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격주로 낸 잡지가 600권...한기호 "'광고' 아닌 '사람' 덕에 살아남았죠"

손효숙 2024. 2. 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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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격주 발간 '기획회의' 600호 발행
6000명 넘는 필자와 지켜낸 25년 
"출판역사 기록 사명감...1000호까지"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이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잡지 종언의 시대라고요? 25년 동안, 그것도 '잘' 살아남았습니다."

책의 자리가 점점 좁아진 지난 수십 년 동안 잡지 두 개를 발행해온 사람이 있다. 그것도 '남는 장사'를 하면서 말이다. 지난달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600호를 출간한 한기호(66)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얘기다. 기획회의는 출판계 담론을 다루는 유료 전문지로, 올해로 발행 25주년을 맞았다. 또 다른 도서관전문지 '학교도서관저널'은 14년째다. 최근 한 소장은 출판 잡지 두 권을 펴낸 25년의 '잡지 인생'을 담아 '잡지, 기록전쟁'이라는 단행본을 펴냈다.

한 소장과 출판의 질긴 인연은 42년 전 시작됐다. 출판사 '창작과비평사'의 마케팅 책임자로 출판계에 입문한 그는 당시 소위 '팔리는 책'에만 관심이 있었다. 업계에서 '베스트셀러 제조기' '출판 자본주의 화신'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경쟁에 몰입했던 그는 소설 '동의보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 굵직한 베스트셀러를 잇달아 만들어냈다. 15년간 치열한 출판사 생활을 뒤로 하고 출판계를 떠난 뒤 4개월 만인 1999년 2월 출판전문잡지 '송인소식'을 창간했다. "잡지는 세상이 급변할 때 담론을 제시하는 매체잖아요. 그전에 했던 일과 결이 좀 달랐는데 그 점에 끌렸어요. 지금까지는 책을 만들었다면 이제부턴 책이 갈 길을 만들어보자는 욕심이었죠. '팔리는 책'에서 '필요한 책'으로 전환한 것이죠."

잡지는 2004년 7월 유가지로 전환하면서 기획회의로 이름을 바꿨다. 1999년 2월부터 격주로 만들어 25년 동안 펴낸 잡지가 600권. 그 과정에서 결호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자부심이다. "편집자는 두 명이지만 출판인들이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내로라하는 출판인들이 글을 쓰고 그 파급력이 점점 커지는 게 눈에 보였지요. 책을 만드는 사람을 키운다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잡지 외길 25년의 비결...'현장성'과 '자율성'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잡지 '기획회의'에 대해 "출판의 시대를 증언하는 유일한 역사기록"이라며 "25년간 글을 쓴 사람만 6,000명"이라고 했다. 최주연 기자

한 소장의 강연료와 원고료를 다 넣다시피 하며 버틴 두 잡지는 10여 년의 담금질을 거쳐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다. 학교도서관저널이 수익을 내면서 전체 수익 구조가 흑자로 돌아섰다. 학교도서관저널은 전국 학교 도서관에 배포되는 독서교육잡지인데, 민간에서 도서관 저널을 만드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 이후 도서관 저널이 학교 현장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오히려 인간성, 책과 상상력의 가치가 학부모와 교사 사이에서 각광받기 시작한 거예요. 그 후 두 개의 잡지가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섰죠. 광고가 아닌 '사람'이 잡지를 살린 거예요."

후배들에게 전권을 맡긴 것도 장수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한 소장은 기획회의 500호부터는 의견은 내지만 제작 과정엔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학교도서관저널도 추천위원 70명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한 소장은 "제작 인력을 최소화하고 외부 필자를 적극 발굴하고 기용해 스스로 알아서 굴러가는 시스템으로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도 버티는 이유"라며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해서는 권한과 기회를 주면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소장의 목표는 수년 내에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것. "수도 없이 그만두고 싶었지만 600호를 만들면서 1,000호까지 가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지요. 누군가가 나를 이어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토대를 부지런히 만드는 중이에요."

기획회의 1,000호를 바라보며 잡지 인생 2막을 시작한 한 소장은 요즘 새로운 화두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다. 바로 '로컬(지역)'이다. 대한민국이 당면한 기후 위기, 불평등, 인구 소멸 문제를 '로컬'이라는 키워드로 꿸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다. 당장 601호부터 책 세계 이외에도 한국 로컬 담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고 실제 지역의 변화를 조명한다. "아무리 책을 내고 잡지를 내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세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데 동인이 되는 잡지라야 생명력이 있는 것이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라고 하는데 전 희망이 있다고 공언합니다. 남김없이 바친 25년이 그 증거예요."

지난달 600호를 맞은 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 한기호 소장은 최근 펴낸 단행본 '잡지, 기록전쟁'에서 잡지 제작 25년 역사를 담았다. 그는 책에서 "기획회의 1,000호는 살아 있다면 팔순이 지난 다음일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 있지 못하면 누군가가 나를 이어 약속을 지켜줄 것이라 믿는다"고 썼다. 최주연 기자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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