 더 살피자. 화자는 바틀비를 어떻게든 이해하려 하면서 책을 읽는다. ‘에드워즈의 의지론과 프리스틀리의 필연성에 관한 책들’이 화자의 독서 목록인데,(51쪽) 이들 책은 넓게 해석하면(조너선 에드워즈의 책은 신학이고 조지프 프리스틀리의 책은 유물론적 철학이기에) 우연성에 기초한 자유의지를 배격하고 주어진 맥락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인간 의지를 바라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틀비의 의지가 아니라, 바틀비가 처한 환경이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붙은 삽화에서 화자가 듣는 소문에 의하면 바틀비는 ‘죽은 편지들’을 취급하는 우체국 직원이었다. “워싱턴의 배달불능 우편물 취급부서의 하급 직원으로 일하다가 (…) 끊임없이 그런 죽은 편지들을 취급하고, 그것들을 분류해서 불태우는 일보다도 더 그런 절망감을 부채질할 만한 일이 달리 또 어디 있겠는가?” (66쪽)

바틀비의 “하지 않음을 택함”은 의지의 발현이라기보다, 생명을 빼앗는 일에 내몰린 이가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물이 아닌가. 그렇기에 화자는 소설 말미에 인류에 대한 탄식을 내뱉는다. “아, 인류여!”

건강과 질병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고, 특히 사회적 구성이나 관계는 건강과 질병을 결정지을 수 있는 주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의학을 떠올릴 때 아래의 생물학적 요인만 생각한다. 이것은 의학에 대한 불충분한 접근으로 이어지고, 결국 지금의 의료 위기를 낳았다. 그림은 논문의 것을 번역, 요약하였다.[2]

질병 뒤에 있는 생활환경을 봐야

‘의학과 서사’ 칼럼에서 이런 이야기를 살피는 것이 의아해 보이실 수도 있다. 바틀비라는 인물이 의학과 무슨 상관인가? 맞다. 여기에서 다루고 싶은 것은 바틀비가 아니라 바틀비를 수동성과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것, 즉 생활 환경의 문제다.

지금은 모두가 건강 및 질병과 환경의 연관성을 알고 있다. 기후 위기로 인한 고열과 혹한, 폭우와 홍수로 많은 사람들이 건강상의 피해를 보고 있음을 다들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생활 환경이란 더 넓은 의미의 것, 사회 환경이나 개인이 속한 관계망, 생활 습관까지 포함하여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미 이전 글에서도 건강과 질병의 사회적 결정 요인이라는 개념을 설명한 적이 있으며 우리의 건강과 질병은 개인을 감싸는 이 생활환경에서 결정된다. 물론 유전이나 개인의 의지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유전 요인을 가진 이들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생활환경에 있으면 그 결과는 다를 수 있다. 반대로 다른 유전 요인이나 삶의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같은 생활환경에 있으면 특정 질병의 위험도는 같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런 생활환경의 영향은 여러 요인의 상호작용으로 결정된다.

예컨대 저개발국가의 저소득층에선 저체중이, 고소득국가의 저소득층에선 비만이 심각한 건강 문제가 된다.[3] 같은 저소득층이라면 비슷하게 저체중이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기작이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문제는 아마도 영양소 공급 자체에 있을 것이다. 저소득층은 균형 있는 영양소 섭취가 어렵고, 그 결과가 저개발국가에선 저체중으로, 고소득국가에선 비만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공통의 문제가 생활환경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저소득층이 아닌 이들은 영양소 불균형의 문제를 훨씬 더 적게 경험하니까.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런 접근과 우리의 의학 이해에는 먼 거리가 있다. 우리는 의학을 당장의 질병을 치료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도구로 생각하지, 생활환경에 문제를 제기하고 바꾸는 관찰과 변화의 장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치료에만 초점을 맞추고 치료 행위에만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의 의료에 익숙했던 것이 한편으로 지금의 의료 위기를 초래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우리 의료는 직접 어떤 치료 행위를 해주는 것에만 비용을 산정하기에 더 좋은 기술이나 기계에 더 큰 비용을 지불하고, 당장 결과가 눈에 들어오는 미용이나 성형 등에 더 큰값을 치르는 일이 이상하지 않게 다가오는 것이다. 생활환경의 접근에는 환자와 의료인의 상담과 오랜 신뢰 관계가, 기초 의료망의 구축과 지속적인 지역사회 돌봄이, 때로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안정적이고 반복적인 의료적 절차들이 더 중요함에도, 우리는 여기에 비용을 들인 적이 없다.

70년대, 수많은 급성 감염병 환자와 외상 환자가 넘쳐나던 시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치료 중심의 방식이 이제 고령화와 만성질환의 시대에 작동하기 힘들다 보니,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의료의 영역들이 ‘위기’라며 튀어나오고 있다. 의사 수를 말하는 것도 필요할 수 있지만, 왜 지금의 의료 시스템이 더는 작동하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 해결책이나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 논의를 참조하지 않고 무턱대고 접근하는 것은 현명한 방식이 될 수 없다. 이제라도 의료와 생활환경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지금의 ‘의료 개혁’은 미봉책으로 끝날 것이다.

참고문헌

허먼 멜빌, 김훈 역. ‘허먼 멜빌’. 현대문학; 2015.

Warnecke RB, Oh A, Breen N, et al. Approaching health disparities from a population perspective: The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Centers for Population Health and Health Disparities. Am J Pub Health. 2008;98:1608-1615.

Valles SA. Philosophy of Population Health. Routledge; 2018.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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