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배추밭을 실리콘 아일랜드로” 日, 대만서 기술 과외까지 받았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2024. 2. 2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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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日 반도체 속도전] 구마모토 TSMC 공장 성호철 특파원 르포
22일 찾은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 소재 대만 TSMC 신(新)공장 전경.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업체인 TSMC와 일본 소니·덴소의 합작 법인 ‘JASM’이 이틀 뒤 개소식을 갖고 이 공장 운영을 시작한다. 원래 양배추 밭이었던 축구장 29개 크기 부지에 공장이 들어섰는데, ‘JASM’ 간판이 붙은 정문 앞 일부 부지는 여전히 양배추 밭으로 남아 있다. 일본·대만의 반도체 동맹을 상징하는 이 공장은 올해 말부터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간다./성호철 특파원

22일 찾은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菊陽町) TSMC 공장 앞은 이틀 앞으로 다가온 준공식을 앞두고 분주한 모습이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왕복 2차선 도로로 자동차와 트럭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준공식에는 장중머우(張忠謀) TSMC 창업자가 직접 참석할 예정인데,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참석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장중머우는 중국의 외교 공세로 활동 폭이 제한된 차이잉원 총통을 대신해 국제사회에서 대만 정부 대표로 활동해왔다. 두 사람이 나란히 준공 테이프를 끊을 경우 일본과 대만의 강력한 반도체 동맹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그래픽=김현국

TSMC는 축구장 29개를 합친 것과 맞먹는 넓이(21만㎡)의 부지에 86억달러(약 11조원)를 투입해 반도체 제조 공장과 사무실 건물 등을 지었다. 2022년 4월 착공했으니 채 2년이 걸리지 않은, 유례없는 초스피드 공사였다.

다음 달부터는 본격적으로 대형 반도체 장비를 반입해 올해 4분기부터 대량생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주력 제품은 자동차나 카메라에 쓰이는 12~28㎚(나노미터·10억분의 1m) 반도체다. 제품의 사양만으로는 ‘첨단’과 어울리지 않는 측면도 있다. 세계 반도체 시장 최신 제품인 3~5㎚ 반도체보다 10년 이상 뒤처진 기술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보다 대만이 얻는 이득이 상대적으로 커 보인다.

TSMC는 공장 건설 비용의 40%에 해당하는 4760억엔(약 4조원)을 일본에서 조건 없이 보조받았다. 공장 운영 주체인 합작사 JASM에는 소니·도요타·덴소 등 주요 고객사들이 지분을 투자했다. TSMC 입장에선 공장 건립 비용을 크게 아낀 데다 고객까지 확보돼 있으니 당장의 이득은 일방적으로 누리는 구조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의 반도체 전문가들은 “이 공장을 시작으로 일본 반도체가 본격적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제1공장이 순조로우면 제2, 제3공장으로 이어지는 게 TSMC의 패턴”이라며 “일본이 신뢰를 얻으면 또 다른 진전이 이뤄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패턴은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TSMC는 제1공장 준공식도 전인 지난 7일 바로 옆에 제2공장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올해 말 착공해 3년 내에 공사를 끝내고 2027년 말부터 본격 가동한다는 것이다. 100억달러 이상이 투입될 제2공장은 1공장과는 달리 6㎚급의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1·2공장이 돌아가면 당장 일본은 삼성전자를 맹추격할 수 있는 거점을 국내에 확보하게 된다.

일본 남서부 구마모토현 기쿠요초에 있는 대만 반도체 제조회사(TSMC)의 자회사인 일본 첨단반도체제조회사(JASM)의 반도체 공장./교도/로이터 연합뉴스

공장 맞은편에는 양배추밭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 일대는 깨끗한 수질 때문에 대대로 양배추와 당근 등 채소를 재배해왔다. 반도체 제조 공정에도 깨끗한 물의 공급이 필요하다. 깨끗한 물이 있어 만들 수 있는 지역 대표 상품에 ‘반도체’가 추가된 셈이다.

구마모토 TSMC 공장이 일본 경제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 규슈경제조사협회는 TSMC의 제1·2공장의 경제 파급효과가 10년간 20조엔(약 178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구마모토현은 공장 건립으로 인한 지역 내 경제 효과가 10조5400억엔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당장 주변 지역은 일자리 특수로 들썩이고 있다. TSMC와 관련된 일자리의 보수는 수도 도쿄 수준에 맞먹는다. 예컨대 청소 업무는 시급 1800엔(약 1만6000원), 사원식당 조리 보조는 1300엔(약 1만2000원) 이상이다. 2010년 3만7700명에 불과했던 기쿠요마치 인구는 4만4500여 명으로 18%가 늘어났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일상화돼 있는 일본 비수도권 지역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다.

TSMC 공장 건립을 계기로 일본 반도체 업계에는 최근 대만에서 보고 배우는 관료라는 뜻의 ‘겐다이시(遣台使)’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과거 중세 시기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겠다며 보낸 사절인 ‘겐토시(遣唐使)’에 빗대 대만을 배우자는 의미다. 1970~80년대 세계 최고의 전자 기업으로 명성을 누렸다 지독한 쇠퇴기를 경험했던 소니는 작년에 기술자 200명을 대만 TSMC에 6개월간 파견해 반도체 기술을 배웠다. 나무라 기미히데 규슈정책산업국장은 “규슈는 부활하는 게 아니라, 아예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며 “세계의 실리콘 아일랜드(island·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TSMC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제조 기업으로, 1987년 대만 정부가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설립했다. 1992년 민영화됐지만, 여전히 최대 주주는 대만 정부(국가발전기금·지분율 6.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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