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인간 식육’ 상나라 지우고 세운 주나라의 덕치

한겨레 2024. 2. 23. 05: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중국 기자 출신 역사학자 리숴
촘촘한 고증으로 중국 고대사 전복
상나라 정벌 뒤 화하문명 추적
“식인문화 상나라의 후예 공자
주나라 위해 육경 집대성”
은허 황궁 구역에서 동쪽으로 수백 미터 떨어진 다스쿵촌에서 고고학자들은 354개의 중소형 무덤을 발굴했다. 무덤들에선 순장의 흔적뿐만 아니라 도살된 뒤 먹히거나 제사에 바쳐졌을 가능성이 있는 유골이 다수 출토되었다. 사진은 다스쿵의 M231 차마갱의 모습. 글항아리 제공

상나라 정벌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l 글항아리 l 4만3000원

1959년, 과거 은나라 도읍 궁전 구역과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뒤쪽 언덕’(後岡)에서 “우물처럼 둥근 모양이고, 구덩이 안에서는 어떤 관재(棺材)의 흔적도 없이 그저 25구의 해골만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무덤이 발굴되었다. 이듬해 2차 발굴에서 29구, 1977년 3차 발굴에서는 19구의 유골이 나왔다. 발굴 당시에는 “생전에 죄를 범해서 정상적인 매장을 누리지 못”하는 귀족 무덤으로 추측했지만, 연이은 발굴과 연구를 통해 “인신공양 제사갱”으로 밝혀졌다. 충격적인 사실은 “관례에 따라 제사에 바쳐진 이들, 특히 많은 영아와 어린아이를 요리해 먹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상나라 혹은 도읍인 은(殷)에서 따와 은나라로 불린 제국은, 중국의 역사학자 리숴의 ‘상나라 정벌’에 따르면 살육과 인신공양제사, 식인으로 점철된 시공간이었다.

‘상나라 정벌’은 신석기시대를 시작으로 부족국가와 초기국가 단계, 이후 하·상·주나라까지 약 1000여년의 역사를 복원한 책이다. 900쪽 넘는 책이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학술적 고증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추리소설처럼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있어 화하문명(華夏文明)의 실체를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적잖은 지적 흥분을 안겨줄 만하다. 지은이는 새로운 화하문명의 발호 시점을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은주혁명(殷周革命)으로 잡는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주공 단(旦) 세대가 인신공양 종교를 신속하게 폐지하고 그와 관련된 문헌과 기록을 말소함으로써” 평화롭고 관용적인 단계, 즉 “새로운 화하문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책 전반부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상나라 시기까지의 살인·인신공양제사·식인의 현장을 그간의 발굴 현황과 문헌 등을 접목해 생생하게 재현한다. 갑골문의 대량 출토지로도 유명한 은허에서는 순장 외에도 “사지가 해체된 인간 희생”이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복부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사지를 잘라 바치는 제사”와 “도끼로 살을 발라내는 제사”도 있었다. 한 발굴지에서는 “사람의 치아 4개와 개 이빨 5개, 돼지 이빨 3개”가 함께 발굴되었다. 이는 “일부 희생자는 돼지, 개와 함께 도살된 후 조리되어 먹히거나 제사에 바쳐졌다”는, 즉 식인이 성행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 왕조 극성기는 얼리터우 문화 제3기로 지금으로부터 3610년에서 3560년 전이다. 이때는 궁전 구역 안쪽에 작은 성을 만들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를 ‘궁성’이라고 불렀다. 얼리터우 궁전 구역에는 대형 제사 장소로 쓰인 거대한 구덩이가 있었다. 사진은 제사장 옆 쓰레기 도랑(94,H3)에서 출토된 부서진 인골의 모습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인골이 인신공양제사의 흔적이라고 본다. 글항아리 제공

상나라의 살인·식인·인신공양제사에 대한 고증도 촘촘하지만, ‘상나라 정벌’의 압권은 역시 주나라가 들어서면서 이 악습들을 어떻게 제거해 나갔는가를 다룬 후반부라고 하겠다. 지은이는 주족(周族)의 기원 서사를 시작으로 문왕과 강태공, 주공 단, 결국에는 공자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진행된 과거사 지우기를 추리하듯 한다. 주족은 “상나라 왕을 위해 정복 전쟁을 벌여서 혈세를 납부하는” 속국 처지였다. 혈세는 바로 제사에 쓰일 인간들이었다. 주족의 시조 고공단보의 손자인 문왕 주창은 ‘역경’에 “상족의 피비린내 나는 제사 의식과 인간 희생 사냥을 담당했던 주족의 경험”을 기록했다. 한때 상나라 주왕에 의해 은허에 구금되기도 했던 그는 “살가죽과 힘줄 등 남은 찌꺼기”, 즉 인육을 먹고 식중독에 걸린 일도 있었다.

속국의 수장일 수밖에 없는 문왕이 상나라를 꺾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은허에 잡혀 있으면서 주왕의 수레를 몰았”던 장자 백읍고가 “주왕의 제수품”이 되었던 것이다. 서진(西晉)의 황보밀이 편찬한 ‘제왕세기’에 따르면 주왕은 “백읍고를 삶아 국을 끓여서 문왕에게 하사”했다. 다른 기록에는 국이 아니라 “털도 뽑지 않고 피도 씻지 않은 채 생고기를 먹게” 한 것으로 보인다. 문왕은 아들의 살을 먹으며 절치부심했고, 자신이 사냥 대상으로 삼았던 강족(羌族)과 동맹을 맺고 마침내 상나라를 정벌하기에 이른다. 홍상훈 인제대 국제어문학부 교수는 ‘옮긴이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도덕적이고 인자한 성왕으로 알려진 문왕은 알고 보면 비정한 인간 사냥꾼이었고, 그 자신이 유리(羑里)의 토굴에서 갇혀 인간 희생의 후보자가 되었을 때 인육을 먹고 와신상담하며 반역을 준비했던 효웅이었다.”

발굴 중인 왕릉 M1550 대묘의 모습. 이곳에는 243개의 인두가 매장되어 있었는데, 발굴 보고서에서는 “당시에 사람 머리를 잘라 가죽과 뼈를 모조리 다진 흙 속에 묻은 증거”라고 썼다. 글항아리 제공
기자 출신 역사학자 리숴(47). ‘상나라 정벌’로 중국 고대사의 인식틀 전환을 꾀했다. 글항아리 제공

상나라를 정벌하기 앞서 문왕은 “상대적으로 더 철저한 ‘일신교’로 개혁”을 추진했다. 상 왕조는 왕들조차 신의 반열에 올렸지만, 문왕은 상제의 위엄과 숭고함이 인간 세계를 주재한다고 설파했다. “상나라 때 사람들은 대부분 신들의 위력을 독실하게” 믿었는데, 문왕은 이와 단절하고자 인신공양이 자행된 무덤들을 훼멸했다. 뒤를 이은 무왕도 이 혁신 대열에 동참했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장인 여상, 즉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강태공과 문왕의 동생 주공 단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인간 사냥에 나섰고, 형의 살을 먹어야만 했던 주공은 상나라를 정벌하고 인신공양을 근절한다. 먼저 “은허를 없애고, 상족 집단을 해체하고, 상나라 왕의 갑골 기록을” 없애는 일에 몰두했다. 주공은 인간 사냥꾼이었던 부족의 과거도 지우고자 “덕(德) 개념을 새롭게 정의”했다. 주공의 덕이란 “윗사람에게 공손하고 효성을 다하며, 올바르게 중용을 지키며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관대하면서 온화하되 정직함을 지키는 것과 같은, 사람들과 살고 있는 인간 세상의 객관적인 도덕률”을 말한다.

지은이는 에필로그에 이르러, 화하문명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공자가 상나라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인신공양제사에 대해 인지했으리라 추측한다. 공자가 만년에 육경(六經), 즉 ‘시경’ ‘상서’ ‘의례’ ‘악경’ ‘역경’ ‘춘추’를 애써 편집한 이유가 덕으로 대표되는 “주공의 정신에 부합하는 화하 세계의 사회와 역사 지식의 총집합으로서 유가 학파의 초석”을 세우는 데 유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발 더 확대 해석도 시도한다. “공자가 상나라 왕족의 후예이니, 주공이 상족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고, 그들을 대신해서 피비린내 나는 인신공양제사의 기억을 없애서 후세의 자손들이 치욕 속에서 살아갈 필요가 없게 해준 데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상나라 정벌’은 촘촘한 고증과 과감한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중국 고대사를 읽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상나라 정벌’이 보여주듯, 망각을 통해 다시 일어난 그 무엇일지도 모를 일이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출판평론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