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111)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
두 장의 사진은 전라북도 군산시 장미동에 있는 1971년과 2024년의 군산 내항 모습이다. 두 사진 모두 배들을 육지에 바로 접안시키지 않고, ‘뜬다리 부두’라는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연결한 다리 모양의 구조물에 대어 놓았다. 이 구조물은 부잔교(浮棧橋)라고도 한다.
뜬다리 부두는 커다란 조차를 극복하기 위한 시설이다. 조차는 달과 태양의 인력에 의해 발생하는 썰물과 밀물 때 해수면의 수직적 차이다.
우리 서해안은 조차가 세계적이다. 서해가 동중국해를 향해 넓게 열려 있는 바다인 데다 수심이 얕기 때문이다. 조차는 아산만이 8.5m로 가장 크며, 이곳에서 북쪽과 남쪽으로 갈수록 감소하는데, 군산은 6.2m 정도이다.
뜬다리 부두는 육지와 다리로 연결된 폰툰이라는 상자형 구조물에 배를 대어 여객 승하선과 화물 하역을 할 수 있게 한 시설로, 폰툰은 조차에 따라 아래위로 움직인다. 뜬다리 부두는 서해안 여러 항구에 설치되어 있지만, 유독 군산 내항의 뜬다리 부두가 유명한 건 가장 일찍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그 이유는 우리의 어두운 역사와 관련이 있다.
금강 하구에 자리한 군산은 고려 때부터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모아 배로 실어서 개경으로 보내던 항구였다. 1899년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 걸쳐 군산은 만경평야를 비롯한 인근 곡창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항구였다. 일제는 조차를 극복하고 대형 선박을 접안시켜 더 많은 쌀을 효율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뜬다리 부두를 만들었다. 뜬다리 부두는 일제가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서 시행한 축항 공사의 산물이었고, 그 결과, 3000t급 기선 6척을 동시에 댈 수 있었다.
군산 내항은 사진이 촬영된 1970년대 이후 점차 활력을 잃었다. 물동량 증가 등에 부응하기 위해 1979년 바다에 더 가까운 쪽에 군산 외항이 완공되면서, 군산 내항은 수출입 항구의 기능을 상실했고, 계속되는 토사 유입 등으로 여객항이나 어항 기능도 갈수록 축소되었다. 두 사진을 비교해 보면, 뜬다리 부두에 댄 배의 규모가 확연하게 차이 난다. 이렇게 지금 뜬다리 부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나,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201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최근에는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칼럼에 게재된 신문의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지리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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