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서, 눈 위서, 자선가 집 계단서… 치열했던 ‘엄마 되기’ [북리뷰]

박동미 기자 2024. 2. 23.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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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역사
세라 놋 지음│이진옥 옮김│나무옆의자
워킹맘 역사학자의 ‘모성’ 탐구
17 ~ 20세기 걸친 영국·북미지역
어머니들의 일기 등 사료 조명
“엄마노릇위해 연대 필요” 주장
출산장소·육아 변화상 흥미
영국선 유모·간호사에 젖 물려
‘모유 제공’ 신문 구직 광고도
게티이미지뱅크

저출생 시대. 해결책은 난망한데, 서점가만 슬쩍 훑어도 0.7대 합계출산율의 상승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여성에게 집중된 돌봄노동의 부당함,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여성들의 고충, 그리고 ‘만들어진’ 모성 신화에 대해 논하는 책들이 최근 몇 년간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당면 문제를 고발하는 책은 많지만, 인류의 오랜 역사 중 가장 일상적이었던(물론 더는 일상적이지 않다) 경험, 즉 ‘엄마 되기’와 ‘엄마 노릇’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연구는 드물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만의 것은 아니어서, 두 아이의 엄마이자 미국 인디애나대 역사학 교수인 저자 역시 의문을 갖는다. 전쟁과 혁명 등 공적인 영역에서 남성들의 행위와 흔적을 방대하고 상세하게 남긴 역사가들이, 왜 아이를 키우는 일상의 역사엔 관심을 갖지 않았는가. 왜 평범한 여성들의 수많은 경험을 사라지게, 잊히게 했는가.

앞서간 이들의 책임을 꼬집는 저자는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예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잃어버린 이야기를 되살려낸다. 책은 주로 17∼20세기 말까지 영국과 북미 지역의 ‘어머니’를 조명한다. 저자는 과거 어머니들이 남긴 일기와 편지, 짤막한 메모, 법정 기록의 한 줄, 그림 속 인물 등 흥미로운 자료를 탐사하는 방식으로 연구했고, 그들의 임신과 출산, 육아에 관한 과거 일화들 사이에 자신의 경험을 더해 역사서와 회고록의 결합을 시도한다. 일화 중심에 일인칭 화법. 그 친밀함과 독창성으로 책은 읽기 전부터 후한 점수를 받는다.

책이 수집한 경험들, 즉 엄마가 되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세대와 시대, 여러 문화권을 넘나든다. 우선 ‘신약성서’의 거룩한 ‘수태고지’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것은 이제 화장실에서 단 몇 초 만에 이뤄진다. 마리아에게 회임 사실을 알려주던 천사의 역할은 임신테스트기가 맡았다. 또 생리 중단이 임신의 강력한 첫 신호인 지금과 달리, 과거엔 보다 복잡한 기준과 긴 시간이 걸려 임신이 확정됐다. 책에 따르면 17세기엔 영양실조로 인해 많은 여성의 생리 주기가 불규칙했다. 당시 산파 제인 샤프가 신체 변화 등을 토대로 만든 14가지 임신 증상 중 생리 중단은 여섯 번째에 있을 정도다. 또한 여성이 의사에게 임신 진단을 받으러 가는 경우가 드물어, 임신 당사자가 몇 주차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시 성서 이야기.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도 출산 장소의 변천을 들여다보면, 그다지 예외적인 장소가 아니다. 18세기 북미 원주민 체로키족도 외딴 오두막에 칩거하다 아이를 낳았다. 사실 출산이 기술과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한 의학의 세계로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책은 주로 친구들과 이웃, 자매와 어머니들에 둘러싸여 아이를 낳았던 전통 세계의 출산 환경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나무 뒤편, 눈더미 위, 다리 옆이기도 했고, 빈민구호소나 자선가의 집 계단일 때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대기, 쭈그리기, 힘주기, 배우자나 어머니나 신 부르기, 숨 헐떡이기, 잡아당기기, 밀어내기”로 묘사되는 출산의 장면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게 없지만. 중요한 건 파편처럼 존재하는 ‘출산’ 경험들을 늘어놓는 저자가 그 위에 하나의 ‘사건’인 자신의 출산을 얹는다는 것이다. 이때 ‘출산’은 광범위하면서 내밀하고, 정교하면서도 서정적인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책은 엄마이자 연구자, 일하는 여성, 일하는 엄마인 저자만이 가능한 하나의 ‘장르’가 된다.

노르웨이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의 ‘잠자는 엄마(Sleeping Mother·1883년)’.

21세기 여성들은 이제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아이를 낳느냐 마느냐를 고민하지만, ‘엄마 되기’가 비교적 보편적이었던 20세기엔 ‘모유냐 우유냐’라는 질문이 있었다. 또 좀 더 거슬러 오르면, 당시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여성들은 다른 사람에게 젖을 물렸다. 일반적으로 17세기 영국에선 그 일을 유모나 간호사가 담당했으며, 신문에는 자신이 양질의 모유를 제공할 수 있다는 여성들의 ‘구직’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저자는 우리가 종종 뿌듯하게 거론하는 ‘모성’에 대해선 ‘환상’ 같은 것이라고 지적하며,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연구 활동을 하는 것에 육아가 얼마나 ‘방해’가 됐는지도 토로한다. 개인사를 끌어들였으나 책은 모성이 개인적인 것이 아닌,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다른 측면들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관점을 줄곧 견지한다. 예컨대 저자는 자신이 발굴한 편지들을 통해 앞서간 ‘동지’들을 소환한다. 17∼20세기에 걸쳐 지속한 엄마들의 목소리, 즉 아이를 돌보느라 글쓰기를 중단하거나 연기해야 한다는 자조가 지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우리의 ‘엄마 노릇’에 이 목소리들을 강조한다. 공동체가 중요하다는 것. 몇 세기 전 여성들이 측은하게 느껴진다면, 동시대를 사는 여성들끼리 충분히 ‘동맹’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즉 저자는 엄마와 아기 사이의 ‘연결’만큼이나 엄마들 사이의 ‘연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엄마 경험을 공유할 당사자의 목소리와 당사자의 기록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 저자는 이 책을 쓰며 “위로와 정체성 분리를 동시에 맞닥뜨렸다”며 아이들을 위한 엄마 노릇을 해내며 연구·저술 활동을 해내는 일이 얼마나 치열한 삶이었는지를 보고한다.

책의 영어 원제는 ‘엄마는 동사다(Mother is a verb)’. 행위이자 일이며 노동으로서의 ‘엄마 경험’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자가 책을 통해 역사학자로서 보여준 ‘역사 수행’도 ‘엄마 노릇 하기’처럼 ‘동사’임이 분명하다. 구체적으로 구현된 노동의 한 형태가 있었기에, 이렇게 치열한 책을 인류가 공유하게 됐으니. 484쪽, 1만98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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