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튼 아카데미-텅 빈 학교서 특별한 우정…미국판 ‘응칠’[시네프리뷰]
영화가 시작되면 등급 표시와 영화사 로고부터 1970년대에 사용되던 형태로 삽입된다. 놀라운 것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한 정도가 아닌, 실제 1970년대 작품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마치 10월의 마지막 날이면 가수 이용의 노래 ‘잊혀진 계절’이, 봄이면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이 라디오 신청곡으로 쇄도하는 것처럼, 특정 시간이나 계절이면 그때마다 반복해 소환되며 더 오랜 생명력을 얻는 창작물들이 있다.
연말연시 역시 다양한 형태로 창작물의 소재가 된다. 국내에는 소개조차 되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매해 연말이면 성탄절을 소재로 한 수십 편의 (대부분 TV를 위한) 영화가 만들어진다.
성탄절과 송년의 시기를 포함하는 일명 ‘홀리데이 무비(Holiday Movie)’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나 홀로 집에>(Home Alone·1990)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동안 성탄절이면 텔레비전 단골 메뉴로 지겹도록 방영됐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프랭크 카프라 감독,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의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1946)을 최고의 홀리데이 무비로 꼽는다. 이유는? 역시 TV에서 가장 많이 방영됐기 때문이다.
당시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최고 스타 제임스 스튜어트의 배우 복귀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그러나 정작 극장 흥행에 있어 그리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다. 저작권 보호 시한인 28년이 지난 1974년, 판권을 가지고 있던 리퍼블릭 픽처스가 저작권 연장에 실패함으로써 이 작품은 어디서나 자유롭게 상영·방영할 수 있게 됐다. 사실상 공짜가 돼버린 이 영화는 성탄절이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작품이 됐다.
고전적 현대영화가 만들어내는 박애와 품위
<바튼 아카데미>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모처럼 잘 만들어진 최신 홀리데이 무비를 만났다는 것. 그러나 이런 단순한 좁은 틀 안에 가둬둘 수 없는 비범한 작품이다.
1970년, 기숙학교 바튼 아카데미. 겨울방학과 연말을 맞이해 대부분의 교직원과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갈 곳이 없는 학생들은 학교에 남게 되고,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기로 소문난 역사 교사 폴 허넘(폴 지아마티 분)과 얼마 전 베트남전에서 금지옥엽 외동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진 주방장 메리 램(더바인 조이 랜돌프 분)이 이들과 함께 머물게 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등급 표시와 영화사 로고부터 1970년대에 사용되던 형태로 삽입했다. 이후 과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놀라운 건 단순히 과거를 재현한 정도가 아닌, 문득문득 실제 1970년대 작품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인물의 성격, 관계의 설정, 이야기의 전개나 마지막에 전달되는 훈훈한 교훈까지 마치 고전영화 한 편을 뒤늦게 발견한 듯한 푸근함을 영화 내내 경험할 수 있다.
따뜻한 연출로 빚어낸 배우들의 연기 호흡
이는 단순히 외형적인 기교가 아니다. 물론 과거의 풍경을 최대한 되살리기 위한 로케이션과 미술, 의상에 많은 공을 들이긴 했다. 하지만 이에 앞서 감독은 “스스로 나 자신을 1970년에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이라고 속이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당시의 정서와 영화 문법을 최대한 답습하고자 노력했다.
감독 알렉산더 페인은 늘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와 이해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대부분 작품이 범작 이상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특히 <일렉션>(1999)과 <사이드웨이>(2005), <네브래스카>(2013) 등의 작품은 꼭 챙겨보길 추천한다.
어쩔 수 없이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언급해야만 하는 영화다. 주연을 맡은 세 배우의 개별적인 역량은 물론이고, 함께 만들어내는 시너지가 대단하다.
특별히 <사이드웨이> 이후 알렉산더 페인과 두 번째 호흡을 맞춘 폴 지아마티의 연기는 일생일대의 호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는 3월 10일 개최 예정인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폴 지아마티), 여우조연상(더바인 조이 랜돌프), 각본상, 편집상 등 5개 부문의 후보로 지명됐다.
개인적으로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여우조연상은 더바인 조이 랜돌프의 수상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제목: 바튼 아카데미(The Holdovers)
제작연도: 2023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133분
장르: 드라마, 코미디
감독: 알렉산더 페인
출연: 폴 지아마티, 더바인 조이 랜돌프, 도미닉 세사
개봉: 2024년 2월 21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체리 주빌리’ 아이스크림 이름이 아니다!
‘현장학습’을 핑계로 보스턴에 1박2일의 나들이를 나섰던 세 사람은 마지막 날 저녁, 근사한 식당에 모여 짧은 일탈을 마무리한다. 옆 테이블에서 웨이터가 화려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걸 보고 음식 이름을 묻자, 웨이트리스가 답한다. “체리 주빌리(Cherries Jubilee)예요.”
뜻밖에도 익숙한 이름이다. 서른한 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돌려가며 파는 매장에 가면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몇 품목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름이 원래 고급 디저트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주빌리는 축제, 축전, 환희 등 여러 뜻이 있지만 몇 해마다 돌아오는 기념일의 의미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체리 주빌리가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것은 1897년 프랑스 태생의 전설적 요리사인 오귀스트 에스코피에(Auguste Escoffier·1846~1935)에 의해서라고 한다.
오귀스트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현대 프랑스 요리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로 평가된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요리사로서는 최초로 국가가 존경을 표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당시 영국 런던에 머물며 주방장 일을 하고 있던 오귀스트는 때마침 맞이한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즉위 60주년)를 축하하기 위해 여왕이 좋아하는 체리를 이용한 새로운 음식을 고안하게 된다.
접시에 체리와 키르슈(Kirsch·체리 증류 브랜디)를 담고 당시 유행하던 플랑베(flambe·재료에 알코올을 첨가해 화염을 폭발시키는 요리 절차) 기술로 완성했다. 처음에는 아이스크림이 없었지만, 이후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곁들이는 것이 굳어져 지금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최원균 무비가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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