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전방위 글쟁이’ 청오가 기다렸던 봄 소식

김진형 입력 2024. 2. 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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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문화운동가 차상찬
현대문 번역 선집 첫 발간 주목
검열 삭제된 원문도 찾아 실어
비판적 민족주의자 면모 강해
고향 춘천 정서 담은 이야기도
사실·흥미 모두 갖춘 글쓰기
▲ 개벽사 직원들의 단체사진. 차상찬 옆에는 어린이가 앉아 있다.
▲ 춘천에 위치한 차상찬 동상.

“이참에 경성부에서는 밀린 이완용의 학교비나 받아내면 어떨까.”

일제강점기 언론인이자 민족문화운동가 청오 차상찬이 친일파 이완용이 죽었을 때 쓴 글이다. 1926년 개벽 67호에 발표 당시 일제의 검열로 전문 삭제됐었다. 또 차상찬은 “한국의 원로들이 대부분 죽는구나”라고 탄식한 이병무를 꼬집어 “원숭이 늙은 것이 원로가 아니냐”라고 비판한다. 이처럼 차상찬은 이견의 여지 없는 잡지 언론의 전설이었다. ‘개벽’, ‘신여성’, ‘어린이’ ‘별건곤’, ‘학생’, ‘혜성’, ‘제일선’ 등 개벽사의 주요 필자로 활약했으며 천도교 소년회 설립과 어린이날 제정 등 어린이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잡지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려보는 여론 형성의 중심 매체였기 때문에 영향력이 엄청났다. 김동인·현진권·나도향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도 ‘개벽’을 통해 등단했으며 김유정은 ‘제일선’에 실린 ‘산골 나그네’로 첫 작품을 세상에 알렸다. 강원문화교육연구소가 차상찬의 글을 현대문으로 풀이한 ‘차상찬현대문선집’ 1권을 펴냈다. 차상찬이 70여 개의 필명으로 남긴 1000여 편의 글 가운데 처음 골라내 편집했다.

▲ 차상찬현대문선집1/ 강원문화교육연구소

■ 고향 강원도에 애정 가득 ‘청오’

“강원도 금강산의 만폭동 물이 없었더라면 서울·인천의 수십만 인구가 목이 말라 죽었을 터이니, 특히 서울 거주자로서는 강원도에 대하여 ‘생명수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절을 몇백 번씩 해야 됩니다.(잡담이라고 야유하면서도 모두 웃었다.) 자랑거리가 하도 많으니, 앞뒤도 가릴 수 없고 또한 너무 많으면 도리어 자랑거리의 가치가 덜할 듯하여 그만둡니다.” (차상찬, ‘팔도대표의 팔도자랑’ 중)

이번 선집에는 그의 생각과 정서, 고향인 춘천과 강원도를 담아낸 글을 모았다. 책의 부제 ‘춘천의 봄 소식은 어떠한가’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쓴 글의 제목에서 가져왔다.


1부 ‘춘천 이야기’는 유년 시절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당시 시대상이 잘 담겨 있다. 1896년 춘천의 을미의병 현장에 대한 어린시절의 기억을 더듬고 추후 내용을 보완, 당시 열악했던 의병 상황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춘천의병아리랑’의 원문도 수록했다. 한학을 공부했던 그가 9세 때 일본 사진가와 나눈 한문 필담도 있다. 마을 사람들이 낯선 일본인의 방문을 두려워했던 까닭에 총을 가진 포수와 동행했다고 한다.

‘천렵’에 대한 글은 당시 춘천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 시대상황을 반영한다. ‘공지천’의 어원은 미꾸라지와 비슷한 암갈색 모양의 ‘공지’라는 물고기 많았기 때문이라는 내용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발표한 한시를 번역해 실었는데, 이전에 소개된 적이 없는 글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4부 ‘강원도 이야기’에는 강원도와 관련한 주제의 글을 모았다. 차상찬이 주도했던 강원도 유학생의 모임인 ‘관동학회’ 창립 과정, 일제의 각종 조사 사업에 대항해 개벽사가 기획했던 ‘조선 문화의 기본조사’의 ‘강원도 호’ 등을 수록했다. 현재는 갈 수 없는 북강원도 통천과 평강 등 지역 사정까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글이다. 5부는 번역한 한시와 한문의 원문을 실어 참고할 수 있다.

▲ 차상찬이 쓴 ‘관동학회 회고기’

■흥미와 고증, 비판 모두 잡아

차상찬의 글이 흥미로운 것은 정보 전달과 재미의 두 요소를 모두 놓치지 않았던 점이다. 편집총괄을 맡은 정현숙 소장은 “글쟁이로서 차상찬의 필력은 엄청났다. 어렸을 때의 기억도 나중에 확인하는 등 사실 고증에 집중했으며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기발랄한 표현도 많이 썼다”고 말했다. 2부 ‘내가 사랑하는 것’에 실린 ‘콜레라 소동기’는 임신한 여성을 전염병에 감염된 것으로 오인해 교통차단이 됐던 전시행정을 은유적으로 비판했다. 3부인 ‘내가 보는 세상’은 직언·직필의 언론인으로서 세태를 비판하고, 매체 발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반영된 글로 엮었다. ‘개벽’의 강제 폐간 속에서도 잡지발간에 대한 불굴의 의지, 이완용의 꼼수와 죽음에 대한 촌철살인의 풍자, 경성제국대학의 실상에 대한 비판, 동학농민운동의 전말과 국화 무궁화가 겪어야 했던 아픈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통해 민족주의자적인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책은 글 일부가 검열로 삭제됐다는 사실을 알려 당시 엄혹한 언론 현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차상찬에게는 검열 이전의 ‘개벽’ 본호를 따로 보관·배포하는 치밀함과 용기가 있었다.

▲ 차상찬이 쓴 ‘애주기’

■ ‘술나라 헌법’… 술에 대한 애정 담은유쾌한 이야기도

무거운 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차상찬은 유명한 술꾼이었다. ‘주천자(酒賤者)’라는 필명으로 1929년 2월 1일 발포한 ‘술나라 헌법(酒國憲法)’에는 유쾌함이 드러난다. 글에는 “내가 일반 백성의 술 마시기의 증진과 술의 가치의 융성과 번창함을 도모하며 세계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하여 이에 술 나라의 헌법을 발포하노라”라고 쓰여있다. 이 헌법을 위반하는 자는 1년간 ‘금주국’에 유배한다는 내용도 있다. “술을 따르지 않는 자는 괘씸죄로 다스린다”고 하니 그의 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술나라 헌법’에는 말다툼, 몸싸움이 벌어지면 즉시 술자리에서 퇴장을 명하는 올바른 법도도 있다.

‘술을 사랑하는 이야기(애주기)’에서는 춘천에서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다 호랑이로부터 쫓겼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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