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n스토리] 110㎞ 통학·밤샘 공부…만학 꿈 이룬 '열정 만수르' 80대 박사

강태현 2024. 2. 2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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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산림평화박사 전진표씨…"산림교류·협력 통한 한반도·세계 평화 염원"
"인생의 폭 음미하며 살았으면…앞으로 20년간 강의 등 더 하고 싶어"
강원대학교 평화학 박사 학위 받은 전진표씨 [전진표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춘천=연합뉴스) 강태현 기자 = "중간에 공부를 그만두려고 했던 적도 많아요. 늙어서 기억력이 쇠퇴하니까 젊은 친구들이 1시간 공부할 때 저는 밤을 지새워야만 했어요."

강원대학교 춘천캠퍼스 학위수여식이 열린 22일 학사모를 쓴 젊은이들 사이에 자연스레 섞인 늦깎이 학생이 빛나는 졸업장을 받아 들었다.

2020년부터 4년간 밤낮 없이 학업에 매진한 전진표(84)씨는 이날 국내 최초 산림 평화학 박사 학위를 받고 만학의 꿈을 이뤘다.

밝은 미소로 졸업장을 품에 안기까지는 인고의 노력이 뒤따랐다.

"경기 용인 집에서 춘천까지 일주일에 세 번 통학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용인에서 청량리로 이동해 다시 ITX청춘열차를 타야 했고, 역에서 내리면 대학까지 또 이동해야 했죠. 첫차를 타고 출발해도 강의에 조금씩 늦어서 부끄럽고 죄송한 날도 많았어요. 그렇게 오후 8시쯤 모든 수업이 끝나면 다시 같은 방법으로 귀가해요."

공부 [연합뉴스TV 제공]

체력적으로 힘에 부쳐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입 밖으로 나왔지만 죽기 살기로 버텼다.

궁둥이 붙이고 앉아 있는 시간도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기억력이 쇠퇴하는 탓에 노트에 적어도 세 번씩은 적어야 관련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다.

교수님이 건넨 200∼300페이지의 자료를 읽고 숙지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씨는 불면증까지 생길 정도로 밤마다 책과의 씨름을 이어갔다.

이런 그를 지켜보며 주위에서는 '다 늙어서 박사학위 받으면 어디다 써먹느냐', '나이 들어 공부하며 고생하다가 몸만 축난다'는 등 만류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몸이 힘들어도 젊은 학생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할 때면 청년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활력이 돌았고, 이를 동력 삼아 배움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산림 가꾸는 관계자들과 전진표씨 과거 사진 [전진표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가 학업에 이토록 열정적인 이유는 오로지 산과 나무 때문이다.

전씨는 태백산맥 한가운데 위치한 강원 정선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산림에 자연스레 관심을 두고 자랐다.

이에 동국대학교에서 임학과를 졸업한 뒤 산림청에서 30여년 근무했고, 1970년대에는 '제1차 치산녹화 10년 계획' 실무자로 일하며 황폐해진 땅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 일조했다.

그는 이후 독일에서 1년간 산림 경영, 임업 기계 관련 연수를 받은 경험을 살려 한 교육원에서 강의를 맡았는데, 연수생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기어코 대학원에 진학해 1974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 임학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는 산림 덕에 건강을 얻었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30여년 동안 산림 분야에 몸담고 있으니까 자연스레 많은 산행을 했고, 그러면서 산과 나무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됐어요. 자연의 소중함을 마음에 품고 있으니 인간으로서 자연에 뭔가 도움이 되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는 숲은 용서와 인내, 사랑과 화해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이를 통해 조화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강원대학교 [강원대학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가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 역시 '산림 평화'에 있다.

전씨가 정의하는 산림 평화는 산림과 관련한 정책, 녹화·복원사업, 경영, 교육, 국제 교류·협력을 통해 인간과 자연, 국가와 국가,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 그리고 세대와 세대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는 남북 관계에도 이를 적용해 '녹화 통일', '그린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씨는 "비정치적 영역인 산림을 통해 남북 간 신뢰를 회복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산림교류·협력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박사 학위 논문 '산림평화와 남북산림교류협력에 관한 연구'를 통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산림 평화 박사라는 타이틀도 얻게 됐다.

산림청 남부지방청장을 끝으로 2001년 퇴직한 전씨는 이후에도 전 산림청 직원 모임인 한국임우연합회에서 회장직을 맡아 산림녹화 기록을 모아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앞으로 산림 관련 단체에 교육 강의를 다니는 등 건강이 허락하는 한 20년간 더 산림 분야에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80대 노인이 박사 공부한다는 소식에 어느 70대 노인도 같은 학과에 입학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저는 '힘드니까 하지 말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인생을 그저 오래 살려고만 하지 말고 인생의 폭을 깊이 음미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taet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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