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전에도 김정은에게 소장 보냈는데…

방극렬 기자 2024. 2. 2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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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피격 공무원 형인 이래진씨./뉴시스

국내 법원에서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한 민사 소송을 제기하는데 있어 ‘송달’은 오랜 난관이었다. 원고가 제출한 소장 등을 피고에게 송달해야 재판이 시작되는데, 북한은 주소지도 불분명하고 전달하는 방식도 마땅치 않아서다.

2016년 10월 국군 포로 노사홍·한재복씨가 북한과 김정은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재판부도 이 문제에 부딪혔다. 이 재판은 선고까지 45개월이 걸렸는데, 북한에 소장을 어떻게 보낼지를 두고 32개월을 고민했다고 한다. 당시 법원은 국가정보원을 통해 김정은의 북한 주소를 문의하고,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나 외국 북한 대사관을 통해 소장을 전달하는 방안도 모색했다.

고심 끝에 법원은 북한과 김정은의 주소를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로 정하고, 공시송달(公示送達)하는 방식으로 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공시송달이란 소송 상대방의 주소가 불분명할 때 소장 등을 법원 홈페이지 등에 올리고, 2주가 지나면 전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다. 이를 통해 재판이 겨우 시작됐다. 2020년 7월 북한과 김 위원장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 이후 다른 국군 포로들과 6‧25전쟁 당시 납북 피해자 유족, 제2연평해전 전사자 유족 및 참전 용사 등이 북한과 김정은을 상대로 연이어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법원은 이 사건들도 공시송달로 재판을 진행했다. 북한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국민들이 승소하는 판결이 하나씩 늘었다. 대부분 장‧노년층이 된 원고들은 뒤늦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지난 2일 서울중앙지법 민사 210단독 재판부는 서해에서 표류하다 북한군에 총살된 고(故) 이대준씨 유족이 북한을 상대로 낸 2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공시송달이 허용되지 않는다”며 재판을 열지도 않고 각하했다. 소송 시작 2년이 다 돼서다. 이씨 유족은 국군 포로 판결 때와 같은 피고 주소(평양시 조선노동당 청사)를 소장에 썼는데, 재판부는 이에 오류가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민사소송법은 당사자 주소 등을 알 수 없거나, 외국에서 해야 하는 송달의 경우 공시송달을 허용한다”면서 “그런데 이씨 유족은 북한 주소를 알고 있고, 헌법상 북한은 우리 영토라서 공시송달 요건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부의 논리는 치열한 검토와 고민 끝에 북한의 공시송달 방법을 찾은 법원의 기존 판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논리에 따르면 북한과 김정은을 상대로 한 모든 소송은 불가능하다. 평양에 소장을 전달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최후 수단인 공시송달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럼 조선노동당 청사로 어떻게 소장을 보내라는 것인가. 법 문언에만 얽매인 기계적 판단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유족 측 변호인은 즉시 항고했다. 항고심 재판부가 깊이 고민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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