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여신의 베일 벗기려는 욕망 대신 ‘절대적 은유’의 풍요를

고명섭 기자 2024. 2. 2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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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학을 창안한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 위키미디어 코먼스

벌거벗은 진리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임홍배 옮김 l 길 l 2만8000원

한스 블루멘베르크(1920~1996)는 ‘은유학’(Metaphorologie)이라는 독특한 이론을 창안한 독일 철학자다. 은둔의 철학자로도 불리는 블루멘베르크는 생의 후반기를 칩거 상태에서 보내며 수많은 글을 썼는데, 그 글들이 사후에 책으로 잇따라 출간됐다. 그런 이유로 생전에 출간한 책보다 사후에 나온 책이 더 많다. ‘벌거벗은 진리’(2019)도 블루멘베르크의 유고를 편집한 책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란츠 가프카를 비롯해 여러 철학자·문인의 사상을 탐사해 진리와 은유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삼는다. 독문학자 임홍배 서울대 교수가 번역하고 상세한 옮긴이 해제를 달았다.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블루멘베르크가 생전에 출간한 책 ‘은유학을 위한 패러다임들’에서 제출한 ‘은유학’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은유학은 한마디로 줄여 ‘은유’(Metapher)의 적극적 기능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통상의 학문은 ‘개념’을 통해 대상을 파악해 탐구한다. 그러므로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은 학문의 영역에 쉽게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기에 학문적 탐구는 은유를 단순한 수사적 기법으로 간주하거나 명확한 개념적 인식에 이르지 못한 불완전한 이해의 표현이라고 본다.

블루멘베르크의 은유학은 개념을 앞세우는 학문의 이런 태도에 반기를 든다. 블루멘베르크가 보기에, 은유는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의 사고 과정뿐만 아니라 개념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한계 영역까지 표현할 수 있다. 은유야말로 개념으로 설명되거나 입증될 수는 없지만 인간이 맞닥뜨리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내준다. 개념적 사고가 미치지 못하는 은유의 영역은 새로운 의미 지평을 열어줌으로써 이론적 탐구의 기반이 된다.

블루멘베르크가 은유학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이 ‘절대적 은유’다. 절대적 은유란 일상적 은유와 달리, 최종적인 답변이 불가능한 물음에 답하는 은유를 말한다. 예를 들어 세계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와 같은 인간 삶의 근본을 묻는 물음은 최종적인 답, 곧 최종적 진리를 찾을 수 없는 물음이지만, 이런 물음을 물음으로써 우리는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개념으로써 명확하게 답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을 가리키는 은유가 절대적 은유다.

이 책 ‘벌거벗은 진리’는 이 절대적 은유 가운데 하나인 ‘벌거벗은 진리’라는 은유를 두루 살피는 작업이다. ‘벌거벗은 진리’라는 말은 모든 은폐의 베일이 벗겨진 완전하고도 투명한 진리를 가리킨다. 근대과학은 진리의 마지막 베일을 벗겨 그 최종 상태에 다가갈 수 있다는 희망에서 출발했다. 17세기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런 희망을 일찍이 명확히 밝힌 사람이다. “진리는 벌거벗은 것이고 대낮의 햇볕과 같아서 세상의 가면이나 위장 또는 개선행렬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근대과학의 정신은 계몽주의를 거치며 모든 학문에서 대세를 장악하는 듯했으나, 19세기 후반 실증주의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니체는 벌거벗은 진리를 향한 인간의 욕망을 파헤쳐 그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니체는 고대 이집트의 ‘베일에 가린 여신상’ 전설을 사례로 들어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그 전설을 시로 쓴 사람이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인데, 실러가 쓴 담시 ‘자이스의 베일에 가린 여신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집트 자이스라는 곳에 여신 이시스의 신상이 베일에 가린 채 모셔져 있다. 그 신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나는 존재하고 있고 존재했고 장차 존재할 모든 것이니, 어떤 인간도 나를 가린 베일을 벗기지 못했노라.” 어느 날 앎의 욕망에 불타는 청년이 밤중에 몰래 신전에 들어가 베일을 벗겼다가 삶의 모든 기쁨을 잃고 죽음을 맞는다.

이 전설을 염두에 두고 니체는 진리의 베일을 벗겨내려는 욕망을 이렇게 비판한다. “이 고약한 취향, 진리를 향한 의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리를 손에 넣겠다는 의지에 우리는 넌더리가 났다. 그런 무모한 짓을 하기에 우리는 경험이 너무 풍부하고, 진지하고, 쾌활하고, 불에 데었고, 너무 심오하다. (…) 우리는 진리에서 베일을 벗겨내더라도 여전히 진리가 진리로 남아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진리를 벌거벗기겠다는 과학의 의지에 대한 비판이다. 블루멘베르크는 “자이스의 여신상에서 베일을 벗겨내는 것은 니체가 보기에, 벌거벗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 광기로 치달은 사태를 나타내는 은유”라고 말한다. 이런 광기는 삶 자체를 파괴하고, 더 나아가 진리 자체를 파괴한다.

니체는 ‘적나라한 진리’는 결코 우리를 만족시키지 않는다는 말도 한다. “사물의 베일을 벗기는 인식은 우리를 사물의 깊은 곳으로 인도하지 않고 단지 또 다른 표면으로 인도할 뿐이다. (…) 벌거벗은 진리는 우리를 실망시킨다.” 이런 니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블루멘베르크는 진리라는 것이 본디 삶 자체의 매력을 해명하는 수단의 하나에 불과한데도 과학이 ‘아름다운 가능성들의 베일’을 벗겨내려고 고집함으로써 결국 삶의 무한한 매력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삶의 생동하는 매력은 진리를 탐하는 과학의 손아귀에 장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의 가장 심오한 영역과 세계의 비밀스런 영역은 과학적 개념의 영역이 아니라 절대적 은유의 영역, 다시 말해 절대적 은유로써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다. “완벽한 개념적 정합성만을 진리의 유일한 척도로 앞세우는 개념적 사고는 개념으로 재단될 수 없고 은유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삶 자체의 풍요를 외면하는 폐쇄성을 면할 수 없다”는 옮긴이의 말은 블루멘베르크의 핵심 주장을 요약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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