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아냐, 세계 최고 15m 파도를 타보자"

부산CBS 김혜경 기자 2024. 2. 2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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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요약
국가대표 서핑선수 조준희, 한국인 최초 나자레 파도 도전
10~15m 높이 큰 파도, 제트스키 없이 혈혈단신 패들링으로
인생의 힘든 순간 결정한 도전, "선한 목소리로 희망 주고파"
사진작가 Leo Domingos 제공

한 호텔 8층 테라스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다. 더 이상 이 고단함을 감내할 자신이 없다. 아직 20대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부지런히 파도를 친구삼아 살아온 삶. 더 이상 아쉬운 게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래,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파도를 타보자. 30m 파도에 휘말려 질식사하나, 여기서 뛰어내리나 피차일반. 마지막으로 꿈꿔보자.

서핑 국가대표 선수, 미국 서핑 프로 리그인 'WSL QS Jacks surfboard pro' 대한민국 국적 미국 QS 최초 출전, 제1회 Korea Surfing League 만리포 서핑 챔피언십 1위, 제1회 KSA배 대한민국 서핑 국가대표 선발전 1위 등. 그를 수식하는 화려한 수상 경력. 지나간 일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변화가 필요했다.

2022년 8월, 조준희(29)씨의 발을 포르투갈 나자레(Nazare)의 킬러스웰(Killerswell)이 잡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오는 곳. 한발 내딛으면 저승의 삶의 문턱, 그는 압도할 만한 파도의 환영을 보았다. 그 파도에 인생의 마지막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사진작가 Leo Domingos 제공


연평도에서 해병대 복무 중인 터라 큰 파도를 잡아타는 준비를 하는 여건이 녹록지 않았다. 군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체력 훈련에 더 정성스레 임했다. 3km 달리기, 턱걸이 등. 더불어 혼자 숨 참는 연습을 했다. 첫 시작 기록은 1분. 이걸로 부족했다. 큰 파도는 한번 휘말리고, 또 물 밖으로 나오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일상 루틴에 숨 참는 훈련을 넣었어요. 그렇게 1년의 세월이 지나자 1분은 4분 30초로 늘었습니다. 1년간 닷새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던 셈이에요. 남들이 숨 쉬고 일상을 영위하던 그 닷새간 발적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던 거죠"

매일 파도를 꿈꾸고 군 생활을 하던 어느 때, 연평도 해변에 포탄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전우들과 벙커에 도피했다. 그날, 죽음이 문턱까지 왔다. 아, 나는 살고 싶구나. 남은 군 생활은 큰 파도를 타기 위한 희망으로 버텨냈다.

조준희 선수. 사진작가 Leo Domingos 제공


2023년 11월, 제대한 지 한 달 만에 포르투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자레 파도가 치는 프라이아 두 노르트(Praia do Norte)로 향했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한 친구는 무조건 홍대 앞에 집을 잡았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다. 차근차근 준비해서 킬러스웰을 타자는 목표 그 하나로 시작한 나자레에서의 생활이었다.

나자레는 익스트림 서퍼들의 성지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파도가 밀려드는 곳이다. 바다 안에는 그랜드 캐니언보다 3배 깊은 협곡이 자리 잡고 있다. 해수면 아래 최대 깊이 5km의 거대한 해저협곡을 따라 빠르고 높은 파도가 친다.

첫 한 달간은 비교적 2m 높이의 깔끔한 파도가 들어왔다. 가볍게 몸을 푼다는 느낌으로 조금씩 강도를 높였다. 그러다 겨울이 다가올수록 6~8m, 10~15m 높이의 파도가 사나흘씩 밀려왔다. 10m가 넘는 파도는 패들링(paddling 서핑보드 위에서 양팔을 젓는 행위)으로 잡을 수 없다. 제트스키를 이용해 파도의 속도에 맞춰 파도를 탈 수 있도록 하는 토인 서핑(Tow-in surfing)이어야 한다.

제트스키는 마치 F1같이 한팀으로 움직이는데, 비용이 파도 높이에 따라 수백~1천만원까지 이른다. 서퍼들이 목숨걸고 파도를 향하듯, 제트스키 드라이버도 마찬가지다. 제트스키가 자칫 파도에 휘말려 부서지면 수천만원에 달하는 제트스키는 고철이 된다. 익스트림 서퍼들은 대부분 자신의 제트스키팀이 있다. 그는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파도를 넘기위해 갖고 있는건 오로지 양팔뿐이었다.

"제트스키에 거금을 들일 여력이 없었어요. 예산은 빠듯했고, 큰 파도는 아깝게 밀려왔죠. 생에 다시 못 볼 처음이자 마지막 파도를 그저 보낼 수 없었어요. 그냥 팔로 젖자. 패들링으로 파도를 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킬러스웰이 치는 인근 해변으로 들어가 왕복 5km를 패들링 해 들어갔어요. 매일 매일 거르지 않고"

사진작가 Leo Domingos 제공

큰 파도에 올라서지 못해 내동댕이쳐지기도 다반사. 운이 좋은 날은 파도를 잡아 수직으로 째며 서핑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파도의 가장 높은 곳에서 그만 휘말리고 말았다. 다음 파도가 오기 전에 빨리 깊게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통 안에 들어가 계속 원운동을 하는 것처럼 수 바퀴를 구른 터라 물 안인지, 밖인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찰나. 바닷속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말았다. 바다 안에서 숨을 마셨다. 바닷물이 입안으로 폭포처럼 쏟아졌다. 간신히 붙잡은 정신 줄, 가까스로 터벅터벅 해변으로 기어들어 왔다.

자연은 자연이다. 친절하다가도 언제 죽음의 사신으로 돌변할지 모른다. 처음으로 파도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그 높이의 낙차에서 파도가 부서지면 몸도 부서지는 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자연의 거대한 힘에 압도돼 두려움과 경위심과 또 동시에 정복하고자 하는 감정이 뒤섞였다.

몸은 이미 각성상태. 24시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성당엘 갔다. 파이프 오르간에서 흘러나오는 미사곡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500일 전, 죽기로 마음먹었는데, 이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그날 마음에 큰 열매를 맺은 기분이었다.

조준희 선수 본인 제공

"나는 왜 파도를 탈까? 본질적인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그건 단순한 쾌락이나 명예는 분명 아니었어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간절함이었습니다. 비록 나쁜 마음을 먹었지만,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결심이 들었습니다. 다시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긴 거죠"

세계적인 서퍼들도 겸손해지는 곳, 그곳에서 한 20대 한국인 서퍼가 매일 패들링으로 파도를 탄다는 소문이 돌았다. 파도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주변에 큰 울림을 줬다. 영국출신의 세계적인 서퍼인 앤드류코튼(Andrew Cotton)은 제트스키팀을 지원해줬다. 앤드류의 서핑 영향을 보고 꿈을 키운 그가, 이제 동료로서 도움을 받게 된 것이다.

또, 이름깨나 날리는 포토그래퍼들도 연락이 왔다. 작가들은 그의 서핑 순간을 담아줬다. 미국 유명 방송사 HBO가 제작하는 서핑 다큐도 촬영했다.높이 10~15m, 아파트 4~5층 높이에서 서핑보드로 미끄러져 내려온 시간들. 파도가 위에서 아래로 깨진다면, 그는 불안의 깊은 심연 아래서 뭍으로 올라왔다. 모든것 하나하나 계획하지 않았다. 그저 서핑보드만 들고, 마음이 이끄는 것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힘들 일의 끝에는 결국 좋은 이유가 있다',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500일 전 고군분투했던 그 고민과 절망의 시간이 없었다면 도전은 엄두를 못 냈을 겁니다. 석 달간 킬러스웰을 타는 도전을 이어오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돌아보니 파도를 타는 시간은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 마음에 있는 불안과 싸우는 여정이었구나. 저의 선한 목소리가 많은 분께 위로와 희망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선한 마음과 실천으로도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꼭 증명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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