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 높아지는 탄소장벽에 엉뚱한 정책들
세상의 변화 속도가 정말 빠르다. 며칠 전 챗GPT 개발사인 오픈AI가 영상생성 인공지능(AI) 모델 ‘소라’를 공개했다. 사용자가 머릿속에 떠오른 내용을 글로 쓰기만 하면 영상으로 만들어주는 AI 시스템이다. 영상 업계에서는 놀랍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소라가 만든 거리 풍경, 주인과 장난치는 동물의 모습이 카메라로 촬영한 듯 생생하다. 앞으로 영상 업계에 미칠 파장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이세돌 9단에게 승리한 때가 2016년이다. 언젠가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는데, 10년도 지나지 않아 그런 날이 왔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적응을 요구하는 것은 AI뿐만이 아니다. 기후변화와 탄소중립 역시 마찬가지다. 비용을 치러야 하는 순간이 벌써 찾아왔다.
유럽연합(EU)으로 철강·알루미늄 등 주요 제품군을 수출하는 기업의 탄소 배출량 의무 보고 마감 시한이 임박했다. 다음달 1일이다. 열흘도 남지 않았다.
EU는 2026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를 본격 시행한다. 탄소국경조정제도는 철강·알루미늄·비료·전기·시멘트·수소제품 등 6개 품목을 EU로 수출하는 경우 해당 제품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탄소 추정치에 대해 일종의 세금을 부과하는 법이다. EU는 본격적인 ‘탄소세’ 부과에 앞서 내년 12월까지를 전환 기간으로 설정해 기업에 분기별 탄소 배출량 보고 의무만 부여하기로 했다. 첫 보고를 할 내용은 2023년 10~12월 EU에 수출한 제품을 대상으로 생산 과정에 배출한 탄소량이다. 정해진 첫 기한 내에 보고 등록을 마치지 않으면 t당 10유로에서 최대 50유로까지 벌금을 부과받게 된다.
그런데도 관련 기관들이 조사해보니 국내 기업 상당수가 대비를 못하고 있었다. 보고 대상 기업인 사실조차 모르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의무화에 대한 준비도 시급하다. 국제회계기준(IFRS) 산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는 지난해 6월 지속가능성 공시 표준을 발표했다. ESG 공시의 글로벌 기준이다. 한국도 서둘러 관련 공시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특히 ESG 공시의 핵심인 온실가스 배출과 관련한 기준 마련이 중요하다. 공시는 투자자들이 어디에 투자할지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정보다. 기업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 ESG 공시 의무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또 다른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공시 의무화 시점은 물론, 구체적인 기준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탄소국경조정제도나 ESG 공시는 산업통상자원부 또는 금융위원회 등 각 부처가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도들이 영향을 미치는 대상은 기업, 금융기관, 투자자 등 광범위하다. 반드시 범정부 차원에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윤석열 대통령의 관심과 역할이 중요하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토론회에서 ‘RE100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고 묻자 “그게 뭐죠?”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 ‘기업들이 2050년까지 풍력·태양광 등 재생가능 에너지를 100% 활용하는 자발적 약속’을 의미하는 RE100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용어지만 윤 대통령은 모르고 있었다.
당시 국민의힘 측에서는 이와 관련, “그건 전문가 아니면 잘 모른다. 공부해서 알 순 있는 것”이라며 윤 대통령을 두둔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2년가량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RE100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윤 대통령은 지난 21일 도심의 ‘허파’이자 미래세대를 위한 자산인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을 대폭 풀겠다고 직접 나섰다. 전문가들은 기후위기 시대에 보전된 녹지를 해제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22일에는 “올해를 원전 재도약 원년으로 만들기 위해 전폭 지원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RE100의 세계적인 확산에 따라 태양광·풍력 산업 육성이 필요한데도, RE100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원전에만 집중하는 것에 전문가들의 우려가 크다.
EU의 탄소 배출량 의무 보고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2~3년이면 탄소중립을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가 엄청난 무역장벽, 이른바 ‘탄소장벽’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장벽이 완성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넘어서야 한다.
김석 경제에디터 s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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