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코마에서 깨어난 탐험 여행가가 시대에 보내는 소설적 ‘경고’
2009년 첫 단편집 ‘공쿠르상’
압축과 골계미로 시대 갈파
노숙 인생
실뱅 테송 지음, 백선희 옮김 l 뮤진트리 l 1만7000원
이 작품들을 단지 소설로만 불러도 될까. 지은이부터가 소설가라기보다 탐험 여행가이자 여행 작가로 명망이 높다. 1972년생 프랑스의 실뱅 테송. 스무살 될 무렵 아이슬란드를 횡단한 이래, 갖가지 고행에 가까운 여행을 20여년 지속했다.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히말라야 넘어 인도까지 7천㎞에 이르는 슬라보미르 라비치의 탈출 여정이나 러시아에 패퇴한 나폴레옹 군대의 퇴각길을 좇고, 중앙아시아 3천㎞의 초원을 말 타고 가로질렀다. 2010년 겨울부터 바이칼 호숫가 낡은 오두막에서 여섯달가량 혼자 지내기도 했다. 이때 에세이(2011, 국내 ‘시베리아의 숲에서’)는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테송은 2014년 8월 10미터 높이에서 떨어져 스무 군데 부러지고 의식을 잃었다. 열흘 만에 코마에서 깨어났다. 이후 제 나라를 도보로 횡단해 쓴 책이 다시 동명의 영화가 됐다. 각지에서 이제 그를 ‘철학자’로까지 부르길 마다치 않는다. 가령 “걸음으로써 고통을 벗어난다”는 테송의 아포리즘은 선험이 아니라 죽다 살아난 그가 몸으로 터득한 아주 명징한 진리니까 말이다. 생태와 자유는 금욕적 자유주의로, 인간과 자연은 삶과 삶, 생과 사의 평등 관계로 치환된다.
‘노숙 인생’은 실뱅 테송이 2009년 펴낸 첫번째 단편집이다. 그해 공쿠르상 단편 부문을 수상했다. 국내 소개된 적 없지만, 하룻밤 방랑길에서 혹 그를 만났다면 들었을지도 모를 얘기겠다. 맞다, 말미는 하룻밤이므로 15편의 이야기는 죄다 빠르게 전결(얽히고 맺음)된다. 치레가 없다. 대부분 파국으로 직주하는 풍자 서사에 뒤척였을 여행자, 그리고 여기 독자를 상상해본다.
단편 ‘돼지’가 손에 꼽힌다. 영국 농가의 한 남자가 법원으로 편지를 보냈다. 1969년 대를 이어온 농가를 물려받았으나, 그즈음 “미래가 대량생산에 있다”는 도시 자본가들에 의해 전통축산은 집약축산으로 뒤바뀐다. 풀밭 대신 축사에 빽빽이 갇혀, 풀 대신 고기 사료를 먹은 돼지들의 40년을 남자는 증언한다. 기술 혁신은 해제에도 강했다. 옴짝달싹 못 한 돼지들이 미쳐가자 항우울제를 주사하고, 분뇨 암모니아로 폐가 곪자 사료에 항생제를 섞는다. “고기 한 조각이 쟁취였을 때는 돼지 한 마리의 가치가 컸습니다. 고기 한 조각이 습관이 된 뒤로 돼지는 그저 생산품이 되었고요. 고기가 권리가 된 뒤로 돼지는 제 권리를 잃었다는 거죠.” 돼지는 급기야 쇠창살을 끊으려는 듯 물어뜯는다. “5파운드에 1킬로그램의 고기를 찾는 것이 정상인 사회”에서, 고기 사료로 길러진 새끼 돼지들이 “늑대로 둔갑”할지언정 누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럼에도 도살장으로 실려 가길 마다하는 돼지들의 절규가 남자의 머릿속에 박히고, 남자 또한 악취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간다. 돼지가 민감하고 이타적이며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까운 동물이라는 사실에 질겁한 중학생 아들이 아버지 직업을 공란으로 둔 일까지 겪으며 남자는 분노하고 자책하고 불면하고 절망한다. 남자는 마침내 농장을 처분한다. 그리고 자신을 처분한다. 아들과, 오래전 헤어진 아내에게 남기는 유언장이 바로 편지고, 테송에 의해 편지는 시대에 전달된 ‘인간 살처분’ 안내가 된다.
공장식 축산업의 야만성을 분석하고 고발한 책은 많다. 한 차례 훑고 갈 독자들을 상대로, 유럽의 육식 산업사를 이다지도 간결하고 농밀히 압축하여 주저앉히는 소설이 있었던가.
남자의 자살은 홀로코스트 나치 장교의 자살과 같이, 스스로 택할 수 있는 가장 관대한 처벌 아닐까. “우리는 균형을 망가뜨렸고, 육체적 유대를 배반했습니다. (…) 저의 시신은 햇살 아래, 바람이 쓰다듬고 지나는 곳, 나뭇가지들이 흔들리고, 개울이 조잘거리는 곳에…. 제가 저의 가축들에게 박탈한 그 모든 것 앞에 놓아주면 좋겠습니다. (…) 까마귀들이 부리로 쫄 때마다 저는 빚을 갚게 될 테지요.” 이 소설은 이제야 도착해 더 늘어난 우리의 빚을 추궁하고 있다.
또 다른 압축과 골계미가 ‘동상’에서 두드러진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군이 점령지에서 퇴각하며 곳곳에 심어둔 지뢰를 자헤르는 제거해 한달 200달러를 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안전모 속은 가맛속이다. 매복된 지뢰의 형태와 기폭장치를 상상해야 하는 자헤르에게 무시로 비집고 들어오는 상념이 네 딸에 이어 최근 다섯째 딸을 낳은 아내다. 코란을 떠올린다. 아내는 무슨 죄를 지은 걸까. 자헤르는 아들이라면 제 다리 한짝도 내놓을 것 같다.
마을에선 이슬람 이전 시대 그리스 유물이 지뢰 위장에 쓰이곤 한다. 값나가는 조각상들이다. 적을 타격하고 “적의 탐욕을 응징”하며 “우상 하나를 파괴”하므로 탈레반에겐 일석삼조. 자헤르가 막 발견한 지뢰가 그것이다. 자헤르는 욕망한다. 큰돈을 벌어 새 아내를 들일 것이다. 코란대로다. “여자들은 너희들이 경작할 밭이니 너희들이 좋을 대로 경작하라.”(2장 223절)
테송이 실제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다녀간 이 나라의 비극은 한 단락으로 간추려진다. “러시아군은 이슬람 저항군들을 상대로 이 지뢰를 썼다. 그리고 무자헤딘은 저들끼리 싸우며 이 지뢰를 사용했다. 탈레반은 남은 재고들을 해치웠다.” 다만 ‘코란’의 현대사는 추리는 자 없으니, 지뢰 밟은 “아이들이 폭발로 솟구쳐 오르는 모습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자헤르가 결국 솟구쳐 오르고, “짐승 같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가한 영원한 모욕을 복수하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은 보란 듯 건재하다.
파국이 다 같은 파국은 아니다. 네팔의 구룽족 마을, 미국 텍사스 생 로랑 복음공동체, 이란 남부 케르만, 인도 구자라트주 마을, 프랑스 디종, 멕시코 코르부시온,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에서 한날 연쇄적으로 여성들이 남편에, 폭력으로 군림해온 남성에 항거하는 단편 ‘버그’는 마치 그곳 모두를 목격한 이의 ‘소설적 르포르타주’ 같다. 조지아주 오지, 그토록 염원한 아스팔트 도로가 막상 깔리자 초래된 비극을 전한 ‘아스팔트’, 전후 독일을 떠나려던 남자가 난파 끝 유일한 생존자로 무인도에 함께 밀려온 우편물 가방 속 편지를 뜯어보자 사연이 죄다 이별이고 고통이고 저주인 아이러니를 서정적으로 그린 ‘우편물’까지. (주인공들은 아스팔트를 직접 갈아엎거나, 몇달 만에 온 구조대에게 우편물 가방만 가져가라 한다.)
길의 끝에서 끝을 다녀온 테송은 에세이로, 소설로, 영화로 ‘길의 말’을 재구성해왔다. 가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이리라. 이제 대중은 테송에게 묻는다. “(사고 뒤) 고통 없이 자각 없다 하는 건 지나치게 도덕적 관점 아닌가?” 테송은 말했다. “왜 우린 지금 당장 호숫가로 나가 눈을 감고 볕과 바람을 즐기려고 하지 않을까? 다들 영원히 살 거라 생각해서다. (…)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을 때야 생각한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했지? 매일 이런 것들을 즐겼어야 했는데. 고통은 우리를 깨운다. 인생은 짧다. 낭비해선 안 된다. (…) 경고문은 갑자기 커져 말을 한다. ‘당신 주변에 이 모든 사람들―친구와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라, 태양과 바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말라, 사는 것을 잊지 말라.’”(2017년, 스위스 잡지 ‘인 비보’)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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