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한반도 개벽사상의 세계화를 향한 치열한 탐색

고명섭 기자 2024. 2. 2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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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TV의 ‘종교 공부’ 갈무리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창비 제공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K사상의 세계화를 위하여
백낙청·김용옥·정지창·이은선 외 지음 l 창비 l 2만6000원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사이에 등장한 한반도 개벽사상은 민중 주체의 종교운동으로 전개됐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동학-증산교-원불교로 이어지는 이 개벽사상‧개벽종교에 대한 연구 성과는 상당히 축적됐으나, 그 내용이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개벽사상과 종교공부’는 이 한반도 개벽사상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를 심화하는 차원에서 기획된 작업의 결과물이다. 더 나아가 이 책은 부제(‘K사상의 세계화를 위하여’)가 가리키는 대로 한반도 개벽사상이 세계 곳곳의 변혁운동에 도움이 되는 세계적 사상으로 도약하는 데 어떤 준비와 노력이 필요한지 논의하는 장이기도 하다.

이 책의 바탕이 된 것은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의 유튜브방송 ‘백낙청TV’에서 2023년 한 해 동안 진행한 세 편의 ‘종교 공부’다. 백낙청이 사회를 맡고 관련 연구자들이 함께해 해당 종교를 놓고 사회자와 더불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동학‧천도교 편’에는 동학 연구자 김용휘(대구대 교수)와 정지창(전 영남대 교수)이 출연했고, ‘원불교 편’에는 원불교 연구자 방길튼(원불교 안산국제교당 교무)과 허석(원광대 교수)이 나왔다. 또 ‘기독교 편’에는 개벽사상에 관심이 큰 신학자 이정배(감신대 은퇴교수)-이은선(세종대 명예교수) 부부가 나왔다. 이 세 편의 ‘종교 공부’를 기획하는 데 계기가 된 것은 2021년 도올 김용옥(전 고려대 교수)의 ‘동경대전’ 출간을 기념해 ‘창작과비평’에서 백낙청‧도올‧박맹수(원광대 명예교수) 3인이 함께 한 ‘특별좌담’이다. 이 책은 그 특별좌담을 서두에 배치했는데, 책 전체를 아우르는 서론이자 전체 논의의 핵심을 관통하는 벼리 구실을 한다.

도올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 창비 제공

이 책은 공통의 관심를 품은 사람들의 공동작품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참석자마다 생각의 차이가 뚜렷이 드러나는 대목이 적지 않다. ‘특별좌담’에서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의 사상과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박중빈의 사상을 비교하는 도올과 백낙청의 대화가 그런 경우다. 동학이나 원불교나 개벽사상이었고 민중 중심 사상이었으며 남녀평등 사상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도올은 이런 공통점을 인정하면서도 사상의 독창성에서 수운을 소태산보다 훨씬 더 높게 평가한다. 수운은 조선왕조 말기인 1860년 대각했고, 소태산은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6년에 깨달음을 얻었다.

도올은 수운이 왕조 체제의 붕괴를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보편적인 보국안민의 태세를 구상했으나, 소태산은 이미 무너진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삶의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고 본다. “수운은 민족 전체의 운명을 대상으로 하는 혁명적 사상가였다면, 소태산은 작은 규모에서 출발하는 로컬한 공동체운동가였다.”

반면에 백낙청은 “수운‧증산‧소태산이 각자 뚜렷한 특징과 성향의 사상가들이지만 크게 보아 한반도 후천개벽 사상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고, 그 전통이 소태산에 이르러 한층 세계화된 ‘K사상’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소태산에 와서 후천개벽이라는 한반도 특유의 흐름과 불교라는 세계종교 반열에 오른 사상의 융합이 이루어짐으로써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새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동학과 그 후신인 천도교의 사상에 대한 더 구체적인 논의는 ‘동학 편’에서 이루어진다. 이 대화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수운의 ‘불연기연’(不然其然) 사상에 대한 논의다. ‘불연기연’은 수운이 1863년 잡혀가 참수당하기 전 지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다. 분량은 짧지만 내용이 극히 압축적이어서 연구자들마다 해석이 제각각인 문제적 논문이다. 도올은 ‘동경대전’에서 이 논문이 서학, 곧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 실린 ‘신 존재 증명’과 맞대결한다는 의식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신을 초월적인 존재로 상정하는 기독교의 수직적 사유 구조를 혁파하는 것이 ‘불연기연’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때 ‘불연’(不然, 그러하지 않음)은 초경험적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기연’(其然, 그러함)은 반대로 상식적 세계를 가리킨다. 기독교가 말하는 초월적인 것(불연)은 결국 상식적인 것(기연)임을 수운이 갈파하고 있다는 것이 도올의 주장이다. 요컨대 “불연은 기연이다.” 초합리적인 세계는 합리적인 상식적 세계를 통해 해명 가능하다는 것이 수운의 마지막 메시지라는 것이다.

동학 연구자 김용휘는 도올의 해석을 “아주 명쾌하고도 시원한 해석”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다른 측면 곧 “불연이 기연일 수 있다면 기연도 불연일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보자고 말한다. “불연의 사유라는 도그마에 빠진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유일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김용휘는 오늘날의 ‘과학적 유물론’이나 ‘물리주의’를 그런 사례로 거론하면서 “불연기연이라는 말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있고 불연의 세계는 없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의 뜻도 있다”고 말한다. ‘불연의 초월적 세계’가 모두 ‘기연의 상식적 세계’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수운은 상식과 함께 초월, 곧 “하늘에 대한 경외지심”도 함께 말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백낙청은 ‘불연=기연’이라는 도올의 상식론을 지지하는 쪽에 선다.

이어 원불교 편에서는 소태산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여기서 참석자들이 주목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원불교의 ‘사은’ 사상이다. 소태산은 ‘일원상’의 진리를 바탕으로 삼아 ‘네 가지 은혜’(사은)를 밝혔는데, 천지은‧부모은‧동포은‧법률은이 그것이다. 이 사은 가운데 잘못 이해될 가능성이 큰 것이 ‘법률은’이다. 세상의 모든 법이 다 진리에서 나온 은혜라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방길튼은 소태산이 말한 ‘법률’은 “인도와 정의의 공정한 법칙”을 가리키는 것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데서 정의롭고 공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문명의 길”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법률에 순응하라는 것은 인도‧정의의 공정한 법칙을 따르라는 것이지 불공정한 불의에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런 법률은의 가르침은 원불교의 수행교리인 ‘삼학’(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의 작업취사, 곧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라’는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기독교 편에서 서구 기독교 신학을 전공한 두 사람(이은선‧이정배)은 서구 신학이 지닌 한계를 살핀 다음, 유영모와 함석헌을 비롯한 근현대 한국 기독교 사상가들의 창조적 사유를 소개한다. 특히 동학에서 원불교로 이어지는 개벽사상에 주목하고 이 개벽사상과 기독교 신학의 종합을 통해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개벽 기독교’를 탄생시킬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다.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 창비 제공
정지창 전 영남대 교수. 창비 제공
방길튼 원불교 안산국제교당 교무. 창비 제공
허석 원광대 교수. 창비 제공
이은선 세종대 명예교수. 창비 제공
이정배 감신대 은퇴교수. 창비 제공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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