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진 입고, 발트해 휴가… 우리가 몰랐던 동독 이야기[북리뷰]

유승목 기자 2024. 2. 2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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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벽 너머
카트야 호이어 지음│송예슬 옮김│서해문집
라인강 기적에 맞먹는 경제성과
가구 절반 이상이 자가용 보유
연평균 142ℓ 달한 맥주 소비
존재론적 태평함에서 나온 현상
공산주의·독재 기억만 남은 동독
기록·인터뷰 등 바탕해 재구성
1964년 동독 베를린에서 어머니와 아기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산책하는 모습

“휴가철에는 오버호프나 하르츠산맥, 아니면 치타우 등에 있는 휴양지로 갔다…우리는 노동을 해 월급을 받았고,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상여를 얻었다. 그럭저럭 잘 살았고 걱정할 게 하나 없었다.” 에리카 크뤼거는 자신이 살았던 1970년대와 1980년대 독일민주공화국(DDR)에서의 삶을 안락한 시간으로 기억한다.

이는 크뤼거만의 특별한 기억은 아니다. 1987년 이 나라에 살던 모든 가구가 세탁기·냉장고·텔레비전을 적어도 한 대는 보유했고, 절반 이상은 자가용을 소유했다. 사람들은 커피 볶는 냄새를 맡으며 친목을 다지고 여가를 즐기느라 시간을 썼다. 1988년에 이 나라 국민은 연평균 142ℓ의 맥주를 마셨다. 미국 학자 토머스 코챈은 이런 어마어마한 술 소비량을 두고 “존재론적 태평함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걱정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걱정할 게 너무 없어서 술을 마셨다는 뜻이다. 이웃 독일연방공화국(BRD)이 8%의 높은 실업률로 애를 먹고, 직업이 있는 사람들마저 일자리 안정을 우려하는 동안에 적잖은 행복을 누린 것이다.

1956년 발트해 퀼룽스보른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는 동독인들

냉전의 시대, 모두가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대립한 것을 안다. 그리고 서독이 동독과의 체제경쟁에서 분명한 승리를 거뒀다는 것 역시 익히 알려진 ‘역사’다. 자유의 가치가 살아 숨 쉬던 서독과 달리 동독은 공산주의와 독재의 혹독한 폐해를 보여준 곳이다. 그래서 크뤼거의 그 안락했다던 시절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독일민주공화국이 바로 서독이 아닌 동독이기 때문이다.

흔히 자유진영의 첨병이었던 서독이 총천연색이라면, 동독은 단조롭고 흐릿한 잿빛 세상으로 기억된다. 개성도 선택 의지도 의미도 없는, 독일사에서 나치독일과 함께 잊혀도 그만인 곁다리쯤으로 치부되는 아픈 손가락이다. 독일계 영국인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카트야 호이어는 이런 동독에 대한 기억을 바로잡고 흑백의 역사에 색깔을 덧입힌다. “독일민주공화국은 1990년 10월 3일 하룻밤 사이에 증발했고, 그와 동시에 스스로 역사를 써내려갈 권리를 상실했다”는 저자는 동독이 그 자체로 기억할 가치가 있는 다채로운 공간이었다고 밝힌다.

로스토크 조선소의 여성 용접공

실제로 통일이 된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간 독일을 넘어 유럽을 호령한 앙겔라 메르켈마저 퇴임을 앞둔 시점까지 자신이 살았던 동독에서의 과거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어야 했을 만큼 동독은 국가 서사에서 지워져야 하는 존재였다. 굳이 기억돼야 한다면 나치주의만큼이나 구제할 길 없는 악몽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동독 역시 발트해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가장 미국적이고, 소비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블루진’이 유행했을 만큼 풍부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풍경을 간직한 곳이었다. “물론 억압과 잔혹함이 존재했으나 웃음과 자부심도 존재했다. 독일민주공화국 시민은 삶을 살았고, 사랑했으며, 일했고, 늙어갔다”는 저자가 “이제 드디어 독일민주공화국을 감히 새롭게 바라볼 때가 왔다”고 외치는 이유다.

책의 단단한 구성은 저자의 외침을 공허하게 만들지 않는다. 20세기가 시작한 순간부터 1990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질 때까지 수많은 독일인이 남긴 편지와 기록, 그리고 인터뷰를 바탕으로 동독이 형성된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동독의 마지막 국가원수였던 에곤 크렌츠나 유명한 대중가수 프랑크 쇠벨 같은 연예인의 인터뷰도 실렸지만, 교사, 경리, 공장 노동자, 경찰같이 국가의 톱니바퀴 역할을 했던 시민들의 목소리가 대부분이라 보다 실감이 난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갇힌 독일인들이 만들어낸 1950년대 신생 공화국의 기백과 라인강의 기적에 밀리지 않는 성과를 냈던 1960~1970년대의 경제적 성과, 현실감각을 잃고 표류하며 사회주의 기반이 무너진 1980년대까지의 40여 년이 입체적으로 읽힌다. 648쪽, 3만3000원.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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