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교단을 떠나는 교사들

홍성배 2024. 2. 2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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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배 강릉본사 취재국장

가난은 옷에서부터 태가 나는가? 1920~40년생 우리 부모세대들은 어릴 적 가난의 시대를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왔다. 자식에게는 결코 쓰러져서는 안되는 기둥이며 철인의 존재였다. 부모 세대들은 농사와 바다 일로 평생 허름한 옷을 입으며 지냈다. 옷 한벌 변변히 사 입지 못하고 농사일, 바다에 나가 벽돌 짐을 나르며 옷의 의미도 모른 채 낡은 옷을 입고 고단한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에게만큼은 지극 사랑으로 철마다 옷을 사 입히곤 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는 옷 한 벌을 형제들은 형제들대로 내려 입혔고, 자매들은 자매들대로 티격태격 싸워가면서도 예쁜 옷을 아껴 입었다. 부모들은 부쩍부쩍 커가는 자식들의 옷을 항상 한 치수씩 크게 입혔다. 아이들은 줄줄이 커가고 넉넉한 살림이 아니니 방도가 없었다. 늘 형 옷을 입은 것처럼 웃옷도 한 겹, 바지도 한단 접어 입었다. 옷에 몸을 맞추려면 빨리 성장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옷은 태가 나지 않았으나 새 옷만으로도 기분에 들떴다. 옷걸이에 걸어 놓은 옷을 보며 웃으며 잠들기도 했고 아침에 눈뜨자 마자 밤새 키가 컸길 바라며 새 옷을 다시 입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몸에 맞는 옷은 ‘기다림’이었다. 옷이 자기 몸에 맞을 때까지 접어 올리기를 반복해야 했다. 몸이 성큼 성장하면 옷은 자로 잰 듯 어느 순간 쓱 맞았다. 그것도 훌쩍 커버리는 키 때문에 잠시이긴 하지만.

학생들의 옷차림에 선생님들은 늘 지도와 함께 자애로운 눈빛이었다. 옷 소매나 떨어지거나 팔꿈치가 드러난 아이들에게는 소매를 살짝 접어주기도 했다. 매일 같은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형편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사비를 들여 옷 한벌을 사 살짝 건네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체 학생들에게는 “좋은 옷을 입기 보다는 자주 빨아 입는 것이 최고”라며 청결을 강조하기도 했다.

벽지 학교 선생님들은 운동회나 소풍 때 단체복이라며 10여명의 학생들에게 티셔츠를 사 입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성장했고 차별 없이 지냈다. 그런 선생님들의 배려심 깊은 사제의 정을 당시에는 못 느꼈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 새삼 느끼는 이들이 많다.

생계에 허덕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조차 힘들어 교사에게 아이들을 도맡겼던 부모세대. 그런 시대에 자신도 넉넉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아이들의 성장을 책임지며 교단을 지켰던 선생님들.

그런 선생님들이 올해 295명이나 명퇴 신청을 하고 교단을 떠났다. 명퇴를 신청하고 학교를 떠난 교사들은 지난 2022년 280명, 2023년 248명, 2024년 295명으로 점차 늘어나는 추세며 올해 가장 많다.

명퇴도 명퇴지만 이제는 안타깝게도 교대 지망생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올해 교대 수시모집에서 서울 교대는 당초 185명 모집에 149명을 선발하지 못해 미충원 비율이 80.5%에 달했고 춘천교대도 60.8% 미충원 됐었다.

정시모집과 추가 모집이 이어져 교대생들의 모집에는 아직 차질이 없지만 경쟁률은 하락하고 있다.

교사들이 학교를 떠나고 교대를 지원조차 꺼리는 것은 학생 수 감소도 문제지만 교권 추락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앞으로는 학생들이 부족해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부족해 학생들이 배우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늘 풍족해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당연함’이 이제는 역전이 돼 ‘막막함’으로 다가올 날도 멀지 않았다.

우리 부모들이 아이 옷을 한 치수 크게 입힌 것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금방 클 아이의 미래를 예측하고 조금의 여유를 남겨둔 것이 아닐까.

힘든 교육의 현장에 어김없이 새 학기가 찾아오고 있다.

초등학생이 용돈을 모은 돈으로 음료수를 사 “선생님 음료수 하나 드세요”라고 건네면 선생님은 “응 너무 고마워. 그런데 이걸 받을 수가 없단다. 마음만 받을게”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는 학교의 현실.

사제지간의 정보다 법을 먼저 배워야 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먼저 가르쳐야 옳은 것인지.

형 옷처럼 한 치수 큰 옷을 입고도 부끄럼 없이 선생님에게 와락 안기던 교정의 추억들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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