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의 직설] 같은 독일 출신인데…극명하게 대비되는 ‘한국의 클린스만’과 ‘일본의 크라머’
한국대신 미국과 유럽 '투어'클린스만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이라도 사람들마다 차이와 구별이 있다. 데트마르 크라머와 위르겐 클린스만. 독일 사람들이다. 하물며 같은 축구 감독. 그러나 달라도 너무 다르다. 두 사람이 각각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보인 행태와 그 영향력의 차이는 너무 크다.
크라머는 ‘일본축구의 아버지’로 불린다. 1960년부터 3년 남짓 국가대표 팀 기술고문으로 있으면서 일본축구의 100년을 마련한 인물로 꼽힌다. 일본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국가대표 감독이나 선수들이 축구지도자뿐 아니라 인간 크라머를 존경한다. 그의 공헌에 감사한다. 그에 대한 만화영화가 2022년에 만들어질 정도다.
클린스만은 어떤가? 한국축구를 최악의 상태로 몰고 간 무능력자로 꼽힌다. 무엇보다 기본 염치조차 없는 인간성으로 조롱당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클린스만만큼 한국에서 욕을 많이 먹은 독일인이 있을까? 더 말하기조차 딱하고 안타깝다.
■선수들과 함께 여관에서 합숙한 크라머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위해 35세의 독일 청소년 대표 팀 감독 크라머를 초빙했다. 60년 하네다 공항에서 크라머를 맞이한 오카노 슌이치로 대표 팀 코치는 그를 축구협회가 마련한 도쿄 시내의 유명 호텔에 데려가려 했다.
“선수들은 어디 있나요?”
“지방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묵는 여관에 있습니다.”
“당장 거기로 갑시다.”
“선수들은 다다미에서 자고, 아침은 밥에다 연어구이, 된장국, 점심은 덮밥 등을 먹습니다. 갑자기 그런 일본 생활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크라머는 “선수와 같은 생활을 하지 않고서 어떻게 선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내일부터는 거기로 가도록 해달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게 크라머는 선수들과 함께 여관에서 합숙생활을 시작했다. 삼시세끼를 같이 하며 선수들과 같은 눈높이에 서려고 했다. 낯선 일본생활과 정서, 문화에 녹아드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크라머는 축구기술·이론만 가르치지 않았다. 그의 중요 일과 중 하나는 밤에 선수들의 방을 돌아다니며 확인하는 것. 선수들이 딴 짓 하는지를 감시하는 군대식 점호가 아니었다. 선수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하려고 이불을 덮어주는 것이었다.” 선수가 다쳤을 때는 직접 테이핑이나 붕대를 감아 주었다. 일본축구 명예전당에 헌액된, 당시 공격수 스기야마 류이치는 “지도자로서 그는 환상적이었지만 인간으로서도 너무나 매력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쏟아부었다. 서양인이 하기 힘든 동양식 인간 접근법으로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종과 문화차이를 넘어 다른 나라의 국가대표를 맡았다면 당연히 가져야 할 엄중한 책임성에 조금의 소홀함이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크라머는 요청이 있으면 북쪽 홋카이도부터 남단 큐슈까지 어디든지 가서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어린이와 젊은 선수들을 지도했다. 크라머를 50여 년간 취재했던 ‘아사히 신문’ 축구기자 츄우죠 가즈오는 2008년 “어느 곳에서 어린이로부터 ‘예전에 크라머 선생님에게 배운 코치께서 가르쳐 주셨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크라머가 일본 전역에 뿌린 씨앗은 아들로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전해져 꽃이 피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 유럽으로 떠도는 클린스만
클린스만은 어떤가? 한국에 머무는 것을 아주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설마 축구협회가 허름한 숙소를 잡아주지는 않았을 것. 그런데도 틈만 나면 미국의 집으로나 유럽으로 내빼기 바빴다. 한국에 계속 머물러야 선수들의 마음과 한국축구를 더 많이 알고 이해할 것 아닌가? 그는 K-리그 경기조차 제대로 보지 않았다. 국가대표 감독을 여가 선용을 위한 자리로 생각했는지 한국선수나 한국축구에 깊은 애정이나 책임성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국의 생활·정서·문화에 녹아들기는커녕 최소한의 존중도 하지 않는 행태를 서슴없이 보인다.
클린스만은 세월이 바뀌었다고 변명할지 모른다. 크라머 마냥 여관에 머물며 이불이나 덮어주는 시대가 아니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는 진정성의 가치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본에서 보인 크라머의 진정성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클린스만은 알아야 한다.
일본을 떠난 지 60년이 지났어도 크라머는 결코 일본에서 잊히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일본에 끼친 선한 영향력은 넓고도 깊다.
크라머가 가르친 일본 팀은 도쿄 올림픽에서 사상 첫 8강에 진출했다. 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다. 모두 크라머가 바이에른 뮌헨 감독을 맡아 일본을 떠난 뒤의 일. 그런데도 일본 축구인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덕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멕시코 올림픽 때 주장은 오카노 코치에게 “나는 크라머를 위해 싸울 겁니다”라고 말했다. 얼마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면 이미 5년 전에 떠난 그를 떠올리며 투지를 불태웠을까?
현재 일본 감독인 모리야스 하지메는 도쿄 올림픽 감독으로 임명될 때 “일본축구의 아버지로 불린 크라머의 가르침대로 세계에 일본축구의 이름을 울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직접 크라머에게 배워 본 적이 없다.
22년 11월 카타르 월드컵 일본과 독일의 시합일. 도쿄 독일대사관에서는 일본 외무장관, 국회의원, 독일 대사 등이 함께 경기를 보는 행사가 열렸다. “일본인들은 일본축구의 역사가 크라머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즈오 기자는 “일본 축구계가 크라머를 얻은 것은 더 없는 행운이었다. 그 없이 일본축구의 오늘은 없을 것이라 단언해도 좋다.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축구 관계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코치뿐 아니라 통역으로서 크라머와 함께 했던 오카노는 도쿄대 심리학과 출신. 대표 팀 감독과 일본축구협회 회장, IOC 위원 등을 지냈다. 그는 “선수들은 크라머를 절대 신뢰했다. 엄격한 아버지 같기도 하고, 사랑에 찬 어머니 같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선수들뿐 아니라 축구인들도 크라머를 믿었다. 오카노는 “크라머의 제언으로 65년에 일본 축구 리그가 태어났다. ‘경기력을 높이기 위해서 리그가 필요하다’는 그의 발상에서 아이스하키, 배구, 핸드볼 등 다른 스포츠에서도 ‘일본 리그’가 만들어졌다. 크라머의 제언은 체육계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일본축구 발전은 모두 크라머에게 연결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며 “그는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기본을 일본에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다. 더 이상 극찬이 있을 수 없다.
■크라머를 몰아낸 한국축구
그런 크라머도 한국에서는 1년 남짓 만에 쫓겨났다. 일본 축구인들의 열린 자세와는 달리 꽉 막힌 한국 축구인들의 악습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에서처럼 선수들의 마음은 얻었다. 일본과는 달리 축구인들의 닫힌 자세와 심한 텃세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크라머는 올림픽 대표 팀 총감독 및 기술고문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김삼락 감독 김호곤 코치 등이 크라머에 제동을 걸었다. 이들은 크라머의 지도 방식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크라머는 코치들이 선수 사생활을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코치들은 그가 선수들을 너무 자유롭게 놔둔다고 불평했다.
크라머는 주전 선수 혹사를 당연시하는 한국 풍토를 강하게 비판했다. 부상 중인 서정원을 무리하게 A매치에 출전시키려는 협회 결정에 “전패를 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러면 안된다”고반대했다. 그러나 혼자서 서열문화, 군대식 상명하복 문화 등 축구계의 온갖 악습을 고칠 수 없었다. 최근 파울루 벤투나 클린스만이 몇 선수를 혹사 논란에도 줄기차게 뛰게 한 것도 협회 등 축구계 토착세력들의 입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은 한국인 코치들을 일방 두둔했다. 크라머가 한국을 잘 모른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협회도 별 지원을 하지 않았다.” 크라머는 한국을 올림픽 본선에 바로 진출시켰다. 그러나 본선은 치르지 못한 채 독일로 돌아갔다. 이후 “한국이 나를 왜 불렀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남겼다. 한국은 올림픽 본선에서 3무로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신태용, 최용수, 서정원 등 선수들은 지금도 크라머의 지도력과 인간성을 존경한다. 실제 감독으로서 크라머의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크라머를 몰아냈던 축구협회의 악습.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은 악습이 클린스만을 만들었다. 축구계의 고인물들은 클린스만을 만만하게 다룰 수 있다고 골랐을 것이다. 클린스만은 그 악습에 순응하는 체 하면서, 악습을 적절히 악용하며 즐기고 있다. 한국축구의 비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Copyright © 마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