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강대국들이 불장난하는 시대로 돌아가선 안된다
언제라도 핵 보유할 능력과 의지 보여줘야
푸틴 시진핑 트럼프의 核 불장난 막고
역으로 집단안보 최후 보루 NPT 지킨다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승전한 후 국제 관계를 재편하면서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대신에 민족자결(national self-determination)과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를 이념으로 삼았다. 세력균형은 강대국의 약소국 나눠 먹기에 불과하고 기껏해야 일시적인 평화만 보장할 뿐이었다. 윌슨은 약소국의 자결을 보장하고 그 위에서 강대국들이 영구적인 평화를 모색하는 집단안보를 추구했다. 그것은 무기의 현대화로 대량살상이 가능해진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약소국들은 이상주의자 윌슨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집단안보의 모색은 약소국들에 독립의 길을 열어줬다. 우리나라도 뒤늦은 수혜자다. 그러나 영구적인 평화는 너무 원대한 꿈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후 처리 실패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나자마자 냉전(冷戰)으로 이어졌다. 냉전의 실질적 내용은 한국전쟁에서 우크라이나전쟁까지 이어지는 약소국에서의 열전(熱戰)이었다.
그나마 열전이 냉전의 껍질을 깨고 나와 대전(大戰)으로 비화하지 않은 건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 무기에 의한 공멸의 위기감 속에서 최소한의 집단안보가 유지됐기 때문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승전국인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등 ‘4개 경찰국(Four Policemen)’에 의한 집단안보를 구상했다. 이것이 프랑스를 포함해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이어졌다. 유엔 상임이사회는 거부권의 족쇄에 잡혀 기능하지 못했다. 거부권의 족쇄를 풀려면 상임이사국들이 가치를 공유해야 하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는 대화가 어려웠다. 다만 상임이사국에만 핵 보유를 인정한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집단안보에 실효적인 최소한의 구속복(拘束服·straitjacket)으로 남아 있다.
재선에 도전한 도널드 트럼프가 북핵을 사실상 인정하고 대북 지원의 대가로 핵 동결-축소-폐기를 유도하려 한다. 핵 보유국이 자발적으로 비보유국이 된 적이 없어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더 심각한 것은 트럼프가 북핵 용인을 핵 억지력 제공 비용과 결부시키는 상황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더 이상 미국의 피와 돈만으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의 핵 억지력 실행에 대한 의구심이 항존(恒存)하는 상황에서 억지력의 대가가 지나치면 차라리 자체 억지력을 갖는 것이 낫다.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가 아니라 NPT를 모범적으로 준수해온 한일이 핵무기를 보유한다면 집단안보의 최소한의 구속복이 완전히 풀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트럼프의 불장난을 막으려면 핵무기를 가질 수 있음에도 갖지 않은 나라들이 언제라도 핵무기를 개발할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한일만이 아니라 트럼프가 탈퇴로 협박하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NPT는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 러시아 중국에 핵 보유의 특권을 부여한 체제인데도 러시아와 중국은 북한의 핵 개발을 제지하기는커녕 방치하고 이제는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특권을 부여받은 나라로서 무책임하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이익에도 반한다. 다만 두 나라가 한 어리석은 짓을 깨우쳐주기 위해 러시아와 중국에 가까운 곳에 핵무기를 재배치해야 할 때 미국이 안이한 판단으로 하지 않았고 결국 북핵의 현실화로 이어졌다.
핵 강대국들이 집단안보를 위한 최소한의 의무라도 이행하도록 하려면 핵 비보유국들이 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 자체 핵무장 능력도 갖추지 않고 핵무기 재배치도 거부하는 한가한 자세로는 국가의 안위도, 세계의 안위도 지키지 못한다. NPT를 모범적으로 준수해온 나라들이 NPT를 넘어설 각오까지 해야 NPT가 가까스로 지켜질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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