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숲속의 피아노, 임윤찬의 피아노
남해안 어느 섬의 꽃산행은 해가 웬만큼 떠올라 저 멀리 누구네 집 엉덩이를 걷어찰 때쯤 나도 비슷하게 산으로 출발하여 서로 모른 척 하루를 보낸 뒤, 저녁 어스름 각자 헤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해는 서해에서 씻고 나는 집에서 먼지 묻은 몸을 씻고, 배를 채운 뒤 사진도 정리하다 보면 아주 늦은 밤일 때가 많다. 그럴 때면 텔레비전은 시끄럽고 떠들썩한 건 곶감처럼 다 빼먹은 뒤, 심야방송으로 장중한 선율이 흐르는 클래식 공연실황을 내보내는데 더러 막 연주를 마친 피아니스트가 아주 훤칠한 피아노를 배경으로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클래식에 관한 한 그냥 막 듣기만 하는 수준의 나는 단지 피아니스트가 조금 전까지 뛰논 피아노에 눈길이 가다가 몇 시간 전 희미한 햇살을 따라 하산하다가 만난 어느 반반한 바위를 떠올리기도 하였다. 바위는 급히 심부름을 가다가 잠시 쉬는 듯하기도 하고, 무슨 큰 뜻을 실어나르느라 산을 납치하여 짊어지고 가다가 너무 무거워 그만 주저앉은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산의 옆구리에서 삐어져나온 이 무거운 적막 덩어리는 그냥 함부로 대할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바위에는 이끼나 지의류가 갈래를 뻗고, 궁금증을 못 이기는 고사리가 넌출넌출 염소처럼 기웃거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무런 뜻이 없을 수가 도저히 없는, 분명 누군가 적어놓은 난해한 상형문자 같았다. 나는 암호학이나 수학에는 영 젬병이라서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뜻을 간취하지 못한 채 그저 최대한 공경스럽게 손바닥으로 바위를 쓰다듬으면서 피아노의 그 반반하고도 미끈한 뚜껑을 느껴보는 정도였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밴 클라이번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만 치며 살고 싶다”는 꿈을 피력한 게 퍽 인상적이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고립을 자처한 외로운 꽃들이 마음을 다해 피고 지는 산. 그 속에 성실하게 자리하는 피아노 같은 바위들이 떠올랐던 것. 그리고 지난 주말에는 영화 <크레센도>를 시청했다. 무대 위의 훤칠한 바위 앞에 앉아 ‘아름다움’을 캐내는 피아니스트 덕분에 소라껍질 같던 나의 귀는 음악의 폭풍우에서 사정없이 난파되었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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