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빼앗긴 봄’ 2년…“농사짓고 셋째 아이 두고 싶다”

노지원 기자 2024. 2. 23.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시민 5인이 전하는 ‘전쟁 2년’
2022년 10월8일(현지시각) 마리나가 두번째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하르키우에서 남편과 만났을 당시 모습. 당시 마리나는 르비우에서 피란 중이어서 일을 마친 금요일 저녁 기차를 타고 토요일에 남편이 군 복무 중인 하르키우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사진에 보이는 ‘사랑의 다리’에 자물쇠를 채우고 행운을 빌며 열쇠를 물로 던졌다. 마리나는 이날 남편과 단 몇시간 짧게 만난 뒤 바로 다음날 다시 르비우로 돌아가야 했다. 본인 제공

☞한겨레 뉴스레터 H:730 구독하기. 검색창에 ‘h:730’을 쳐보세요.

점령군과 함께 닥쳐온 우크라이나의 봄이 어느덧 두차례 지나갔다. 곧 세번째 ‘전쟁의 봄’이 온다.

우크라이나 북동부 격전지 하르키우주의 대도시 살티우카 출신인 마리나 파시치니크(39)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2년 동안 봄마다 뱃속 아기를 잃었다. “러시아군이 엄마, 아빠가 되려는 소중한 꿈을 빼앗아 갔습니다.” 군인들은 부상 뒤에도 전장에 복귀하고 어떤 이들은 낯선 곳에서의 삶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2022년 2월24일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2주년을 맞는다. 우크라이나군은 지난해 6월 반격 공세를 시작했지만 서방 지원이 늦어지고 러시아군이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겨레는 그동안 수도 키이우를 비롯해 서부 피란 도시 르비우, 폴란드 국경 등을 취재했다. 전쟁 2년을 맞아 현장에서 만났던 이들을 다시 찾았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물었다. 현재 최전방에서 전투 중인 군인에게서는 전선의 생생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는 2월 중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전쟁이 아이를 ‘또’ 빼앗아 갔다”

마리나의 첫번째 유산은 2022년 2월24일 러시아군이 침공 직후 하르키우에 폭탄을 쏟아부었던 3월이었다. 당시 임신 13주차였다. 전쟁 엿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이의 심장은 잘 뛰고 있었다. 의사는 심각한 스트레스가 유산의 원인이라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2년차로 접어든 지난봄, 뱃속의 아기를 또 잃었다. 어쩌면 기적이 일어나서 태아가 다시 숨을 쉴지 모른다는 생각에 뱃속에 그대로 두고 일주일을 버텼다. 소용이 없었다. 부부의 희망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타버린 그들의 보금자리처럼 말이다.

마리나는 지난해 고향인 하르키우로 돌아왔다. 사진은 일을 하고 있는 마리나의 모습. 최근 잦아진 포격으로 현재는 일을 그만둔 상태다. 본인 제공

한겨레가 마리나를 만난 건 전쟁 첫해 연말이었다. 그는 서부 국경도시 르비우에서 국경 내 피란민(IDP)을 돕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피란민이 다른 피란민을 돕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주변 도움을 얻어 방 한칸도 구했다. 하지만 어려움은 계속됐다. 버는 돈의 대부분을 치솟은 월세에 써야 했다. 무엇보다 가족이 그리웠다. 이미 그해 가을 우크라이나군이 하르키우를 탈환한 뒤 피란 나왔던 부모님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난해 남편의 제대를 계기로 1년3개월 만에 살티우카의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온 하르키우에는 하루가 멀다고 거센 포격이 이어진다. 마리나는 한겨레 질문에 답을 적어 내려가는 순간에도 “도시에 두 차례 폭발이 일어났다”고 했다. 아마 다가올 봄에도 도시에는 공습경보가 매일 울리고, 하늘에선 러시아군 미사일이 날아다닐 것이다. 하지만 마리나는 “몸을 잘 회복해서 꼭 엄마가 될 거다. 포기하지 않겠다”며 “승리하는 날까지 스스로를 지키겠다”고 했다. 국제이주기구(IOM)에 따르면 그처럼 국경 내 다른 도시로 피란을 떠난 인구는 지난해 9월 기준 367만4천명, 고국으로 돌아온 이는 457만3천명이다.

“형제들과 살아서 돌아갈 기회 생각하며 전투에 집중한다”

우크라이나군이 재작년 9월 마리나의 고향 하르키우를 수복했을 때, 군인 안톤 파람불(43)은 제1특수목적여단 소속 지휘관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10개월 가까이 이어지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낸 바흐무트 전투, 크레민나 방향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세레브랸스키 숲 전투에도 참여했다. 바흐무트 인근에서 진지를 사수하려다 다쳤지만 목숨만은 건졌다. 동료는 아직도 치료 중이다. 동지를 구하러 온 후송 부대 사령관 올렉산드르는 전사했다.

그는 최근 지난해 대반격을 이끈 47기계화여단으로 옮겨 복무 중이다. “매일 점령군은 (동부 도네츠크주) 스테포베에서 우리 부대를 덮칠 시도를 합니다.” 하루에 100여명 또는 그 이상이 보병전투차량부터 탱크까지 장갑차 두세대를 끌고 오는 상황이 최소 두달 이상 계속되고 있다. 그는 러시아군이 들판, 구덩이, 잔해로 변한 마을 집 아래 숨진 자국군 병사를 묻어놨다고 말했다. “최소 2천명입니다. (러시아군은) 병사들을 아끼는 마음 없이 갈아 넣고 있어요. 앞으로 더 큰 인명 피해가 날 겁니다.”

침공 직후 군에 자원한 안톤은 생사를 다투는 최전선에서의 임무가 두렵지 않으냐고 묻자 “무섭다”면서도 “하지만 내가 두려움을 보이면 동지들 역시 겁에 질릴 수 있다. 형제들과 살아서 돌아갈 기회가 생길 거란 생각으로 오로지 임무에만 몰두한다”고 했다. 700일을 넘어선 전투에 지친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포기’는 생각하지 않는다.

외부에선 협상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나오지만, 현시점에서 타협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수차례 합의를 어겨온 러시아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승리 뒤 가족 품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신이 허락한다면” 세번째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다.

안톤 파람불(43)이 국경 지역에서 동료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던 중 찍은 사진. 뒤로 보이는 표지판에 “주의! 우크라이나 국경”이라고 쓰여 있다. 본인 제공
지난해 최전방 군인 안톤 파람불(43)이 제1특수목적여단 소속으로 러시아 벨고로드 지역 인근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습. 뒤로는 후송 부대 지휘관인 올렉산드르가 보인다. 올렉산드르는 지난해 임무 중 전사했다. 본인 제공

하루하루가 마지막 될 가능성…“내 나라 떠날 마음 없다”

안톤이 2년 내내 최전방에서 러시아군과 맞서고 있다면, 여성 국토방위군 스비틀라나 레흐카(46)는 지난 2년을 “전선과 전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보냈다. 대학에서 무용을 가르치던 발레리나는 전쟁 뒤 국토방위군에 자원했다. 재작년 6월 한겨레가 보로댠카에서 그를 만났을 당시 전선으로 각종 인도 지원 물품과 의약품 등을 전달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후 그는 아예 직업을 바꿨다. 군을 위한 자선단체를 설립했다. 구호품을 사거나 모으고, 포장해 옮기는 게 주 업무다. 지난해 6월 남부 노바카호우카댐 붕괴 때는 직접 현장으로 가 피해 복구에 손을 보탰다.

시시때때로 전방을 찾는 그에게 전장의 상황을 물었다. “병사들은 매우 지쳤어요. 집으로, 가족과 친척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해요. 하지만 먼저 적을 무찌르고 나서요.”

그는 지난해 12월31일 최전방에서 임무 중인 파트너와 평생을 약속했다. 1년 반 전 청혼을 받을 땐 “전쟁이 끝나면”이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이번엔 “전쟁 때문에” 발걸음을 내딛기로 했다. “하루하루가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왜 기쁨과 행복을 유예하겠어요?”

전쟁 이후 건강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그에게 다른 나라로 피란 갈 계획이 없는지를 묻자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내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쓸모가 있습니다.”

지난해 6월13일 스비틀라나의 자선재단 ‘스비틀리’(Svitlii) 소속 예술가들이 동부 도네츠크주 리만 쪽 전선 대피호에서 국경 지역 병사들을 위해 공연을 한 뒤 찍은 기념사진. 본인 제공
지난해 12월31일 스비틀라나는 그의 파트너 세르히 보리소우와 그가 임무를 수행 중인 최전방 지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본인 제공

또 다른 전쟁 같은 피란민의 삶…“무너지지 않으려 노력”

하지만 모두가 스비틀라나처럼 버틸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많은 우크라이나 엄마들은 자식을 지키기 위해 결단을 해야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말이다. 전쟁 뒤 우크라이나인 600만명 이상이 유럽 등 이웃 국가들로 피란을 떠났다. 피란민 가운데 상당수가 여성과 아이들이다. 지난해 11월 기준 우크라이나 난민 약 420만명 이상이 유럽연합(EU)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임시 보호 조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피란민 나탈리야 키리첸코(48)는 대학생 딸 마샤와 함께 약 2년 동안 독일 베를린에서 지내고 있다. 한겨레가 그의 가족을 만난 1년 전 크리스마스 때는 70살이 넘은 아버지 올렉산드르도 함께였지만, 현재 모녀 둘만 남았다. 아버지는 나이 든 누나를 돌보기 위해 고향 자포리자로 돌아가야 했다. 현지 상황은 극도로 어렵다. “전투지와 불과 40㎞ 떨어진 곳이라 포격이 끊이지 않는다고 해요.” 나탈리야의 남동생 보단은 최근 군의 부름을 받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편은 건강 문제로 동원 대상에서 빠졌다.

독일 정부와 사회의 도움으로 모녀는 새 보금자리를 얻었다. 현재는 오데사에서 온 우크라이나 이웃과 함께 지낸다. 정부가 주거뿐 아니라 언어 수업, 보험 등 각종 비용을 지원해주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25년간 교직 생활을 한 그는 현재 독일어 중급 과정(B1)을 통과했고 좀 더 실력을 쌓아 독일 학교에 취업할 계획이다.

포격 아래서 목숨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진 않지만, 타지에서의 삶 역시 때때로 ‘전쟁’처럼 느껴진다. 특히 딸 마샤가 난민센터에서 지내는 동안 정신병을 얻었을 땐 무너지지 않기 위해 큰 노력이 필요했다. 베를린 테겔 난민센터에서는 평범한 삶을 강탈당한 뒤 희망을 잃어가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술과 마약을 찾고 24시간 내내 깨어 있으면서도 뭘 할지 모르는 그런 모습들을 말이다. 마샤는 석달 동안 집중치료를 받은 뒤 현재는 많이 나아졌지만 2년 정도는 더 치료를 받아야 한다.

나탈리야와 마샤 모녀가 베를린에서 새로 만나 함께 살게 된 오데사 출신 가족과 지난해 8월 한 살이 된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본인 제공

고물가에 비어가는 주머니 사정…“국외 이주 고민”

전쟁 시작 뒤 한시도 키이우를 떠난 적 없는 카테리나 폴리시추크(35)는 요즘 이주를 고민한다. “봉급이 너무 적은데 물가는 아주 빠르게 올라서 살기가 힘들어요. 직장을 외국으로 옮길까 고민합니다.” 전쟁 전 급여가 적다고 느낀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식료품, 생필품 할 것 없이 모든 게 너무 비싸다. 꾸준히 군이나 드론을 만드는 회사에 기부금을 보내왔는데 이젠 돈이 없다. 외국에서 일하면 유로나 달러로 돈을 받을 테니 좀 더 나을 것 같다. 가족들도 도울 수 있다.

지난해 10월 카테리나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한 서점에서 셀프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본인 제공

전쟁 첫해 10월 러시아가 겨울을 앞두고 우크라이나의 주요 에너지 시설을 겨냥한 대규모 공격을 퍼부을 때 카테리나는 현지 정전 상황을 한겨레에 전해왔다. 그는 “서방 동맹국이 지원한 미사일 방공 시스템 등으로 수도의 하늘과 에너지 시설이 안정을 되찾은 건 그때와 크게 달라진 점”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러시아뿐 아니라 “내부의 적”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점도 변한 풍경이다. 현지 언론을 통해 군납 비리 등 정부 관료의 부패 스캔들이 터져나왔다. 카테리나는 “분노가 치민다”고 했다. “이자들이 군에 가야 할 돈을 훔치고 있다면 우리 승리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정부가 군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겨레가 만난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전쟁 2년이 가져온 어려움과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염원했다. 카테리나는 “부모가 러시아 지배 아래 살고, 아이들이 또다시 그런 삶을 산다”며 “반복이다. 러시아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탈리야는 “누군가는 휴전하고 국경을 동결하자고 주장하지만, 전쟁의 부담을 짊어진 우크라이나 사람들만이 전쟁을 어떻게 끝낼지 조건을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스비틀라나는 이 전쟁이 우크라이나만의 것이 아니라며 “전세계 사람들이 무관심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 스스로 이런 운명을 택한 게 아닙니다. 어느 나라든 같은 대학살을 겪을 수 있습니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