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최전선, 그것이 불행을 자초할지라도

한겨레21 2024. 2. 20.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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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삶의 ‘도피처’ 아닌 ‘최전선’으로서의 이야기… 창작자가 삶의 문제 직시해야 이야기다운 이야기 만들어져
하고 싶은 것을 한다고 무조건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은 창작자가 삶의 숙제를 대면하는 ‘불행’을 직시해야만 가능하다. 한 웹툰 작가가 작업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꼭 좋은 대학 안 가도 돼. 사람이 좋은 대학에 가야지만 행복한 게 아니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제일 좋아. 그래서 너는 뭐가 하고 싶어?”

‘좋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곧잘 하는 말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런 말을 하는 부모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자녀가 하고 싶은 게 뭔지를 찾아서 그걸 하며 살기를 바란다. 행복은 돈이나 출세에 있는 게 아니라 ‘자아실현’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장 무거운 짐, 자아실현

당연한 말이다. 그리고 이건 모든 사람이 ‘개인’이 된 근대사회의 가장 큰 축복이기도 하다. ‘해방된 존재’가 아니라면 결코 ‘자아’를 중심에 둘 수 없다.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주인의 의지에 따라 살아야 한다. 주인이 하고 싶은 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종속된 자의 의무다. 그렇기에 자아실현이 행복의 핵심이 됐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해방돼 다른 누구도 아닌 ‘나’가 ‘나’의 주인이 됐다는 의미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이란 자기의 주인이 된 자를 말한다.

그렇기에 자아실현은 행복이지만 동시에 큰 숙제이기도 하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개인으로서의 우리 모두는 이제 ‘나’가 돼야 하는 존재다. 생애사적 기획으로 자신을 실현시켜야 하며 드러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삶은 실패한 인생이다. 삶에 대한 전기적 해법으로서 자아실현은 개인의 도덕적 책무다. 그러다보니 ‘나’야말로 사람의 가장 무거운 짐이 됐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해. 그래서 뭐가 하고 싶어?”라는 말이 엄청난 중압감을 가지게 됐다. 자기가 아직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지 못한 학생들은 열패감에 시달린다. 다른 친구들은 삶의 목표를 가지고 힘차게 전진하는데 자기만 아직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모른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부모가 ‘좋은’ 부모일수록 이 열패감은 더하다. 공부하라 강요도 하지 않는데 자기는 바보같이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는 ‘바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부터 ‘자아실현’이란 말만 들어도 체한 것 같고 구토가 난다는 학생이 꾸준히 늘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이 말에 냉소하는 ‘성숙한’ 청소년/청년이 늘었다. 그들은 저 말이 입바른 소리라고 생각한다. 삶의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데 있지 않다. 안온(편안)하게 사는 게 가장 행복한 삶이다. 그래서 의사인 친구가 자녀에게 “의대 안 가도 된다.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아라”라고 말했을 때 아이가 벌컥 화내며 대답했다. “내가 의대 못 갈 것 같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난 의대 갈 거야. 편안하게 살고 싶어.” 아이는 결국 재수에 삼수를 거듭해서 의대에 갔다.

‘덕업일체’의 삶은 행복할까

이들을 ‘성숙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비꼬는 게 아니다. 냉소주의자야말로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은 저서 <비극>에서 환멸이야말로 성숙한 사람들이 품게 되는 마음이고 희망, 특히 사회적 희망에는 “뭔가 견딜 수 없는 미숙함”이 있다고 말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불변의 가치가 있고 그게 ‘잘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다. 가치 따위가 있다고 하는 희망에 속지 않고 속물적인 것에 민망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태도다. 사실 속물이란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큰 의미와 가치를 두지 않고 그조차 냉소하는 사람이 아닌가. 이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미숙한 부모의 성숙한 자녀”라는 말로 위로하곤 한다.

그러면 소수이긴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이미 발견했고 그걸 추구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떨까? 행복할까? 누구의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이 ‘덕질’(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나 인물에 심취해서 하는 행동)이고 나아가 그 덕질이 업이 된 ‘덕업일체’의 삶이라면 행복할까? 사실 ‘덕질’ 하는 동안 불행해하는 사람을 만나보지는 못했다. 세상이 아무리 비루하더라도 자신이 아주 좋아하는 것을 하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하다. 그렇기에 이 불행한 사회에서 행복의 가능성을 지닌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마 ‘덕후’일 것이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을 한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내가 일하는 ‘덕후 학교’에서 알게 됐다. 여기는 어떤 학교보다 만화를 좋아하고 그리고 싶어 하는 학생에게 최적화된 교과과정을 자랑한다. 학급당 학생 수가 많지 않아 부족하지만 일대일 교습도 받을 수 있다. 희귀본을 포함해 귀중한 만화 자료를 많이 보유한 만화도서관에서 온종일 실컷 만화를 볼 수도 있다. 만화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학교다.

여기에서 행복할까? 다행히 그런 학생도 있겠지만 아닌 학생도 종종 만난다. 무엇보다 경쟁이 치열하다. 여기에 들어올 정도면 만화를 잘 그린다고 자부할 실력인데, 들어와서 보니 자기보다 더 잘하는 친구가 많다. 밤새 애쓰고 따로 사설 교습도 받으며 노력해보지만 실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당연히 자신에게 실망하고 비관하게 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더라도 경쟁은 그 좋은 덕질에서 ‘실격’을 선언하고 탈락시킨다. (그 ‘업’이 아니더라도 덕질을 유지하며 살아갈 다른 수많은 길이 있음에도. 사실 문제는 그것만 ‘업’이라 말하고 거기서만 성공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이 좁은 ‘성공주의’지만 말이다.)

그러나 경쟁만이 문제가 아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전부,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것이 아님을 실력 있고 유능한 학생들을 만나면서 알게 됐다. 대표적 친구가 지영(가명)이다. 어려서부터 만화를 좋아했고, 만화가가 되고 싶었고, 만화가가 되어 이 학교에 왔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성적은 최상위층에 속했다. 학교 성적만 그런 게 아니라 외부 활동도 활발하다. 이미 작가로 데뷔해 인정받고 있다. 그럼에도 지영은 행복하지 않았다.

삶의 최전선에서 문제를 대면하다

지영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다. 가족이었다. 어려서 이혼한 엄마는 내내 자신이 불행한 이유를 아이들에게서 찾았다. 결혼하지 않고, 자식만 없었더라면 자기는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지영을 지배한 것은 죄책감이었다. 남(엄마)이 불행한 원인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려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미안함을 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노력한다고 엄마 마음이 누그러지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애초에 지영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다만 엄마의 혀 위에서, 지영의 마음속에서 연결됐을 뿐이다. 노력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으니 노력할수록 더욱 좌절했다. 삶이 피폐해졌다.

그 과정에서도 만화는 유일한 피난처이자 기쁨이었다. 만화를 그리는 동안에는 잊어버릴 수 있었다. 실력이 좋았으니 돈도 벌어 자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깊이 만화에 들어가자 만화는 도피처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만화야말로 자기 삶의 ‘최전선’이 됐다. 자기 작품을 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가자마자, 자신이 기획하는 이야기에 엄마와 자신의 삶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고 이야기는 흔들렸다.

직접 ‘엄마’라는 캐릭터가 등장할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엄마가 등장하지 않아도 그림자는 여전했다. 누군가 억울한 장면이 나오면 이야기는 돌발적이고 감정적이 됐다. 인물은 입체적이지 않고 선/악 이분법으로 단순해졌다. 도덕적 구도가 단순해지다보니 그 안에 밀어넣은 인물이 단순해졌고, 스토리는 돌출적 사건들의 (연쇄가 아니라) 나열이 됐다. 독자 입장에서는 전혀 정돈되지 않은 인물과 산만한 이야기였다. 작품은 일기가 아니란 말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적어도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것’은 자기 삶에서 ‘풀어야 하는 것’의 도피처가 아니라 최전선이었다. 다른 이야기를 푼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자신이 대면해야 하는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 직시해야 가능했다. 이전에 가르쳤던 다른 한 친구는 이것을 “문제를 인식하지 않으려 도망쳐다녔는데 결국 그게 정확하게 돌아오더라”라고 말했다. ‘어떤’ 이야기는 삶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라 최전선으로 사람을 돌아가게 하고 그 전선에서만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 최전선에 서서 문제를 직면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 결코 아니다. 자신의 불행을 직시하는 것이다. 직시한다고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는 문제를 대면하는 것이다. 사실 성숙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일이다. 헤어날 수 없는 나락에 빠지는 것일 수도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그 자리에 서게 된다. 내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이야기는 불행을 일깨운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불행을 자초한다.

얼마 전 지영을 만났다.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엄마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엄마가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발목 잡던 죄책감에서 해방됐다고 했다. 엄마로부터 벗어난 것은 지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시작하게 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찬찬히, 더 깊이 있고 다채롭게 들여다보게 한 것이다. 문제였던 ‘엄마’의 가장 큰 문제가 그것이었다. 문제를 다르게 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하는 것 말이다. 이 문제에서 벗어나자 지영은 편안해졌지만 동시에 약간 길을 잃은 것 같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꼭 이야기해야 하는지에도 의문이 생겼다.

불행을 단단히 움켜쥐어야 하는 이유

지영에게 이제야말로 이야기를 풀어볼 때라고 말했다. 엄마라는 문제에 가려졌던 자신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고 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자기 문제의 핵심이 ‘엄마’였는지, ‘죄책감’이었는지, 아니면 이번 생에서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그 ‘절망’이었는지,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을 이제야말로 시작할 수 있으니, 그 여행의 이야기를 풀어내보라고 권유했다.

어쩌면 행복한 삶을 향한 과정의 핵심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단단히 움켜쥐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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