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쌓는 바벨탑, 무너지는 언어 장벽 [김도연 칼럼]
세상 바뀌는데 입시-입사에 영어 중시 여전
영어에 쓰는 에너지 줄여 다른 곳 투자할 때
그런데 최근 들어 인류는 인공지능, 즉 AI를 이용해 혼잡했던 언어를 통일하며 바벨탑을 다시 쌓아 올리고 있다. 외국어 문장을 번역하는 일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가능했지만, 그 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진 못했었다. 그러나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문장 번역은 이제 놀라운 수준에 이르렀다. 책 한 권도 통째로 즉석에서 번역해 주는 탁월한 기능의 앱들을 거의 무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이다. 영어만이 아니라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세계 거의 모든 언어를 다룰 수 있으니, 이제 언어 장벽으로 소통을 억제했던 신의 뜻은 AI에 의해 크게 도전받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달 삼성전자가 출시한 AI 스마트폰은 또 다른 혁신이다. 탑재된 내장형 AI가 대화를 실시간으로 통역해 주는데, “허벌나게 맵다”는 전라도 사투리도 “It’s so spicy”로 옮긴다는 놀라운 능력이다. 이 역시 영어, 중국어 등 13가지 언어 통역을 지원하니, 앞으로 웬만한 해외여행이나 외국인과의 대화에서 언어로 인한 불편은 거의 사라질 것 같다. 물론 길고 복잡한 문장에는 아직 어려움이 많지만, 이 역시 가까운 미래에 극복될 것이 틀림없다. 앞서가는 AI 스마트폰을 개발한 삼성전자 엔지니어들이 매우 자랑스럽다.
이처럼 AI 등에 의해 인류는 산업 문명을 벗어나며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데, 이는 마치 과거 인류 역사에서 석기 시대가 청동기 시대로 진보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비유하자면 혹시 우리는 이미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돌 다루는 법을 계속 고집하며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과는 확연히 다를 디지털 문명 시대를 살아갈 우리 어린이들이다. 필요하다면 AI가 즉각 통역해 줄 텐데 오늘 다니는 영어유치원이 삶에 무슨 도움이 될까? 영어 문서를 읽으며 영어로만 일해야 할 사람들도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통·번역 도움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영어 교육과 영어에 대한 선입견은 그야말로 크게 바뀌어야 할 듯싶다.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초중등학생 사교육비 총액은 사상 최대인 26조 원을 기록했는데, 여기서 거의 절반은 영어 학습에 쓰이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영어를 총체적 지적(知的) 능력의 바로미터로 여기며, 이에 능통한 사람을 경쟁력 있는 존재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학 입학, 취직 그리고 공무원 시험 등이 모두 영어 성적에 의해 당락이 결정되는 것이 현실이다. 참으로 비합리적인 일이다.
수능 영어시험의 지문은 소위 변별력을 위해 미국 대학의 전공서적에 나오는 것까지 있는데, 이들은 많은 경우 고등학생으로서는 해석이 되어도 이해가 안 되는 내용들이다. 그 속에서 오지선다로 정답만을 찾는 수능은 수험생들을 한 줄로 세우는 데 지극히 유용할 뿐이다. 공무원 채용에서도 마찬가지다. 9급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은 통상 20 대 1이 넘곤 하는데, 설문조사에서 응시자들은 대다수가 필수과목인 영어가 가장 어려웠다고 답했다. 결국 우리는 영어 성적으로 공무원을 선발하는 셈이다. 나라 살림의 최전선에서 국민들에게 서비스하는 9급 공무원들에게 영어가 왜 그리 중요할까? 이들이 업무에서 만나게 될 외국인들은 1년에 몇 명이나 될까? 영어 문서는 얼마나 읽어야 할까?
제1의 국제어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영어의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영어 학습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영어는 의사소통 수단이지, 이를 통해 사람의 능력을 가름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 각종 평가에서 영어의 비중을 낮추면 좋겠다. 영어를 잘해야 능력 있는 사람이란 미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영어 학습에 빼앗기는 시간과 노력의 일부를 다른 곳에 쓴다면 대한민국은 훨씬 앞서갈 수도 있을 것이다.
김도연 객원논설위원·태재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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