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봄날의 역지사지

2024. 2. 2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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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조금 물러서니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것들이 있다.

폭신한 바람과 햇빛, 마른 땅 위를 구르는 자전거 바퀴 소리처럼 대체로 가볍고 무른 것들이다.

그날 따라 릴레이하듯 아이들이 몰아닥치는 바람에 고양이 동산 전체가 북적였다.

그러고는 큰소리로 고양이를 부르며 뒤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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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조금 물러서니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것들이 있다. 폭신한 바람과 햇빛, 마른 땅 위를 구르는 자전거 바퀴 소리처럼 대체로 가볍고 무른 것들이다. 새들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탁탁 부러져 나가던 나뭇가지들도 물을 머금어 한결 부드럽게 휘거나 튕긴다. 볕이 나른한 오후 풀숲에 누워 있는 고양이들과 마주칠 때면 정말 봄이 오는구나 싶어진다.

아파트 단지 한쪽에는 고양이 동산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중앙에 나무들이 강강술래를 하듯 둥근 모양으로 심겨 있고 오솔길과 풀숲이 주변으로 가만히 퍼져 나가는 형태의 공간이다. 연결된 넓은 길과 달리 동산 안쪽 길은 울퉁불퉁하고 비좁아 자전거나 킥보드들이 잘 지나가지 않는다. 놀랄 일이 적어서인지 그곳에 자리 잡은 고양이들은 유난히 순하고 사람을 잘 따랐다. 원래도 아이들이 고양이와 놀기 위해 모여드는 곳인데, 날이 따뜻해지니 고양이 동산으로 집결하는 무리가 부쩍 늘었다. 낚싯대 장난감이나 츄르를 든 아이들이, 작은 그릇과 생수병을 챙겨 든 아이들이 고양이를 부르고 어르고 먹이고 깔깔대는 모습은 그야말로 봄날 같았다.

고양이들은 순하지만 새침해서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면 슬그머니 도망치곤 했다. 꼬리로 바닥을 두어 번 내려치고는 고개를 홱 돌려 풀숲으로 들어가버리는 식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더는 고양이를 부르거나 뒤쫓지 않고, 아쉬운 얼굴로 무릎을 턴 뒤 일어섰다. 애초에 아이들에게 시간이 많지 않은 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대개의 아이들이 학원 이름이 큼지막하게 찍힌 보조 가방을 메고 있거나 태권도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루는 아이 하나가 암묵적으로 지켜오던 규칙을 깬 일이 있었다. 그날 따라 릴레이하듯 아이들이 몰아닥치는 바람에 고양이 동산 전체가 북적였다. 털을 바짝 세우고 있던 고양이는 아이들이 길을 터주자 재빨리 풀숲으로 들어가 숨었다. "나 이거 3000원이나 주고 사왔는데?" 아이가 억울한 목소리를 내더니 분홍색 깃털과 방울이 달린 장난감을 허공에 휘둘러 댔다. 그러고는 큰소리로 고양이를 부르며 뒤쫓기 시작했다. 풀숲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회양목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우둑우둑 요란했다. 다른 아이들이 말려도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납작한 바위 위에 앉아 있던 고양이가 펄쩍 뛰어 달아나자 아이도 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내가 너랑 놀아주려고 일부러 사왔단 말이야! 이거 비쌌어!" 고양이가 동산 안을 뱅뱅 돌았으므로 아이도 뱅뱅 돌며 소리쳤다. 이쯤 되면 말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 내가 아이에게 한발 다가섰을 때였다.

"그건 놀아주는 게 아니야, 네가 그러는 건 고양이한테 엄청난 스트레스라고." 오솔길을 가로막고 선 다른 아이가 말했다. "자꾸 부르고 쫓아다니고 간섭하고 그러면 고양이가 좋겠어? 너, 너네 엄마가 너를 하루 종일 쫓아다닌다고 생각해봐." 아이는 대번에 멈춰 서더니 그건 싫지, 하고 답했다. 그러고는 장난감을 점퍼 주머니에 쓱 꽂아 넣고 돌아섰다. 세상에, 아이들은 저렇게 배우는구나. 나는 뒤에서 조용히 감탄했다. 고양이는 살찌고 아이들은 역지사지를 몸소 배우는 봄날이었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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