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이 먼저" 전기차 보조금 몰아주자…수입차 "가격 인하"
[편집자주] 전기차 국고보조금이 결정됐다. 현대차·기아 등 국내 기업이 외국 기업보다 가격 측면에서 유리한 상황이다. 이는 보조금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자국 기업 우선주의에 따른 보조금 정책이 가져 올 영향을 짚어본다.
아이오닉6 롱레인지 2WD 690만원 vs 테슬라 모델Y RWD 195만원
올해 전기차를 살 경우 현대차와 테슬라가 받는 국고보조금의 차이가 500만원 가까이 벌어졌다. 실제 두 차량의 성능은 그렇게 크게 차이 나지 않음에도 정부가 배터리 성능 요건 등을 추가하면서 차량 가격 격차가 커졌다. 국고보조금 개편안을 놓고 '정부가 국내 기업에 혜택을 준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환경부가 지난 21일 확정한 2024 전기차 구매보조금 개편방안에 따르면 5500만원 미만 차량에 대해 정부는 최대 650만원까지 국고보조금을 지급한다. 제조사의 차량 할인 시 최대 100만원의 추가보조금을 지원한다. 여기에 △1회 충전시 주행거리 △배터리의 ℓ(리터)당 전력량(Wh) △배터리 ㎏(킬로그램당) 유가금속 가격총계 △AS(사후관리) 운영체계 등에 따라 성능보조금을 줄이도록 했다.
이 중 배터리 성능과 관련한 요건은 사실상 테슬라와 중국산 전기버스를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이 세계 1위인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는 국산 전기차에 주로 장착되는 니켈·코발트·망간(NCM) 등 삼원계 배터리와 비교해 출력효율이 30% 가량 낮다. LFP 배터리는 재활용 되는 금속이 리튬 뿐이라 재활용 측면에서 불리하다. LFP 배터리를 장착한 대표적인 모델이 테슬라 모델Y다. 중국산 전기차도 대부분이 LFP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테슬라는 보조금이 지난해 대비(524만원) 절반 이하로 줄었고, 중국산 전기버스의 보조금 역시 감소했다. 올해 NCM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버스와 중국산 LFP 배터리가 적용된 전기버스가 받는 보조금의 차이는 최대 5300만원에 달한다. 국산 전기차 중에도 기아 레이 EV에는 LFP 배터리가 장착돼있지만, 정부가 경형 이하 차종에는 배터리 에너지 밀도에 따른 차등 지급 방안을 적용하지 않기로 하면서 레이 EV를 사면 보조금을 다 탈 수 있다.
보조금을 자국에 유리하게 설계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흐름이다. 미국이 북미에서 생산된 차에 한해 세제혜택을 지급하는 내용의 인플레이션 방지법(IRA)을 시행한 이후 각국의 보조금 정책은 보다 노골적으로 자국 기업 우선주의가 '게임의 룰'이 됐다. IRA가 시행되고 있는 미국에서 현재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전기차 차종은 총 19개다. 브랜드별로 보면 쉐보레 2개·크라이슬러 1개·포드 3개·지프 2개·링컨 1개·리비안 5개·테슬라 5개로 모두 미국 브랜드다. 프랑스는 올해부터 전기차 생산부터 운송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탄소 배출량을 측정해 환경점수를 매기고 이에 근거해 보조금을 차등 지급한다. 프랑스로부터 먼 곳에서 생산한 전기차는 운송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어 그만큼 보조금 혜택을 덜 받게 된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EV 볼륨즈'에 따르면 지난달 프랑스 시장에서 푸조가 판매 1위를 달성했다. 보조금이 개편되기 전까지는 테슬라가 1위였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중국, 미국, 유럽연합(EU) 모두 자국 산업 보호를 중심으로 보조금 제도를 바꿔왔다"며 "국내 기업이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자 책무"라고 말했다.
전기차 보조금을 자국 기업에 몰아주는 게 트렌드가 되면서 완성차 업체들은 가격 인하로 대응하고 있다.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다. 전기차 수요가 둔화한 상황에서 중저가형 전기차 보급을 늘리는 효과도 있다. 소비자의 선택지는 꾸준히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21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정부 전기차 보조금 상한선이 5500만원 이하로 정해지자 일부 완성차업체는 자체적으로 가격 인하를 단행했다. 폭스바겐코리아는 준중형 전기 SUV(스포츠유틸리티차) ID.4의 가격을 200만원 내린 5490만원으로, 폴스타는 중형 전기 CUV(크로스오버유틸리티차) 폴스타2 가격을 100만원 내린 5490만원으로 매겼다. 테슬라 역시 모델Y 2WD의 가격을 200만원 가격을 내려 5490만원으로 맞췄다. 폴스타2와 ID.4의 경우 지자체 보조금까지 수령하면 4000만원 후반대에 구매가 가능하다. 테슬라 모델Y 역시 5000만원 초반에 살 수 있다. 현대차·기아의 전기차보다는 약간 비싼 수준이지만 충분히 구매를 고려해 볼 만한 가격이라는 게 업계의 반응이다. 장착된 배터리와 성능은 다르지만 모델Y가 한때 한국 시장에서 코로나19 확산 시절 9000만원 넘는 가격에 판매됐다는 것을 고려하면 소비자 접근성이 훨씬 나아졌다.
중저가 전기차 출시도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전기차 시장 초기 얼리어답터들은 고가의 전기차라도 기꺼이 구매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다. 지난해 가성비 전기차로 꼽히는 KG모빌리티 토레스 EVX가 출시된 것을 시작으로 3000만원대 구매가 가능한 전기차들이 등장하고 있다. KG모빌리티는 토레스 EVX의 보조금이 457만원으로 책정되자 판매 시작가를 200만원 추가로 낮췄다. 기아가 올해 선보일 보급형 전기차 EV3, EV4은 니켈·코발트·망간(NCM) 배터리를 탑재하고도 국내 보조금을 적용하면 3000만원~4000만원대 구매가 가능할 전망이다. 볼보가 올해 상반기 중 출시할 예정인 소형 전기 SUV EX30은 NCM 배터리를 장착해 최대 주행거리가 475km나 되지만 유럽 시장보다 1000만원 정도 낮춘 4000만원 후반대부터 출시한다.
이같은 현상은 국내 시장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미국에서 현대차·기아는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에 달하는 세제혜택을 받지 못하는 대신 그만큼 할인판매를 진행 중이다. 포드 역시 전기차 크로스오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모델인 머스탱 마하-E 2023년형 제품 가격을 트림별로 3100~8100달러(약 414만~1081만원) 내린다고 밝혔다.
전기차 업계의 가격전쟁은 당분간 계속돼 중국과 미국, 유럽 시장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 샤오펑의 허사오평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직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올해는 중국 자동차 제조업체들 사이에서 '피바다'로 끝날 수 있는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는 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판매량은 정부 보조금 지급 여부가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완성차업체에서는 이익을 다소 포기하더라도 보조금 개편 방향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할인경쟁은 그 만큼 소비자들의 편익이 된다. 다른 관계자는 "전기차 가격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배터리인데 배터리 원자재값이 꾸준히 하락하고 있어 저가형 전기차는 늘어날 것"이라며 "가격인하와 저가 전기차의 보급 확대는 그만큼 소비자들의 선택 폭이 넓어졌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태성 기자 lts320@mt.co.kr 강주헌 기자 zoo@mt.co.kr 정혜인 기자 chimt@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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