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책] 역사자료 섭렵, 인간이해 확충…인물전 연구로 쌓은 한국학 기초

한겨레 2024. 2. 2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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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고전인물전연구’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나는 1975년 대학에 입학했다. 그해 5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어, 대학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학문의 길을 택한 탓이겠지만, 나는 끊임없는 회의와 마주해야 했으며, 학문의 방향성에 대한 암중모색을 해야 했다. 나의 학문을 관통하는 비판적 사유와 성찰적 태도, 모종의 긴장감과 방법론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 과정에서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나의 첫 책은 ‘한국고전인물전연구’(1992, 한길사)다. 이 책은 1986년 부산 경성대에 자리 잡은 후 구상되었다. 고전인물전은 전통 시대의 한 독특한 글쓰기로 짧은 편폭 속에 한 인물의 굴곡진 삶을 담아 놓고 있다. 이 점에서 문학과 역사의 접점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의 주된 관심사는 역사 속에 부상하는 새로운 주체 및 체제에 균열을 내거나 저항하는 하위주체들에 대한 탐구다. 고려 말의 신흥 사대부 지식인과 조선 전기의 사림파 문인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이인(異人)이나 신선, 유협, 예인(藝人)과 같은 존재는 후자에 해당한다. 인물전에 형상화된 이들의 역사적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때로는 사회사적 접근이, 때로는 사상사나 예술사적 접근이 시도되었다.

나의 학문적 도정에서 인물전 연구는 다음의 두 가지 의의를 갖는다. 하나는 광범한 역사 자료를 섭렵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인물전 연구는 그냥 인물전만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을 비롯한 각종 문헌 자료를 샅샅이 뒤져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인물전을 연구하면서 나는 자료 더미 속에 묻혀 살았다. 내 30대 초반의 인생이 이렇게 흘러갔다. 이 과정에서 나는 자료를 다루는 법, 자료에서 눈대목을 읽어내는 법, 자료에 숨겨져 있는 자료 너머의 목소리를 읽어내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 책을 쓰는 동안 나의 한국학 기초가 다져진 셈이다.

두 번째 의의는 인간에 대한 나의 인식 수준을 높이고 확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인문학은 구경에는 인간에 대한 탐구다. 인물전 연구는 사회적・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나의 이해 지평을 크게 확장시켜 주었다. 고려 후기로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역사 속에 명멸한 수많은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나의 학문적 자아는 커지고 깊어질 수 있었다. 이 책으로 인해 ‘인간’과 ‘역사’는 내 학문의 기본축이 되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거의 모두 부산에 거주하던 3년 동안 쓴 것이다. 그 시절 나는 밥 먹고 강의하고 잠자는 것 빼고는 자료 읽고 글 쓰는 데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내 학문의 여정에서 기념이 되는 책이다. 학자로서의 고고지성(呱呱之聲)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어렴풋이나마 내 학문의 정체성, 내 학문적 지향성의 윤곽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인물전 연구는 역사학에 가깝다. 그럼에도 나의 이 연구는 작자의 이념이나 사상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여하히 규정하는가, 글쓰기에서 작자의 세계관은 삶과 현실에 여하히 작용하는가,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집단이나 계층 혹은 계급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하는 등등의 문예학적 내지 사회학적 문제의식을 그 핵심에 내장(內藏)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의 바탕에는 내가 20대에 한창 몰두했던 문예사회학(Literatursoziologie) 공부가 자리하고 있다.

인물전 연구 이후 나의 관심은 전기소설(傳奇小說)로 옮겨갔다. 그 성과가 ‘한국전기소설의 미학’(돌베개, 1997)이다. 전기소설 연구에서 나는 이념과 형식, 세계관과 형식의 내적 연관에 대한 탐구를 좀 더 심화시킬 수 있었다. 나는 특히 김시습의 ‘금오신화’ 분석을 통해 텍스트의 내면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가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마흔 살 고개를 넘으면서 나는 사상사와 예술사 쪽으로 관심을 확대했다. ‘한국의 생태사상’(1999), ‘운화와 근대’(2003), ‘범애와 평등’(2013),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2018) 등이 그 성과다. 문학 공부에서 출발해 사상사와 예술사 공부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는 인문학 연구는 모름지기 통합적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깨달았으며, 마침내 ‘통합인문학’을 주창하게 되었다. 2020년에 낸 ‘통합인문학을 위하여’는 그 이론적 정초(定礎)를 꾀한 책이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나의 첫 책 ‘한국고전인물전연구’는 문학·역사·사상·예술을 통합적으로 연구하는 통합인문학의 출발점이었다고 생각된다.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

■그리고 다음 책들

한국의 생태사상
나는 1990년대 초부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해 재사유(再思惟)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담헌 홍대용의 저작을 다시 읽으며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나의 사유틀을 다시 짜게 되었다. 이 책이 그 성과다.
돌베개(1999)

운화와 근대
이 책의 부제 ‘최한기 사상에 대한 음미’가 말해 주듯 최한기 사상에 대한 연구서다. 기존의 최한기 연구가 모두 ‘근대확인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과 달리 ‘근대성찰적 관점’을 취했다. 시좌(視座)의 일대 전환이다. 몹시 중요한 문제를, 작심하고 아주 짧게 쓴 게 이 책의 특징이다.
돌베개(2003)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 1・2
내가 40대 초반부터 20년 가까이 만지작거려 온 18세기 중엽의 문제적 문인이자 서화가인 이인상의 그림과 글씨에 대한 비평적 분석서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이인상의 서화를 자나깨나 응시하며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되풀이했었다. 고된 작업이었지만 행복한 경험이었다.
돌베개(2018)

한국고전문학사강의 1・2・3
정년퇴임을 앞둔 마지막 학기 학부 강의의 녹취록을 토대로 한 책이다. 기존의 문학사는 흔히 시대구분과 장르론적 구분에 매몰되어 있거나, 잡다한 사실과 지식의 나열이기 일쑤인데, 이런 것을 지양하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들여다보는 데 힘을 쏟았다. 애초 계획에 없었던 책이다.
돌베개(2023)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 2016년 한겨레와 인터뷰할 때의 모습이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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