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헬조선'과 염세주의 철학의 열풍

2024. 2. 2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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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요즘 서점가에서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고 한다.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해 보니, 정작 쇼펜하우어 철학의 정수를 담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꿈쩍도 하지 않는데, 그와 관련된 철학책 세 권이 동시에 매우 높은 판매지수를 기록하며 당당하게 베스트셀러 목록 상단에 올라 있다. 이 현상을 염세주의 철학의 열풍이라고 판단한다. 나는 이 사태를 뜻밖의 문화적 사건이자 이해가 어려운 미스터리로 받아들인다.

 구약성경 속 욥의 시련처럼…

쇼펜하우어가 누구인가? “인생은 의미가 없다. 태어나지 않는 게 가장 잘한 일이고, 태어났다면 빨리 죽는 게 그다음으로 잘한 일이다”고 하는 염세주의 철학자다. 그는 니체의 스승 같은 철학자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우연히 읽고 열광한 청년 니체는 철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니체는 말한다. “그는 문장마다 거부, 부정, 체념 등을 외치고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세계, 삶, 고유한 정서를 볼 수 있는 거울을 만났다.” 과연 니체가 이 염세주의 철학자에게서 찾은 동일한 것을 오늘의 한국 독자들도 찾아낸 것일까? 근대 유럽에서 유행하다가 사라진 염세주의 철학이 무슨 까닭으로 21세기 한국에서 열풍이란 말인가?

사는 게 힘들어 현실 부정하기, 온갖 고통을 겪으며 삶에의 의지를 포기하고 빨리 죽기를 바라는 태도, 태어남 자체를 불편함으로 여기는 사상이 염세주의를 떠받친다. 현실의 짐에 허덕이는 이라면 현실을 혐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이라는 인물이 그런 사례다. 욥은 여호와의 시험으로 시련을 겪는 인물이다. 신실한 믿음을 가졌던 그에게서 나오는 고통에 찬 부르짖음을 들어보라. “어찌하여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습니까? 차라리 그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고 숨져 태어나지도 않았던 듯 이 모태에서 무덤으로 바로 갔으면 좋았을 것을.”(‘욥기’, 10:18~19) 욥은 자기의 태어남 자체를 문제 삼는다. 살아 있는 것이 고통스럽기에 태어나자마자 죽지 못했음을 한탄한다. 한순간도 살기 싫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끔찍해! 현존에 넌더리 치면서 부정하는 것은 세상을 겨냥한 염오가 뾰족하게 솟아난 사태일 테다.

 "모든 의욕의 기초는 결핍·부족"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서 ‘헬조선’이란 조어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짐작은 했지만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풀이한다. “지옥을 의미하는 ‘헬(hell)’과 우리나라를 의미하는 ‘조선’을 결합해 만든 말로, 열심히 노력해도 살기가 어려운 한국 사회를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 도무지 살 수 없고 벗어나야 마땅한 곳이 지옥이다. 이 조어는 우리가 발 딛고 현실이 더도 덜도 아닌 지옥이란 사실에 동의한다는 증거일 테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살기 힘듦, ‘너 죽고 나 살자’ 같은 무자비한 경쟁에 내몰린 청년 세대의 절망을 자조적으로 드러낸다.

사람은 그 근원에서, 본질에서 고통의 손아귀에 쥐어진 존재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 손아귀 속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우리가 구하는 참된 행복, 즉 무거운 짐과 고뇌에서의 해방은 의지의 부정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라! 그래야 “모든 이성보다 높은 평화, 깊은 평정, 흔들림 없는 확신과 명랑함”에 가 닿을 수 있다는 게 쇼펜하우어의 외침이다. 오늘날 현실에 염증을 느낀 이들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마음이 동했던 것은 아닐까? 태어남 자체가 재앙의 근원이 돼버린 지옥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이 쇼펜하우어에게서 공감과 위안을 얻는 것은 아닐까?

산다는 것은 무거운 현실적 요구들과의 마주침이다! 인생은 크고 작은 걱정거리로 가득 차 있다. 그 짐을 잔뜩 짊어지고 날마다 산비탈을 오르는 것, 그게 인생이다. 산비탈을 오르려면 그걸 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의욕, 혹은 의지를 생산해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현실에 널린 결핍이 빚는 고통에서 삶에의 의지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저 철학자는 그런 뜻에서 “모든 의욕의 기초는 결핍, 부족, 즉 고통이다”고 했을 테다.

 고통과 절망 넘어서는 지혜를

어쩌다가 ‘헬조선’이란 오명을 뒤집어썼을까?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하면 된다’거나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라’는 구호를 들었는데, 이것들은 군부 정권이 전횡하던 시절 군사주의에서 파생된 맹목의 구호다. 이것에 세뇌되면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의 도덕적 경계를 뭉갠다. 절차의 정당성을 무시하고, 옳고 그름의 분별을 없애며, 성과주의만 업적으로 떠받드는 가치관이 우리 양심을 무디게 만든다. ‘헬조선’은 그런 맹목의 구호들이 판치도록 만든 세태가 필요 이상의 낙관주의와 현실적 당위도 없는 우매한 희망들을 퍼뜨리고, 우리를 후안무치함과 뻔뻔함의 나락으로 밀어 넣은 것은 아닐까?

지옥으로 변한 세계에서 염세주의 철학이 심리적 도피처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열풍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태어났다는 재난과 온갖 결핍과 근원적인 불완전함으로부터 지옥에서 도망치는 중이다. 그도 아니라면 현실에서 오는 중압감을 무기력하게 견딜 뿐이다. 이게 삶의 실상이라면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어쨌든 ‘헬조선’은 우리 안의 적폐가 만든 결과물이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쇼펜하우어에게서 배울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결핍과 고통을 삶에의 의지로 바꾸는 지혜, 절망을 딛고 절망을 넘어서는 지혜, 권태와 나태를 떨치고 일어서는 지혜 따위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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