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 인권을 외치자, 우울함은 개나 줘버리고
밝고 씩씩한 얼굴을 한 그의 입에서, 의외의 이야기가 나왔다.
티브이(TV)가 귀하던 시절, 1980년대 초반의 어느 날이었다. 오빠는 친구 집에 티브이를 보러 가면서 “네가 엄마 잘 지키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어렸지만 모두가 낌새를 느끼던 때였다. 엄마가 왠지 삼 남매를 버릴 것 같은 낌새. 엄마는 조금 뒤 “티브이 보러 간 오빠를 찾아오라”고 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정말 버림받을 것 같았다. 용기를 내서 엄마에게 대들었다. “내가 오빠 찾으러 가면 나가버릴 거지?” 엄마가 버럭 소리쳤다. “얼른 오빠 안 찾아와?” 전속력으로 오빠 친구 집에 달려가 문을 열었다. 티브이에 눈이 쏠려있던 뒤통수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오빠의 눈은 ‘네가 여기 오면 어떡하냐’고 질책하는 듯했다. 남매가 서둘러 집으로 왔다. 그 틈에 정말 엄마는 사라져버렸다.
오수미(55) 삼청교육 피해자유족회 대표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담담하게 말했다. 그날 이후 둘째 큰아버지 집에 갔다. 셋째 큰아버지 집에도 갔다. 밥이 한 숟가락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천덕꾸러기가 됐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어느 날 오빠가 말했다. “지금부터 똑바로 들어. 오빠가 하라는 대로 안 하면 학교 못 간다. 파출소에 갈 거야. 엄마·아빠 이름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 삼 남매는 영등포의 한 파출소로 들어갔고, 이후 보육시설(고아원) 생활이 시작됐다.
1년 전 알게 된 아버지의 삼청교육
아버지 기억은 별로 없다. 어느 때부턴가 아버지는 집에서 완전히 부재했다. 엄마가 사라진 건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엄마·아빠 없는 ‘고아원’의 하늘 아래 삼 남매는 각자도생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아버지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을 줄은 몰랐다. 그 놀라운 사실은 불과 1년 전에 알았다. 2023년 2월14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아버지 오광수씨가 삼청교육 명단에 있다”면서 조사개시 통보를 해왔다. 그날, 그는 통지서를 손에 쥐고 세상이 떠나가라 대성통곡했다.
1942년 2월19일생인 아버지의 사망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1980년 8월4일 파주 25사단 삼청교육대에 입소하여 8월30일까지 순화교육을 받았고, 이후 같은 부대에서 4개월 넘게 근로봉사(강제노역)를 하다가 1981년 1월16일 ‘출소’했다는 기록만 있다. 그 뒤 쭉 실종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7월20일 진실화해위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뒤 더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1983년 경찰의 형사사건기록부에 아버지가 당시 가족이 살던 구로구(현 금천구) 독산동을 배회하다 경찰에게 잡혀 조사 받은 흔적이 있다는 거였다.
오 대표가 아버지의 진실을 기록으로 확인하던 날 그토록 슬프게 울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제 혼자 남았기 때문이었다. 삼 남매를 포기했던 엄마도, 보육시설에서 억척스레 공부하며 제 갈 길을 개척했던 오빠와 남동생도 모두 50이 되기 전에 하늘나라로 갔다. 슬퍼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스스로 부여한 미션을 수행했다. 조사개시 통보를 받은 지 6개월도 되지 않은 지난해 8월7일 “삼청, 인권을 외치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단체를 뚝딱 조직해낸 것이다. 현재 월 5000원 회비를 내는 정회원이 100여명, 준회원은 250명가량 된다.
천성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라는 오 대표의 가슴은 의욕과 투지로 불타고 있다. 삼청교육 피해자유족회를 인권단체로 비상시키기 위한 꿈을 꾼다. 봄부터 간담회·토론회 등을 시작하고 진실화해위 문을 두드리려고 한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자폐성 장애 2급 진단을 받은 큰아들과 함께 장애 인권운동을 10년간 훈련 삼아 해왔는지도 모른다. 19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위치한 삼청교육 피해자유족회 사무실에서 그의 기구한 가족 이야기와 앞으로의 포부를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넝마를 하다가 잡혀가지 않았을까 추정
―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신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아버지 이름은 오광수, 1942년생이죠. 기억이 많지는 않아요. 어머니 살아생전에 아버지가 2남 1녀 중 둘째인 저를 유독 이뻐하셨다거나, 뒤뚱거리며 걷는 저를 뒤따르며 넘어지려 할 때 얼른 잡아주었다는 이야기만 기억납니다. 아버지는 탁주 회사를 하는 할아버지의 4남 2녀 중 4남이었어요. 아버지 위로 세 분의 형과 아래로 두 분의 여동생이 계셨어요. 아버지는 배재고등학교를 나오시고 학창시절 권투부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정확하지는 않아요. 어머니는 선지해장국 집을 했던 것 같고, 부모님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 아버지가 삼청교육대에 왜 끌려갔다고 짐작하세요?
“아버지가 자존심이 세서 할아버지 도움을 안 받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아버지는 집에 거의 없었는데, 넝마를 하다가 잡혀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누구한테 들었는지, 어디서 나온 기억인지는 몰라요. 아버지가 전과는 없다고 들었어요. 넝마를 하다가 길거리에서 어떤 물건을 주웠는데 그게 도둑질이라는 신고가 들어왔고 오해가 풀려 훈방이 됐으나 나중에 빌미가 되어 잡혀갔다는 거죠. 그저 여러 기억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추정하는 거예요”
실종된 아버지, 형사 사건부 기록의 미스터리
― 아버지 사망이 확인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기록을 확인한 건 지난해 7월20일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으면서였어요. 기록을 보면, 순화교육 받은 기간은 한 달이 채 안 됐고, 근로봉사를 넉 달 넘게 한 거죠. 그리고 집에 영영 안 돌아오셨는데, 1983년 경찰 기록에는 아버지가 우리 가족이 살던 독산동을 배회하다 경찰에 잡힌 적이 있는 거죠. 그걸 보면 아버지가 기억을 잃으셨는지 집을 못 찾고 몇 년을 집 주변에서 헤매다가 객사하신 게 아닌가 싶어요. 예전에 고모가 아버지를 본 적 있다면서 ‘치아가 다 빠져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고요.”
― 어머니까지 사라진 뒤 친척 집을 전전하다 파출소를 찾아간 거잖아요. 그다음은 어떻게 됐나요?
“오빠는 오한성(1967년생), 동생은 오두성(1971년생)이에요. 중간인 제가 1969년생이고요. 저희 삼 남매는 파출소에서 서울 시립아동보호소로 넘겨졌어요. 어릴 때니 위치도 기억 안 나는데 은평구였다고 해요. 거기서 한 달 있다가 도봉산 초입에 있는 ‘도봉유린원’이라는 보육시설에 갔어요. 거기서 자라게 됐죠. 친척 집에서 눈칫밥을 먹었던지라 보육시설이 오히려 따뜻했어요. 고아들이 한 60명 되는 곳이었어요. 거기서 오빠는 고등학교 3년을 다녔고, 동생과 저는 중간에 나왔어요. 88올림픽 때문에 보육시설을 혐오시설로 간주하고 시 외곽으로 옮겼거든요. 저랑 동생은 보육시설을 나와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을 얻었지요. 저희 삼 남매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어서 모두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녔고, 오빠는 유일하게 대학에 갔어요. 고대 기계공학과에 들어갔는데, 독서실 총무로 숙식제공을 받으며 공부를 억척스럽게 했어요. 저는 정의여고를 다니다 보육시설에서 나와 검정고시를 쳤어요. 마포 갈빗집에서 일하면서 먹고 잤지요. 동생은 고시원 등에서 생활하며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 취업했고요. 삼 남매 사연이 정말 길어요.”
조사개시 통보받은 날 대성통곡
― 대표님은 인생의 온갖 간난신고를 겪은 분 답지 않게 참 밝아요.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멘탈 강하다는 말도요. 부잣집 딸로 자란 애같이 보인다고들 했지요. 제가 자유로운 영혼입니다.(웃음) 보육시설에 살면서도 친구들에게 ‘우리 집 놀러 가자, 우리 집 넓다’(웃음)고 스스럼없이 얘기했어요. 보육시설을 숨기고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덕분에 밥 세끼 굶지도 않고 잘 살았다’고 얘기하곤 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친구들이 어린이대공원 가자는 거예요. 보육시설에서는 용돈을 주지 않죠. 그래도 저는 원장님한테 가서 ‘용돈 달라’고 했어요. 그때 만 원 받아서 용돈도 썼죠. 중학교 들어가선 학교에 내야 하는 체육복 비도 보육시설에서는 원래 안 주는 데 저는 달라고 요구해서 2700원 탔던 기억도 나요. 오빠는 2014년에, 남동생은 2019년에 세상 떠났어요. 둘 다 간암이었어요. 삼 남매 모두 B형 간염 예방접종을 못 받아서 그리 되지 않았나 싶어요. 부모가 예방접종 챙겨줘야 하는데, 그걸 해줄 사람이 없었죠. 오빠 동생 다 하늘나라 가니까 세상에 화낼 일이 없더라고요. 무슨 일이든 천천히 완벽히 하려고 하면서 살아요.”
― 아버지가 삼청교육에 가신 건 어떻게 알게 됐나요?
“저는 진실화해위 피해 신청 같은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2019년에 동생이 죽었다고 했잖아요. 결혼 안 하고 혼자 살았거든요. 친족이 저만 남아있어 제가 동생의 유품을 정리해야 하는데 아버지의 주민등록에 뒷자리 번호가 없다면서 실종신고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버지가 1980년대 주민등록 일제 갱신 때 없었으니 그런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아무튼 그 결과로 가정법원으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실종선고를 받았어요. 그거 하는 과정에서 의문이 생겼어요. 생전에 오빠가 하던 말이 떠오르는 거예요. ‘아빠가 삼청교육 갔을 수 있다. 혹시 명단 공개하면 꼭 알아보라’고 했거든요. 오빠도 생전에 국방부에 알아봤는데 안 알려주더래요. 그러다 제가 진실화해위가 삼청 피해 신청을 받는다는 걸 알고 어떤 변호사를 소개받아 찾아간 거죠. 그랬더니 빨리 신청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2021년 초에 신청했어요. 2023년 2월14일 진실화해위에서 아버지가 명단에 있으니 조사받으러 오라 한 거예요. 그날 엄청나게 충격받고 울었죠. 형제복지원 피해자 뉴스 보면서 나도 모르게 밑에서 올라오는 게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 대상이 우리 아빠라고 생각하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슬펐어요.”
삼청 피해자는 인권을 외쳐야 한다
― 1년 밖에 안됐네요. 진실화해위 조사받으러 가서 무슨 이야기 했나요?
“사실 조사는 둘째 문제고 제가 오히려 조사관한테 막 물어봤어요. ‘지금 삼청 피해자와 자녀들 다 어디서 뭐 한대요? 억울하지 않대요? 이런 일 당하고도 어떻게 조용히 있을 수 있나요?’ 그리고 관련 단체나 조직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해서 찾아갔어요. 여러 단체가 있더라고요. 그중 탁미선이라는 유족분을 알게 됐어요. ‘삼청교육 피해자 및 유족연합’ 대표를 지낸 분이에요. 코로나 한창때라 만나지 못하고 통화만 했는데 동갑이더라고요. 그분은 2000년대 초반부터 활동했는데, 지금은 앞에 나서지 못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럼 뒤에서 도와달라고 했어요. 지금 그래서 공동대표를 맡고 계세요. 또 한 분의 공동대표는 피해 당사자인 신덕기씨입니다. 이분도 오래 활동했어요. 다른 단체도 찾아갔었는데, 함께 하는 걸 고민하다 하지 않았어요. 삼청교육 피해자 운동을 오래 하신 분들인데, 뜻이 잘 안 맞았어요.”
― 어떻게 바로 조직을 만들 생각을 하셨어요?
“저는 삼청교육이 한국 근현대사 최고의 인권유린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피해자가 많은 경우가 있나요? 한 번에 6만명이 잡혀가서 4만명 가까운 인원이 순화교육을 받았어요. 그리고 또 근로봉사와 보호감호까지…. 저는 딱 방향을 잡았어요. 인권운동으로요. 삼청교육 피해자들은 인권을 외쳐야 해요. 그래서 단체 슬로건도 ‘삼청, 인권을 외치다’라고 정했어요. 이제 범죄자라는 낙인을 벗어나 피해자 인권을 외치는 시대가 왔음을 어필해야 해요. 그동안 너무 손해배상소송에만 집중한 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피해자들 인권과 권리를 똑바로 주장해야 배보상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해요. 저희 회원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고요. 배보상에만 집중하면 우리가 내야 할 소리를 낼 수가 없어요. 그렇게 안 하면 인권단체가 아니라 소송 준비해주는 단체로 전락할 거예요.”
‘인권’과목 만들어 수업 시수 반영해야
― 인권을 어떻게 외치나요?
“인권교육이 절실히 필요해요. 제가 만난 삼청교육 피해자 중 자신을 범죄자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는 거예요. 심지어는 본인들 피해 토로하면서도 ‘저런 새끼는 삼청교육을 받아야 해’라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어요. 또 어떤 분은 스스로 ‘내가 잘못해서 갔다. 가서 사람 됐다’는 거예요.(웃음) 슬픈 얘기죠. 당시에 설사 그 사람 행실이 안 좋았다 해도, 삼청교육이 정당화될 수는 없죠. 두드려 맞지 않고도 교화될 수 있는 거고요. 그분과는 논쟁을 하다가 대화가 계속 안 통해서 ‘그럼 당신은 계속 맞고 살아’ 하면서 회원 가입 안 시켰어요.(웃음) 어떤 분들은 단톡방에서 전두환에 대한 기사링크 올린 거 보고 ‘왜 전두환 욕하냐’고 하기도 해요. 그러면 그분한테 나가라고 해요. 이런 분들한테는 막 싸가지없이 굴어요. 아직도 대중들의 머릿속에 삼청교육 피해자들을 사회악, 정화대상으로 보려는 게 있잖아요. 아니 피해자들이 먼저 그걸 깨야 하는데,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인권교육부터 해야 합니다. 그랬더니 또 어떤 분 하시는 말씀이 ‘인권운동 하는 사람들 빨갱이 아니냐’고.(웃음)”
― 인권이 뭔가요?
“인권은 피곤한 겁니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문제라고 봐요. 인권적인 문제에 혐오를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크고요. 사실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도덕’을 배우잖아요. ‘인권’이라는 단독 과목이야말로 있어야 해요. 수업 시수에 반영되어 입시에도 영향력을 발휘해야 부모들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항상 생각해요. 모든 것은 어려서부터 배우는 교육에서 시작하잖아요. 지금 이런 주장 속에도 딜레마가 있으니 인권은 피곤한 겁니다.”
배·보상도 화끈하게 요구하겠다
― ‘삼청, 인권을 외치다’라고 했는데, 손해배상도 외쳐야 하지 않나요.
“물론이죠. 더 확실히 외쳐야죠.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잖아요. 피해는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삼청교육대 끌려간 날로부터 지금까지 피해를 보고 있는 거예요. 숨어서 지내고, 삼청교육 드러내고 말도 못하고, 해외 가야 하는데 삼청교육대 전력 때문에 못 가고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어요. 저는 40억 청구한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40년 넘게 안 돌아온 거잖아요. 40년간 피해 본 거 아닌가요? 저는 뭐든 화끈하게 하겠습니다.”
― 삼청교육은 한마디로 뭘까요?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미화한 사건이죠. 대국민 사기극. 민간인을 사회악으로 만들어 인권 유린한 대표적인 사건. 군인이 민간인을 억압한 무서운 사건.”
(기자 주―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진압한 신군부는 8월부터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사람들을 잡아와 군부대에 보내기 시작했다. 광주는 폭도로 몰아붙였고 삼청에는 깡패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참고로 진실화해위는 보고서에서 삼청교육 사건을 이렇게 정의했다. “삼청교육 피해 사건은 1980년 7월29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입안한 ‘삼청계획 5호 및 계엄포고 제13호에 따라, 계엄사령부 지휘 아래 군‧경이 6만여 명의 대상자를 검거하여 약 4만명을 1980년 8월4일부터 1981년 12월5일까지 순차적으로 군부대에 설치된 ‘삼청교육대’에 수용하여 순화교육, 근로봉사, 보호감호를 시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사망자 54명, 후유사망자 367명 및 상이자 3239명 등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규모 인권침해 사건이다.”)
2%도 안 될 진실규명…진실화해위 상시 기구해야
― 현재까지 진실화해위에서 삼청교육 피해자 400명이 진실규명을 받았어요. 전체 신청자는 759명입니다.
“지금 고작 1% 진실규명된 거죠. 이번에 진실화해위 조사 기간 1년 연장됐어요. 759명이 다 진실규명돼도 2%가 안 돼요. 나머지는 어떻게 하나요? 지금은 신청 기간도 끝났어요. 저는 진실화해위는 상시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직권조사가 필요하다고 말을 하는데, 저는 좀 다른 의견이에요. 직권조사한다고 피해자들한테 불쑥 ‘조사받으러 와’라고 통보하는 거 자체가 인권침해가 될 수 있어요. 자식들에게 숨기고 살아온 사람도 있잖아요. 삼청은 사실 본인이 피해 사실을 밝히고 싶을 때 스스로 피해신청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해요. 그게 삼청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첫 번째 할 일이에요. 이것이 피해자를 위해 가해자인 국가가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의 시작입니다.”
― 대표님은 10년 가까이 장애인 인권활동을 하셨어요. 2016년부터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대문지회 회장과 서울지부 부대표, 전국통합교육학부모협의회 대표 등을 지낸 이력이 있네요.
“첫째 아들이 자폐아 진단을 받았어요. 발달장애인은 결코 부모 혼자 키울 수 없음을 깨달았어요. 장애아가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여러 방안을 찾던 중 자연스럽게 지역활동가로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 무렵 지역에 있는 전국장애인부모연대에서 함께 활동을 해주기를 요청받아 부모활동을 하게 됐고요. 2017년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 세울 때 그 지역 장애아 부모들과 함께 반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도 꿇었어요. 제 아들은 이제 대학교 2학년 올라가는데 특수학교에 다니지는 않았어요.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야 하며 함께 수업받아야 하는 통합교육을 지향해 왔거든요. 결국 제가 없는 세상에 놓일 텐데, 조금 어렵고 힘들겠지만 제가 살아있을 때 아이의 자립을 위해 비장애인들 속에서 생활하기를 원했습니다. 장애인 인권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삼청을 인권으로만 바라보고 단체를 만들 수 없었을 거예요. 큰 틀로 보면 인권 안에 장애 인권이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더욱 장애 인권단체에서의 활동이 소중합니다.”
“삼청교육 부활시켜야 한다”는 악담
― 궁극적으로는 뭘 하고 싶으세요?
“삼청교육 피해자를 위한 재단을 만들고 싶어요. 힘들 때 찾아와서 상담도 하고, 정기적으로 만나 여행도 가고, 인권강의도 듣고, 지역봉사도 하고, 어렵게 사는 소년·소녀 가장 후원도 하는 그런 좋은 일을 하는 재단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곧 비영리단체 등록을 할 거고요. 그다음에 재단 준비를 해야죠. 그리고 또 한 가지 꿈은 아주 재밌고 유익한 근현대 역사책을 만들고 싶어요. 정말 근사한 역사책. 1980년 전두환이 등장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는 그 시기를 중심으로 우리 근현대사를 통으로 배울 수 있는 역사책이죠. 이 책 중간중간에 삼청 사례를 삽화로 넣었으면 좋겠어요. 표지도 이쁘고 내용도 재밌는 것으로. 툭하면 ‘삼청교육대 부활’ 같은 소리 다시는 안 나오게요.”
― 삼청교육대 부활, 아주 고질적인 악담이죠.
“흉악범 관련 기사에는 꼭 ‘삼청교육대 부활’ 어쩌고 하는 댓글이 붙어요. 삼청 피해자분들을 흉악범 집단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인권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정작 깊이 들어가면 뭔가 삼청 피해자들을 낮잡아 보는 게 느껴져요. 노골적으로 말 안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알거든요. 장애 인권운동 할 때와 느낌이 달라요. 인권운동가들이 삼청 피해자들 도울 때 뭔가 흔쾌하지 않은 찜찜함이 전해져 오거든요. 그저 오해이기를 바랄 뿐이에요.”
여성 비율이 가장 높은 삼청교육 피해자 조직
마지막으로 오수미 대표에게 인생에서 가장 좋은 기억 3가지와 나쁜 기억 3가지를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답이 왔다.
― 가장 좋은 기억 3가지
큰 아이 도영이가 태어난 날
오빠와 함께 맛있는 커피를 마시던 날
처음으로 1억을 가졌을 때
― 가장 나쁜 기억 3가지
오빠가 하늘나라로 떠난 날
동생이 하늘나라로 떠난 날
처음 아버지가 삼청 피해자라는 것을 알게 되던 날
각 항목에 대해 조목조목 사연을 들었으나 옮기지 않는다.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밝힌 본인의 인생을 몇 가지 순간으로 집약해주는 답이었다. 짤막한 문장마다 긴 여운이 남았다.
오수미 대표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관심’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고아원에 갔지만 사랑을 받았다”며 웃었다. 친구들도 많았고 외롭지 않았다고 했다. “가난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말도 했다. 너무 힘든 환경을 다 겪어서 웬만한 건 다 즐거웠다고 했다. 무서운 건 따로 있다며 ‘감기’라고 했다. 감기에 걸리면 일을 할 수 없으니까.
삼청교육 피해자유족회는 회원의 40%가 유가족이다. 유가족은 대부분 여성이다. 지금까지 등장한 삼청교육 관련 단체 중 여성 비율이 가장 높다. 오수미 대표는 “피해자나 유족의 아픔을 치유해가는 방향으로 새로운 활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들이 행복해야 해요. 저의 무모함이 이들에게도 전파되어 밝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큽니다. 우울함은 이제 개나 주라고 외치고 싶고 자존감도 높여드리고 싶어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인생극장을 써온 그는, 이제 매일 자신과 삼청교육 피해자유족회를 위해 주문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 ‘오수미 파이팅! 삼청 피해자 파이팅!!’ (삼청교육 피해자유족회 02-395-8336, samch1980@naver.com)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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