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52] 느리지만 견고하게 세상을 바꾸는 힘

김규나 소설가 2024. 2. 2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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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날도 아레나스 ‘현란한 세상’

권력을 가진 자와 죄인은 성서의 언어로 볼 때 동의어다. 권력은 그들을 거만함과 시기로 가득 채우고 형벌을 받지 않는다. 대주교는 과달루페 성모에 대한 설교로 내가 받은 박해에서 자신은 면책받았다. 그는 과달루페 성모의 전통에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의심했다. 그러나 주민들을 속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자신을 정당화하고 주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그는 즉시 나를 비난하는 설교를 하라고 명했고 죄인이나 도둑처럼 나를 감금하라고 명령했다.

-레이날도 아레나스 ‘현란한 세상’ 중에서

쿠바가 우리나라의 수교국이 됐다. 쿠바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카스트로보다 더 유명한 아르헨티나 출신 체 게바라, 미 해군기지와 테러범 수용소가 있는 관타나모, 북한과 친밀한 공산주의 국가인데도 재즈와 낭만에 환상을 갖게 한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다. 소설 ‘노인과 바다’의 공간적 배경도 헤밍웨이가 사랑한 쿠바의 바닷가 마을이다.

‘현란한 세상’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몇 안 되는 쿠바 작가의 소설이다. 권력자 마음에 들지 않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세르반도 수사는 끔찍한 고초를 겪는다. 책임을 면하려 앞장서서 그를 비난하고 감금한 건 주제까지 정해주며 설교를 간청했던 대주교다. 세상이 바뀌고 수사는 영웅 대접을 받는다. 새로운 권력자가 독재하는 데 수사의 명성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실존한 멕시코인 신부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은, 희망을 품고 쿠바 혁명에 가담했다가 실망하고 고통받았던 작가 입장을 대신한다. 혁명정부는 생명을 위협하며 절필을 강요하다 작가를 추방했고 그는 10년 후 자살했다. 우연한 결말의 일치지만, 카스트로를 지지했으나 20년간 산 집을 몰수당한 헤밍웨이도 쿠바를 떠난 다음 해 자살했다.

특정 세력의 무장 폭동이나 급격한 체제 전복은 세상을 개선한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불러온다. 그러나 사람 마음은 노력한 만큼 더 풍요롭게, 더 자유롭게 지금보다 더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쉼 없이 흘러간다. 정직한 행복을 바라는 소망의 물결이 느리지만 견고하게 세상을 바꾼다. 북한과 돈독했던 쿠바의 수교 결정도 그런 바람에 기인했을 것이다. 더 멀리, 더 큰 것을 보지 못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건 북한과 이 땅에 사는 그들의 하수인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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