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배의 ‘뉴욕의 한인 셰프’] [7] 맨해튼에 피운 장작… 숯에 구운 고기·생선으로 뉴요커를 홀리다
이제 한국을 떠나서 최고의 한식을 경험할 수 있는 도시는 미국 뉴욕이다. 그리고 뉴욕의 파인 다이닝은 한식이 주도하고 있다.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한국의 젊은 셰프들은 세계의 트렌드를 빨리 익혔고, 전 세계의 특급 레스토랑들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배우면서 오늘과 같은 미래를 준비해왔다. 그중 맨해튼에서 ‘주아(Jua)’와 ‘무노(Moono)’를 운영하는 오너 셰프 김호영(38)이 있다.
김 셰프는 한국의 ‘정식당’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2013년 파리로 건너가서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아스트랑스(Astrance)’에서, 2016년 뉴욕으로 와서 ‘정식’의 셰프로 근무했다. 이후 2020년 자신의 레스토랑 ‘주아’를 열었다. 메뉴로 김밥, 생선구이, 갈비, 죽 등을 재해석한 일곱 가지 코스 요리를 장작불로 구워 제공한다. 장작을 태운 숯과 재를 이용해서 낮은 온도로 조리함으로써 야채, 고기, 생선의 맛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다. 과거 장작불을 이용해서 밥을 짓고, 국 끓이고, 고기나 고구마도 구워 먹으며 요리하던 한옥의 부엌을 생각하며 레스토랑을 구상했다고 한다.
‘주아’는 한국에선 보편적인 음식인데 뉴욕에는 잘 없는 메뉴들을 선보인다. 예를 들면 죽은 여러 문화권에 비슷한 음식이 있지만 한국의 죽은 한 번도 뉴요커들에게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다. 그래서 김 셰프는 중식의 콘지(congee)나 이탈리아의 리소토(risotto)와 다르게, 죽을 끓일 때 보양의 개념을 첨가했다. 가금류의 육수에 숯불구이장어, 버섯, 시금치 등을 듬뿍 넣고 푹 퍼지도록 만들었다. 오리 요리도 장작불로 저온 훈제를 한다. 그러면 차가운 연기가 기름에 배고 단백질로 스며드는 과정을 통해서 색다른 풍미가 창출된다. 기름기가 많은 방어나 송어는 간장을 발라 놓았다가 연기를 씌우면 수분과 결합되면서 또 다른 맛으로 변한다. 참기름에 미끄러지는 듯한 부드러운 식감의 갈비구이는 깻잎, 연근조림 등과 같이 제공된다. 서양요리처럼 메인으로 고기나 생선과 같은 단백질, 사이드로 야채, 그리고 소스를 끼얹는 형식이 아닌, 계절에 맞는 반찬을 고기와 곁들이는 한식의 상차림 구성이다. 촉촉하고 풍미가 가득한 ‘주아’의 요리는 ‘불맛’에 진심인 한국인뿐 아니라 뉴요커들의 입맛도 사로잡았다. 미슐랭 가이드는 원스타를 주며 “또 하나의 특별한 한식”이라고 언급했고, 뉴욕타임스는 “한 번 먹어보면 주방에 신뢰를 가지게 되는 깊은 맛”이라고 극찬했다.
김 셰프는 2023년 두 번째 레스토랑 ‘무노(Moono)’를 열었다. 1889년 로마네스크 리바이벌 양식으로 지어져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을 선택했다. 과거 역사, 예술, 문학 서적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골리어 클럽(Golier Club)’이 사용하던 공간이어서 옛 도서관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여기에 자개장으로 장식된 바, 민화로 그려진 천장 등 한국적 디자인 요소를 가미해서 아름다운 내부를 완성했다. 인스타그램의 배경으로도 인기가 높다.
‘무노’는 세트메뉴 일색인 뉴욕의 모던 한식당들과 다르게, 한국 전통음식을 단품으로 제공한다. 이곳의 녹두전, 순대, 육회, 양곰탕, 보쌈 등의 메뉴는 오랫동안 제대로 된 한식을 그리워하던 교민과 유학생, 방문객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평양냉면, 어복쟁반 같은 전통음식들이 미슐랭 스타 셰프의 손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외국인에게 인정받는 한식도 중요하지만 외국에서 한국인에게 인정받는 한식 또한 큰 의미를 지닌다.
‘주아’의 식사 비용은 1인당 18만원, ‘무노’는 9만원 정도다. 두 레스토랑 모두 고급 식재료를 사용하지만 다른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들에 비해서 합리적인 가격이다. 이처럼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드는 한식은 금세 인정을 받았고, 손님의 폭도 점차 확장되고 있다. 오픈 초기에는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층 고객들이 먼저 찾아왔지만, 다음에 방문할 때는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고객이 많다고 한다. 비율도 한국인과 외국인의 비율이 반반 정도며, 고객의 재방문 횟수가 많고 단골도 많다. 레스토랑을 계획할 때 주력하는 손님층을 따로 두지 않고 가능한 한 여러 세대를 포괄하고자 했던 김 셰프의 생각이 잘 반영된 듯하다.
한국과 달리 뉴욕에서는 전통한식에 필요한 좋은 식재료의 조달이 수월하지 않다. 할 수 없이 다소 품질은 떨어지지만 현지에 유통되는 식재료를 구입하거나, 일부는 한국에서 직접 공수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김 셰프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 금년 내로 뉴욕 근교의 농장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메주를 띄워 장을 담고, 각종 채소도 키워 고춧가루, 참기름, 들기름 등을 생산하고 김치도 직접 만들 예정이다.
또 다음 달에는 무노의 건물 3층에 셰프 테이블을 오픈하려고 한다. 성게알, 캐비아, 트러플을 잔뜩 얹어주는 흔한 오마카세가 아니라 전통한식으로 구성된 코스 요리다. 바로 만들어서 손님 입에 들어갔을 때 맛이 극대화되는 한식을 위한 세팅이다. 즉석에서 구운 고기는 물론, 그 자리에서 부친 전, 직접 무친 겉절이 등을 제공하고 김치도 바로 앞에서 길게 찢어 주는 등의 서비스를 생각하고 있다. 음식을 한입 먹을 때마다 손님에게 한국의 맛과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한다.
한식은 조리 과정에 정성이 많이 들어가고 재료와 질감의 연출이 훌륭하며, 오방색의 아름다움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장점은 건강 요소와 더불어 매우 훌륭한 콘텐츠다. 김 셰프는 양념이나 허브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재료 본연의 맛에 충실한 요리, 간결한 플레이팅 스타일을 좋아한다. ‘미장 플라스(Mise en Place, 식재료와 집기 등 주방의 준비 상태)’가 아주 잘 되어 있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자신감이다. 전 세계의 레스토랑들이 유행하는 트렌드를 좇아갈 때, 이렇게 독창적이고 전통에 기반을 둔 레스토랑이 인정을 받는 건 고무적이다. 레스토랑의 진정한 경쟁력은 고유의 가치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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